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물레. 김종철.p311
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한 그루의 큰 나무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생명체를 그 품에서 기르고 보살피지만, 사람에게는 어떤 다른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큰 배움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그러한 나무들을 지키고, 섬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자기주장을 위해서, 또는 자기표현이라는 그럴싸한 명분 밑에서 쉴새없이 나무들을 파괴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인간생존의 생물학적,사회적 기초 자체가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옛 습관을 되풀이하면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1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이 생태학적 재난은 결국 인간이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름 밑에서 이룩해온 이른바 문명, 그 중에서고 특히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사회적/인간적/자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진실로 심오한 철학적,종교적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관계, 그리고 근대과학의 근본가정에 깔려있는 폭력성에 대한 뿌리로부터의 철저한 반성없이, 계속하여 더 많은 과학과 더 정교한 기술만을 구한다면 파멸은 불가피할 것이다.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예의 주목하고 그것을 혁파하는 일에 주력해온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사회사상은 그것이 사람에 의한 사람의 지배, 착취를 반대해왔다는 점에서 존경받아 마땅한 사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의 관점에 머무르고 있는 한, 특히 자연세계와의 조화가 중심문제로 된 오늘날 그것은 크게 미흡한 사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로 요약되는 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끔찍스럽기도 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결국 우리들 각자가 자기 개인보다 더 큰 존재를 습관적으로 의식할 수 있게 하는 문화를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문화의 재건은 우리 각자의 인간적인 자기쇄신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이 분명하다.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생활의 창조적 재조직이 가능하려면, 자기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겸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간디의 물레
간디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 큰 폭력은 인간의 근원적인 영혼의 요구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물질적 이득의 끊임없는 확대를 위해 착취와 억압의 구조를 제도화한 서양의 산업문명이었다.
근대 산업문명은 사람들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끊임없이 이기심을 자극하며, 금전과 물건의 노예로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평화와 명상의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결국 간디의 사상은 욕망을 억지로 참아야 하는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욕망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환경위기의 내면구조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우리들 각자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환경파괴는 우려하면서도 그것을 구조적으로 자행하는 생활습관을 조그마한 편의나 이해관계에 매달려서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문제되고 있는 환경위기는 결국 인간 자신의 자기쇄신, 그리고 문화의 뿌리로부터의 혁신 없이는 극복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자유로운 인간만이 남의 자유에 관심을 갖도, 남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법이 아닌가? 이치를 따져 생각해보면, 세상만물이 자기자신과 근원적으로 한 몸뚱이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공동체에 폭력을 가하고 상처를 입히면서도 스스로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인간이 내면적인 자유와 성숙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태적 위기에 맞서는 새로운 논리와 실천
대체로 오늘날 생태계의 현실은 상당히 심각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실감날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그런 정보라든지 보도에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노동운동과 녹색운동의 차이? 결국 자연 만물이 인간의 형제라는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세상이 되려면 대부분 비록 옛날과는 다른 수준일망정 본질적으로 수공업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이지만, 저로서는 골똘한 생각입니다.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종교 냄새까지 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녹색운동과 농업문화
개발과 환경의 조화? 지금까지의 이른바 산업적 생활방식에 어떤 본질적인 변경을 가할 의도가 없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위기는 환경위기이자 동시에 비인간화의 위기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생태적 파손은 대체로 사람들이 내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지 못한 현실과 정확히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텔레비전이나 백화점의 현란하게 전시된 물건 앞에 마음을 빼앗길 리가 없고, 남들보다 앞서고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릴 리가 없다.
#개발 이데올로기의 극복을 위하여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도 없고, 살아남으려면 어차피 다함께,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와 자연계의 온갖 목숩붙이들과 함께라야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순리를 받아들이면 단순한 생존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어떤 인간역사에 있어서보다도 더욱 건강하고 보람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없을 것이다.
#자주적 공생의 논리
#한살림 공동체운동
스스로의 생존의 바탕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것을 ‘진보’라고 여기는 이 어리석음과 무책임의 소용돌이속에서 지배적인 습관과 타성을 거부하고 사람살이의 올바른 방식으로 ‘흙의 문화’의 재생을 위해 누군가가 헌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마을문화를 찾아서
지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다 마음속으로 시골에 집 하나 가지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왜 개인 플레이 하려고 하나, 그 돈 모아가지고 제대로 된 마을 하나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게 아닌가 하고 저는 가끔 이야기를 합니다만,…사람들이 농촌공동체속에서 살고 싶다는 뿌리깊은 소망을 어쩌지는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대개는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소극적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만 어쩄든 우리가 기본적으로 마을사람이라는 점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폭력의 근원은 내면적 평화와 자유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업사회는 폭력의 악순환이죠. 내면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니까 자꾸만 파괴적인 수단을 강구하면서 나아가고 또 그런 수단을 강구하니까 원천적으로 보살핌의 문화는 자꾸 망가지게 되는 거죠. 악순환이 심화되는 겁니다.
만물의 근원적 평등성을 마음 밑바닥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진정한 비폭력주의 문화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작은 조직이든 큰 조직이든 일하는 방식에 무엇인가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 같아요. 제일 문제는 이런 조직들이 거의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있고, 상호연대나 상부상조의 틀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지금 상투적인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는 유인물들을 너무나 많이 만들어내고 있어요. 지금은 컴퓨터 덕분에 소책자 한권 발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보살핌의 경제’를 위하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는 IMF 구제금융 안 받겠다고, 가난하게 살겠다 하고 선언했다지요. 그 선언 때문에 미국신문들이 시끌벅적합니다. 사실은 미국이나 IMF나 국제자본기구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바로 그러한 태도입니다. 자기들 책략에 말려들지 않는 태도란 말예요.
#지역통화-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
#광우병과 폭력의 논리
그러나 광우병을 대하는 ‘문명사회’의 반응을 보면, 아직도 요원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이번 일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기자신들의 안전문제에 국한되었다. 무고하게 ‘박멸될’ 소들의 운명은 티끌만한 주의도 끌지 못하였다.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
자동차 거부하는 괴짜 교수 조셉 멀로운?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몇해 동안의 자동차 운전경험을 통하여, 자동차가 사람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만들어놓는다는 것을 늘 실감하였고, 그래서 마침내 자동차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자동차의 근본문제는 그것이 인간생존의 근원적인 조건을 무시하고, 오직 인간의 왜곡된 욕망을 일방적으로 추구하는 기술-그런 의미에서 대표적인 폭력의 기술이라는 점에 있다. 오늘날 산업주의 체제를 떠받치는 주요 기술체제로서 우리는 원자력발전, 텔레비전, 컴퓨터 등등을 들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관건적인 것은 자동차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관련 산업? 제철, 석유, 유리를 포함한 자동차 생산과 판매에 직접 연관된 업종뿐만 아니라, 주유소,경찰, 병원, 보험회사, 은행, 법원을 비롯하여 실제로 방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용과 돈이 걸려있는 문제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갖기 어렵다.
#컴퓨터기술-구원인가 저주인가
흙장난을 해보지 않은 아이가 자연에 대해 어떤 근원적인 이해를 가지고 자랄 것인가? 텔레비전과 컴퓨터 앞에 매달려 아동기 대부분을 ‘가상현실’의 체험으로 보낸 아이들이 과연 다른 사람, 다른 생명의 슬픔과 기쁨을 이해하고, 보살피고 돌보는 능력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걸어다니기-공경의 문화를 위하여
영국 남부의 하틀랜드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녹색운동의 한 메카가 되어있다…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들이 사티쉬 쿠마르라는 장년의 한 인도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 아침마다 암소 라다와 만나는 일은 내게는 하나의 명상체험이다…우리는 나날의 생활활동 그 자체에 전적으로 깨어있는 의식으로 완전히 몰두함으로써 생활활동 그것을 명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내게는 젖짜는 일이 바로 그러한 명상이 된다.
‘완전히 긴장이 풀어진, 시간을 초월한 황홀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며, 일이란 고단한 것이기는커녕 끊임없는 즐거움의 원천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세계를 걸어서 일주하는 평화를 위한 순례, 스승 비노바 바베의 ‘비폭력의 무기’ 선물? 1)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푼의 돈도 지니지 말고 여행하라 2)어디에서난 채식주의를 실천하라
생명에 대한 이러한 존경심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극히 검소하게, 가난하게 꾸려가려는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걸어다니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생명의 공동체에 종속시킴으로써, 진정한 내면적 행복과 자유에 근접하고자 하는 시도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상인의 논리를 넘어서
지금은 개발독재시대의 이데올로기보다도 훨씬 더 교묘하고 치명적인 논리, 즉 ‘세계화’ 논리의 압도적인 위세속에서 우리는 노골적인 소득의 경쟁에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오늘날 갈수록 겁잡을 수 없이 심화되어가는 환겨위기는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는 오래된 생존방식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생태적 위기라는 위협 앞에서 문명사회가 아직 아무런 실질적인 변화의 노력을 보여주디 않고 있다고 할 때, 이러한 무감각 또는 무책임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심리적인 데 있는지도 모른다…문명의 최신형태인 산업체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 에너지가 오늘의 사람들에게는 고갈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중세 독일의 영성적 스승의 한사람이었던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인간이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는 상인의식이라고 하였다. 상인의 마음은 손익관념과 주고받음에 철저하다…”베풀되 베푼다는 생각을 갖지 말라”..
남을 도와준다는 생강이 남아있는 한 우리의 행동은 거짓된 것이고, 우리 자긴이 자유롭게 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라고 하는 이러한 불가에서의 오래된 가르침의 배후에는 세상만물은 형제이며, 한 몸뚱이라는 것, 따라서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다만 자기가 자기를 돕는 일만 있을 뿐이라는 통찰이 들어있는 것이다.
“나는 남을 위해서 산 적은 없고, 철저히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았다”-간디
우리는 간디에게서 보는 이러한 확대된 자아개념을 ‘생태적 자아’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저기 서있는 나무와 풀과 곤충들은 모두 나 자신의 일부라는 깨달음이야말로 대립과 분열과 갈등의 구조화에 토대를 둠으로써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끊없이 정복하고 침탈해온 문명, 특히 산업문명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
아무 상처가 없는 잎사귀는 하나도 없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낯선 경험을 앞두고 느끼는 두려움일 뿐이며, 실제로 그것은 근거없는 두려움이다-큐블러 로스
권력과 재화와 명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의 궁극적인 근원은 따져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죽음을 용기있게 대면할 수 없는 결과로서 우리가 끊임없이 쌓아가는 탐진치 삼독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수록 더욱더 죽음은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회피하고 싶은 공포의 재앙으로 다가올 뿐인 것이다.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
노자의 세 가지 보배? 자애로우면 능히 용감해질 수 있고, 검소하면 능히 넉넉해질 수 있고, 남 앞에 서지 않으면 남들을 거느릴 수 있게 된다
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처세술이 아니라 비폭력적 삶의 원리인 것이다
#히말리야의 나무
인도민중의 상황개선을 위한 문맹퇴치? 아시스 난디는 인도의 대다수 민중이 문자를 이해하게 되면 당연히 신문과 책을 읽으려고 할 것이면, 그리되면 히말리야에는 단 한 그루의 나무도살아남지 못하는 날이 곧 올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난들과 함께 퇴폐문명의 말기적 징후라고 해야 할 쉴새없는 ‘잡담’속에서 우리의 주의력은 끊임없이 분산되고 지리멸렬해지고 있다. 삶의 슨본이 허물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단기적/일시적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헤어날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에콜로지의 문제는 다수 지식인들의 주된 관심사에서 거의 비켜나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관찰일 것이다
자발적 가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가난’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느 수준까지는 받아들여야 할 덕목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과라니의 아이들
부족 전체의 집단자살? 숲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토착적인 삶의 상실을 뜻하는 것, 희망없는 미래를 보면서 아이들은 극도의 낙담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가장 큰 목재 및 펄프 수입국으로서 한국의 산업체제는 열대우림의 파괴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형편이다. 또 어느새 쇠고기 소비가 엄청나게 불어난 우리의 식사습관은 아마존을 비롯한 열대의 숲을 벗겨내고 거기에 대규모 목장을 만들어 돈을 벌려고 하는 반생태적/반인간적 자본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경쟁의 논리를 넘어서
이 세상에서 합법화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진리를 위한 경쟁이다. 물질적 권력의 확대를 위한 모든 경쟁은 인간과 자연과 세계의 황폐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할 뿐이다.
#자유학원
군국주의? 대부분 학교 건물이 교도소 건물과 구조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참다운 교육이란 지식과 정보의 일방적인 전달을 위한 강제적 과정이 아니라 인격상호간의 자유로운 교류이다.
교육에 필수적인 것은 철저한 상호존중과 신뢰에 기초한 자유와 관용의 분위기이다. 이 세상 만가지 악의 근본인 권위주의가 끼어들면 생명의 자연스러운 성장은 꺽이고, 억압과 눈치와 파괴적인 심성이 조장되기 마련인 것이다.
교과서가 없다? 교과서는 평균 이하의 교사를 위해 필요한 것이지 창조적인 교사들에게는 오히려 방해물일 뿐이다!
#어머니의 이기심
“원칙적으로 찬성하고, 남의 아이들 얘기라며 인정할 수 있어도 입시경재사회에서 뒤처질까봐 내 아이의 경우라면 걱정할 수밖에 없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무한하듯이, 어머니의 이기심도 무한한 것인지 모른다. 한 사람의 여성이 아닌, 한 어머니에게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을 포기할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노릇은 없을지 모른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사회가 아무리 부패해 있어도 자기 아이들은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교육을 받기를 원한다”라고 괴테는 말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학]을 쓴 위대한 심리학자 빌헤름 라이히에 의하며, 이 세상 모든 악의 근원에 어머니가 있다. ‘내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파시즘을 허용하고, 끝내는 아우슈비츠를 만들어내는 데 협력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다 하더라도 이 세상 어머니의 이기심만은 영원할 것인가?
#”인간에 대한 모욕”
“이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다. 이런 경우 보편적 규정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며 특별대우는 안된다”
따지고 보면 특혜라는 것은 차별대우의 또다른 형태일 뿐이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면서 보통 우리가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고 있는 일인가?
#밥과 하늘과 사회참여
공양? 생명의 상호의존적인 본원적인 존재방식을 일상생활속에 끊임없이 기억하고 하는 노력의 표현인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비극은 모든 존재가 타자에 대하여 필수적인 존재라는 것, 상호간의 의존과 희생 없이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 거의 철저히 죽어버린 문화속에서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밥이 얼마나 큰 사랑과 희생의 선물인지를 기억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병든 문명을 인류진화의 높은 성과인 양 착각하고 있는 어리석음속에 매몰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밥은 슈퍼마켓에서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품의 하나이며 너무나 쉽게 먹어치우고 너무나 쉽게 버리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생명의 근본질서에 대한 겸허한 귀기울임과 응답이 아니다. 모든 것을 인간 자신의 재간과 의지로써 조작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엄청난 교만과 공격적인 자기주장이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과학과 기술의 진보와 합리성의 증대라는 명분 밑에서 자행되고 있을 뿐이다.
#고무신 두 켤레
#사라지는 제비,어리석은 권력욕망
우리가 기껏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식들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오염되지나 않았을까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이른바 무농약, 무공해 농산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고작인 것이다.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거나 등이 휘어진 고기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런 것이 조만간 우리 자신의 운명을 예고해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근심 때문이지 물고기 그것의 생명의 훼손을 진정으로 마음 아프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너나 없이 우리가 너무나 조그만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것이 모든 비극의 원인인 듯하다.
#생태적 건강회복이 선결문제
스쿠알레, 건강식품? 우리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우리의 사회 및 생명공동체 전체가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
갈수록 절망과 소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잡지를 시작하였고, 아직 여기에 붙들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간디의 물레 | 비폭력 생명 문화 에세이”에 대한 3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