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이계삼. p337
가장 좋은 교육이란 사람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중·고교 시절 내내 엄청난 학습량과 군대식 학교 문하에 지쳐서 거의 꿈을 잃어가고 있었다.
대학에서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1990년대 초반의 대학가는 확실히 ‘해방구’와 같은 데가 있었다…농촌활동과 야학, 학생회와 문학회를 오고 가면서 나는 세상의 낮은 곳에 처해야만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그때 대학가를 지배하던 진보적 변혁의 논리에는 자주 회의했다. 유물론적인 사고방식, 금속성의 언어들,…여전한 방황과 불안을 안고 있던 군복무 시절, 『녹색평론』을 만나게 되었다. 거기에 실린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과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나는 거의 ‘개안’과도 같은 경험을 했다. 나는 이들을 통해 진정한 진보란, 무언가를 딛고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약한 것들을 보듬어주는 손길이며, 자기희생의 고통 그 자체임을 배웠다.
그리고 두분의 스승을 만났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님이 내가 다니던 대학으로 강연을 오셨다. 그때 선생님은 “젊은이들은 주류의 가치로부터 이탈해야 한다”고 하셨도,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세째도 겸손”이라고 하셨다. 내가 지녀야 할 가치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북산 최완택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목사님은 내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머리 쓰다듬어 주는 선생님”이 되어줄 것을 당부하셨고, 그것은 또한 교사로서의 나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나는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변방’에 속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민중의 자녀들과 만나온 것이다. 이 나라의 교육현실이란 기가 막힌 것이지만, 뜻밖에도 나의 학교 안에서의 생활은 기쁘고 즐거운 순간들이 더 많았다.
이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결론이란, 이 책에 실린 어느 글에서 밝혀놓고 있듯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우정’이며, 교육은 그저 땀이자 숨결이고 사랑일 뿐, 그 정신의 가난함 외어 어떤 완숙한 물적 조건도 부차적이며, 오히려 해악이라는 것이다.
모둠비빔밥. 모둠일기장처럼 아이들은 태생적으로 모둠살이에서 가장 큰 자유와 행복은 느낀다. 그것은 아이들이 육체와 정신을 온통 상하게 하는 이 혼곤한 나날 속에서도 아직은 가난한 마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고, 삶의 의미 앞에서 방황하면서도 인생의 그 어떤 시점보다 우정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20년 전보다도 우리사회는 여하한 모든 것이 ‘진보’했다는데, 왜 교육은 이렇게 갈수록 나빠지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사회가 자기만족과 안락에 대한 충동, 그리고 풍요에 게걸든 사회가 되었기 때뭄이다. 그 욕망들을 한곳에 모아 하치시켜 놓은 곳이 바로 교육의 영역이라고 나는 느낀다.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목록들은 이렇게 하치된 욕망들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유토피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희망을 갖고 있다.-이반 일리치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누군가의 머리’ 속에서 나와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 보자’는 것이 유토피아라면, ‘자신의 마음’에서 나와 ‘자신이 이렇게 해 보려 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리치는 “나는 유토피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희망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말하기 이전에, “우리들 자신이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오늘날, 특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래, 사회의 모든 영역들에서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듯 거침없는 질주가 이어지고 있다. 교육 또한 예외가 아니다…밤이 깊을수록 별이 반짝이듯, 상황은 나쁘지 않다.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지난 5년간 여러 매체에 썼던 글들을 추려서 묶은 것…자료를 읽고, 생각을 가다듬을 충분한 여유가 없었으므로 이 글들은 대체로 성글고 어설프지만, 언제나 절실한 마음으로 썼다.
#다들 고향이 있지 않습니까_한겨레21, 2006년 5월16일
허망한 도시의 인간관계에 이미 나는 진이 빠져 있었다.
배후의 농촌을 착취하는 도시, 자원을 한정 없이 가져다 쓰기만 하는 도시, 인간의 온기를 빼앗아 연명하는 도시, 말하자면 도시는 생태계의 거대한 ‘종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들처럼 용기가 없었고, 달리 갈 데가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이 도시에 정을 붙이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 모든 게 분명해졌다. 아버지의 육신이 담긴 관에 흙이 뿌려질 때,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나의 아들은 육신의 연쇄 속에 있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그렇게 학교를 옮기고 귀향을 결행했다…땅과 고향을 지키는 일, 이 아이들 중 누구라도 되돌아와 살만한 곳으로 내 고향을 가꾸는 일, 전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는 일, 내가 떠나더라도 다음 세대에 넘겨줄 구체적이고 한정된 책임이 나에게는 있다…우리에게 고향이 있는가. 육신의 탯줄을 도회에 묻었을지언정, 우리가 뿌리내릴 정신의 고향은 있는가. 가치로운 것이라면 뿌리부터 뽑고 보는 것이 일상이 된 이 기막힌 시대에, 몸둘 곳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이 가여운 시대에, 마음의 상처를 찾아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나는 거듭 묻는다. “다들 고향이 있지 않습니까?”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_녹색평론, 2005년 9-10월호
중국의 대문호 루쉰, 『후지노 선생』 동경 유학, 새로운 중국 건설에 시급한 문제는 의학과 같은 신학문이 아님을 직감했던 것 같다.
김선일 참수 동영상이 도는 학교. 나는 우리 교육이 뭔가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그리고 아이들의 내면세계가 심각하게 황폐해져버렸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었다.
루쉰의 『광인일기』와 ‘식인’. “너희는 마음을 고쳐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계? 한국의 교육현실? ‘내가 먹고 싶지만 먹힐 수도 있다’는 공포가 우리의 나날의 끈질긴, 간절한 노동을 지탱한다. 그래서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아직 ‘사람을 먹어보지 못한’ 아이들, 그들을 찾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아이들을, 그들을 맡아 키우는 한국 교육의 현실을 앞에 놓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한번도 사람을 잡아먹어보지 않은 아이는 어디에 있는가.”
‘식인’의 교육. 우리 교육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스무살이 아니라 서른살이 넘어도 정신적으로든 물직적으로든 부모 세대의 영향력에 철저히 기생하는 ‘어른 아이’들만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유별난 교육열은 기실 교육을 통해 자기 자식을 “사람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볼 수 없다. 그것은 교육의 장에 펼펴진 지위 경쟁의 앞자리에 올라타 땀 흘리지 않고 살면서 군림하는 지위에 올라서주기를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었다. 그동안 우리 삶을 지배해온 논리는 노동하는 삶에 대한 철저한 수탁과 모멸스런 비하였으므로 이런한 소망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복종적 신민, 영혼없는 인간을 길러냄으로써 영속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려하는 국가,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한 자본, 자기 자식이 땀 흘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 이 3자가 결탁하여 이 형편없는 교육체제는 성립되었다.
대개의 한국 고등학교는 반교육적이면 반교육적일수록 인정받는다.
경제성장과 민주화-욕망의 시스템
박탈당한 ‘무위의 시간’.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앞서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두가 추구한 ‘부분적 합이성’은 곧 ‘총체적 비합리성’을 낳았다.
아이들이 ‘홀로’, ‘스스로’ 보내는 시간은 거의 사라졌다.
이제 한국에서 교육은 3차 산업, 서비스업의 일종이다.
그 어떤 방안이건 ‘한국적 상황’이라는 특별한 필터를 통과하고 나면 반교육적인 골칫덩이가 되고 만다.
상대평가 체계 전환. 시험기간에 친구에게 공책을 빌려주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을 예비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정’마저도 원칙적으로 파괴하는 극단의 야만 속으로 모든 아이들을 밀어넣고 있는 것이다.
영혼 없는 복제품이 되어 가는 이 시대의 아이들. 경제성장이란 물질적 탐욕을 위함이었고, 민주화는 공익이 아닌 사익, 개개인 각자의 이기심을 제도적으로 보장받고자 하는 흐름으로 귀결되었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가 구축한 것은 결국 욕망의 시스템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교육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교육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체제의 한 하위 영역이 아니라 바로 욕망의 시스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결국 이들에게 교육은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인간 정신이 온전하게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가난’, ‘결핍’, 그리고 ‘힘없음’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진정한 교육은 바로 이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지며, 이것들에 대해 성찰하고 연민하는 정신이야말로 교육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는다.
전면적인 불복종과 저항말고는 다른 길은 없다. 아이들이 이 교육체제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배움이란 부정과 저항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은 하루뿐? 18세 꽃다운 나이라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아직까지 나의 인생은 단 하루뿐이었다. 매일 똑같은 나날뿐이었으니까.
#상처의 의미_우리교육, 2007년 5월호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 선한 것이 있다면 타고난 천품이요, 악한 것이 있다면 어른들이, 혹은 이 사회가 그들에게 아로새긴 상처라고. 그들은 가냘픈 존재일 뿐이므로 그들에게 물어야 할 죄는 없다고, 믿게 되었다.
아이들은 무수한 상처을 받으며 성장한다…그러므로 교육은 상처를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응시하고 그것과 대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한국 교육을 관통하는 가장 뚜렷한 정서적 기류는 ‘일 없이, 편하게’ 가려는, 안락에 대한 충동.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져야 할 것은 계속 부플어 오른다.
‘상처’를 다루지 않고서, 지금 우리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벌이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교육과 비폭력_녹색평론, 2007년 1-2월호
어둠을 탓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둠을 탓하기보다는 한자루의 촛불을 밝히는 것이 훨씬 가치롭습니다.
폭력의 근원? 폭력은 ‘무지’에서 옵니다. 개별 존재에 가해지는 폭력은 개별 존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아이들 세대 전체에 가해지는 사회의 폭력 또한 ‘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집단적 몰각에서 옵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논리도 성립합니다. 폭력의 대칭어는 아마도 ‘비폭력’-사랑-이겠지요. 비폭력 혹은 사랑의 바탕은 그 대상에 대한 ‘앎’입니다. 잘 아는 존재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들을 모르고 있는 교사와 교육행정가. 학교 폭력이 근절될 수 없는 것은 학교 폭력의 근원에 대한, 아이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무시에 바탕하기 때문. 무지는 두려움을 낳습니다. 교사의 지혜로움은 연륜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50대임에도 20대의 영혼을 가진 ‘청년 교사’가 있고, 20대에도 50대의 영혼을 가진 ‘늙은 교사’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많지 않다.”-생텍쥐베리,『어린왕자』
‘비폭력’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잘 아는 것’
토끼와 사냥군. 폭력의 근원, 사냥군의 사냥을 중지시키는 일. 그 과정에서 나그네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합니다.
비폭력은 간디의 어법을 빌어 말하자면 교육의 가장 유효한 수단이자, 교육의 목적 그 자체입니다…그리고 비폭력을 위한 실천은 ‘자기희생’ 말고는 달리 다른 길이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을 저는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좋은 언어와 관용의 정신_이른바 ‘논술열풍’에 대한 한 생각
세상이 ‘말과 글’로 넘처난다…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일기예보를 통해 날씨를 ‘느낀다’
황우석 사태.”저것도 생명인데, 저렇게 해도 되는 일인가”. 그것은 사기꾼의 사기행각의 전모보다 훨씬 더 깊고 중요한 ‘올바름’의 문제를 담고 있은 ‘큰 세계’였던 것. 생명을 다루는 일에 대해 생명의 가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왜 유별난 감각으로 취급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타락한 언어가 조성한 타락한 세계의 모습이 지금 여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생각한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유’에 있다면, 진정한 교육은 아이들을 ‘말과 글’의 지배로부터 ‘살아있는 세계’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현행 논술고사는 ‘시험을 위한 시험’. 논술고사의 파행은 극히 단순한 사실에서 연유. 논술고사의 도입 자체가 극히 반교육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
교양이란, 실제적인 쓸모가 없고, 값없이 주어져야 하며, 그 값없음을, 쓸모없음으로 제 쓸모를 찾는다.
#흙의 신앙, 인간의 교육_녹색평론, 2005년 11-12월호
흙의 신앙이 사라진 곳에서, 우리 아이들 또한 뿌리뽑힌 삶으로 떠돌수밖에…수 천년 아래 이 땅에서 이루어졌던 자연적인 순환의 고리가 이제 막 끊어지려는 즈음. 그 시절의 아이들의 감각과 정서는 이제 곧 화석이 될 것이다.
한 세기가 경과하면서 “사람은 밥이니,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휴대폰을 먹고 컴퓨터와 자동차를 먹으며 살아야 한다”는 도착된 논리 속에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우리들에게 휴대폰과 컴퓨터는 도구가 아니라 제 오관(五官)을 대체하는 신체의 연장이다. 아이들은 제 옆으로 질주하는 자동차는 무심히 비켜가지만, 교실에 날아든 한마리의 벌을 보고는 기겁한다.(감각의 확장-『미디어의 이해』)
‘노작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농적인 교육’의 가치와 방법론을 정립, 젊은 남성에게 부과되는 병역의 한 분야로 농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총을 들기 원치 않는 평화주의자, 땀흘리며 노동하는 삶을 배우고픈 젊은이들로 하여금 ‘총’ 대신 ‘보습’을 들게 하는 것은 국가가 민중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될 것이다.
나는 흙의 신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을 흙으로 되돌려놓지 않고서는 그들의 불안과 좌절은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현실’이란 무엇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흙의 신앙은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현실은 현실이 아닌 것일까. 흙의 죽음, 땅의 죽음, 밥의 죽음, 나에게는 이보다 더 절박한 현실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가난과 교육_김진경, 박복선 선생님께
“지난 16년간 전교조는 아이들의 성장과 자유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우리 교육운동은 지난 십수년 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다만 방황했을 따름입니다.
제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이 주장들이 모두 ‘교실 바깥’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을 뿐, 정작 ‘교실 안’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부처님 이야기. 강을 건너 산길을 가면서도 뗏목을? “당신은 왜 뗏목을 이고 가지요?” 저는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이 바로 지금 전교조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전교조운동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커다란 덩치의 조합 대중조직 전교조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전교조는 아이들의 변화를 교육적 성과로 이어가는 일보다는 스스로의 존립과 유지에 더 큰 동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러나 시스템은 내명이 없는 물질이고, 물질은 자신의 운동법칙에 따라 굴러갑니다. 전교조는 교사들의 양심, 열정과 뒤섞여 있지만, 물질이 정신을 밀어내는 인간사회의 법칙에 따라 조직은 결국 어느 순간부터 자기 존재를 위해 운동하게 됩니다.
결국 전교조는 모든 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최선의 틀로 ‘교육의 공공성’을 설정했지만, 실제 이것은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결과한다는 김진경 선생님의 주장은 다소 과격하지만 사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이들 빙자해서 교장 하고 월급 타먹은 운동’으로.
저는 인간정신이 가장 온전하게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가난’, ‘결핍’ 그리고 ‘힘없음’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의 아이들은 가난했던 시절에 가장 아이다웠고 아름다웠습니다. 아이들은 경제성장 이후로부터 아이다움을 잃었습니다….저는 결국 이 모든 현실을 경제성장의 산물로 여깁니다…경제적인 풍요가 낳은 정신의 타락을 흡수한 것뿐이라 생각합니다.
교육은 그저 땀이자 숨결이고 사랑일 뿐, 그 정신의 가난함 외의 어떤 완숙한 물적 조건도 부차적이며, 오히려 해악이라고 믿기 떄문입니다.
#모난돌의 외로움_교육희망, 1008년 3월8일
차리리 굴복하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싶었는데….어느 순간 문득 ‘저 녀석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을 닮지 말아야 할 이유_교육희망, 2008년 10월 27일
미국은 가망 없는 나라? ‘돈놀이(금융업)’ ,’전쟁놀음(군산복합체)’, 광신적인 소비 문화 등 제국의 말기적 증상.
이라크 침공 지지하는 대부분의 미국인들. 미국의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은 미국인들의 이러한 정신적 몽매의 가장 큰 책임이 바로 교육에 있다고 지적. 오직 ‘이상적이고 객관적인 지식’만 가르침으로써 이 문제가 ‘아무 문제 없음’을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학교에서 ‘이상’ 아닌 ‘현실’은 충분히 가르치고 있는가? 객관적 지식으로 채색된 ‘이상’ 말고 바로 지금의 ‘현실’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흘러가든 그 끝은 미국처럼 한심할 따름일다…어려울수록 근본을 살펴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사회적 책무를 모르지 않는다. 다만 용기가 없을 따름이다.
#가치의 허무주의, 아이들의 애국주의_
아라크 파병과 같은 굵직한 사안 앞에서 ‘국익’이라는 도깨비 같은 말로 포장되는 이 전체주의적 성향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 것 같다.
앙상한 졸가리로 일관하는 글들…구체적인 삶의 세계가 없었다…그들에게 사물과의 진정한 교섭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경험’의 세계를. 국가주의, 남성주의, 애국주의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기를 원하는 지성이 있다면, 그 노력은 단연코 이데올로기 차원의 투쟁이 아니라, 아이들을 자연으로, 경험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몸부림이다.
#전교조를 위한 변명
정권은 시도 때도 없이 반교육적인 정책들로 불을 질렀고, 전교조는 그 꽁무니를쫓아다니면서 불을 꺼야 했다.
#그저, 양심 한 자락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잃어버린 것을 잊어버리면, 결국 되찾아야 할 것이 사라져 버린다”
#다시 생각하는 전태일
미디어는 우리가 세상의 온전한 모습을 파악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시스템은 우리에게 ‘개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앗아간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집중력은 미디어가 흐트러뜨리고 시스템이 억압한다. 우리 시대에 ‘개인’은 다만 미디어가 전해준 어지러운 정보를 머릿속에 잔뜩 쑤셔넣고 시스템이 지시하는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왜소한 존재에 불과하다.
#전쟁, 일상, 세상의 슬픔
이라크. “슬픔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슬픔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인가의 문제이다…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이 슬픔의 지속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나는 고속도로로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이 바그다드를 향해 폭격을 하는 전투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 권정생, 『녹색평론』
파병을 멈추려면 승용차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달아나야 한다. 30평짜리 아파트에서 달아나 이전에 우리가 버려두고 떠나왔던 시골로 다시 돌아가서 15평짜리 작은 집을 짓고 살아야 한다. 가까운 데는 걸어다니고 먼 곳은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살아야 한다…지금 내가 타고 가는 승용차 기름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고 느낀다면 평화의 길은 멀지 않을 것이다.-권정생, 『작은책』
#’아픔’ 없는 사회의 언론
누군가를 만나고 싶도, 무언가 가슴 느꺼운 세상의 소식을 기다린다. 희망의 어떤 조짐이라도 만나기 위해 나는 인터넷을 끄지 못한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이 밤의 유랑…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간다.
자극의 중독, ‘인공 스튜디오’ 같은 세계. 인터넷 쇼핑, 온라인 고스톱, 텔레비전 드라마, 스포츠 중계, 이 현대적인 미디어의 막대한 자장권 바깥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퍽 드물다…그 속의 현대인들은 이 보육기관이 일러주는 방식을 충실히 복기하는 정신의 고아들이 아닌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이게 ‘뉴스 편집’이다. 이 얼마만한 ‘퇴폐’인가. 이제 인간의 ‘앎’은 경험이 아닌 ‘접속’이다. 세계의 숨은 터럭 하나까지 다 드러내는 미디어, 그러나 오직 ‘자극으로 편집된 세계’에 우리는 다만 ‘접속’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상을 뭔가 ‘알고 있다’는 착각들을 하며 산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배제하고 침묵하는 오늘날의 언론은 아무런 지혜도 좌절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끝없이, ‘제도’라는 기계의 거죽만을 훓어내릴 뿐이다…이 폭발적인 논평의 나라에서 정작 농민들의 시위, 그 의미심장하고도 가슴 아픈 현장에는 나이 드신 어르신들만이 가득한, 언어는 넘쳐나되 행동은 날로 가늘어지는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세상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언론은 이 어둠을 가장 어둡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평택 대추리에서
“보상금에는 관심 없다, 제발 이 자리에서 농사짓다가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씀이 정말 보상금 더 타내려는 수작으로밖에 들리지 않는가? 만약 윤광웅 잔관, 당신이 수십 년 살던 집이 철거계고장을 받았다 치자. 윤 장관 당신은 보상금 더 타내기 위해 610일 동안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나와서 입으로는 “땅과 고향을 지키자”고 외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충분히 ‘백만장자가 될 자격’이 있다.
어서 빨리 미국으로부터 빠져나와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자. 이 세상은 크고 작은 대추리로, 새만금으로, 천성산으로 가득 차 있다.
#망각, 자기도취, 미래에 대한 폭력_’도룡뇽 소송’ 대법원 결정문에 대한 비판
대한민국은 욕망의 과잉, 정치의 과잉, 다툼의 과잉, 무어든 과잉으로 넘쳐오른다…불의는 외면하되, 불이익에는 목숨을 거는 것이 꼿꼿한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가치로운 것들은 패배하고, 힘없고 약한 것들은 뿌리뽑히고 죽임당한다.
#김현종과 박래군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천성산도 도룡농도 그 어떤 생명도 인간과 더불어 살아갈 여지는 없습니다. 지율 스님의 단식을 통한 죽음에 이르는 생명의 화두는 이 땅 삶의 깨달음에 대한 좌절과 희망입니다.
#2006년 2월생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동차를 타지 않는 길밖에 없다”
교토의정서 따위보다는 한사람이 자동차를 포기하는 것이 훨씬 가치로운 일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타고 가는 저 자동차의 석유가 이라크 민중의 목숩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지금 태워 없애는 석유가 결국 미래 세대들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것임을 우리는 전연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수능이 끝나면 온 고3 교실에 물결치는 운전면허학원 행렬에 동참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나처럼 자전거를 타고 다닐 것을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밀양 상설시장통에서
지난 수십년 동안 힘없는 사람들은 “경쟁력이 없으니 희생해줘야겠다”는 논리를 강요당해왔다. 한미FTA는 그 최종 완결판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도대체 경쟁이란 게 뭔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만 우리는 가난하지만 정감있는 나날을 살고프다. 제발 ‘지금 이 모습대로’ 살아갈 권리를 다오.
#똑똑이들의 나라_한미FTA와 시민의식의 현주소
한미FTA를 통해 얻을 이익이 있다면 초국적 자본의 것이요, 이로 인해 생길 고통이 있다면 절대 다수 풀뿌리 민중들의 것이라는 인식에 좀처럼 다가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한미FTA에 대한 드높은 지지여론은 한마디로 “난 괜챦을 거야”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좋은 삶의 조건? 그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겠지만, 오늘 누린 평화로운 일상이 내일도 지속되리라는 안정감, 사심 없이 우정을 나누는 좋은 이웃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 이 정도이지 않을까. 그건 국가가 보장해주기 이전에 우선 개인이 마음의 문턱을 넘어서야 하는 것.
#이 땅 마지막 한 사람이었던 분
행복이라는 환상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인간은 불행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눈물이 없다면 이 세상 살아갈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권정생
나는 종종 “권정생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 던지곤 했었다.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참 기독교인. 일생토록 예수의 삶을 생각한 철저한 구도자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선생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민족들의 사연을 아주 소상하게 잘 알고 있었다는 거였다.
#잡담의 제국
‘문제’의 핵심을 바라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용기가 없거나 그럴 필요가 없을 때 우리가 택하는 가장 손쉬운 길은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이를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뭔가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게 만드는 특이한 기제가 발달해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인터넷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고, 대신 방구석에서 인터넷을 하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잡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정신이나마 지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나는 소박한 결론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인터넷을 끄는 것이다…이 세상을 제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끼는 것, 느낀 만큼 행동하고, 행동한 만큼 사색하는 존재가 되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추일서정
도회에 사는 이들은 쉽게 맛보기 어려운 자연의 정취가 이곳 소도시에는 가까이 있다.
“평화란 정의가 살아있는 상태”라고 내 존경하는 선생님은 가르쳐 주셨다.
#이명박 시대를 맞이하는 마음
분노도 저항도 없이 노예의 삶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처럼 양순한 시대는 유사 이래 없었다.
슬픔이 없는 사회의 모습, 그것은 다행증이라 불리우는 정신병적 증상이다. 우리사회는 미쳐 있다…이명박 정부는 역설적으로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고르게 가난한 삶’을 소망해온 이들에게 이 시대변화가 그리 고약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연의 삶, 고통의 의미_권정생 선생의 『한티재 하늘』에 대하여
이들을 하나씩 음미하다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향유하는 문화와 언어생활이 얼마나 황폐한 것인지, 반대로 토착적인 전근대적 삶과 문화는 또한 얼마나 풍요로운 것이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이건 내 나라가 아니야”_비정규직 장기 투쟁 농성장 방문기
#용산, 졸업식_우리교육, 2009년 3월호
잘 가라 아이들아, 가르쳐 준 건 없지만, 당당하게 살자. 힘없는 사람 망루 꼭대기로 몰아넣고 불로 태워 죽이는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자. 당당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