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선집2.김종철
#공생두레농-농업위기와 그 대안_천규석
과거의 보릿고개 같은 상대적 결핍과는 전혀 달리 수입개방에 따른 결핍적 과잉이란 점에서 일찍이 경험한 바 없는 위기로 파악된다(풍요 속 빈곤)
농업정책의 부재
시장의 확대란 자원(생명)파괴의 확대의 다른 말이다
신농정의 엘리트주의? 못 배운 무식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배웠다는 무식이야 구제불능으로, 이 세상 망치는 화근의 불씨다!
#한에서 희망으로_정경식
무농약 농사의 출발? 매고 또 매어도 끊임없이 돋아나는 풀매기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잡초는 없다)
“오늘의 농법은 땅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는 죽임의 농법이니 생명농법으로 전환시키자면 그 정도의 통증이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머니들이 견디기 어려운 진통을 겪은 후 비로소 한 생명을 잉태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지금 당신들의 그 통증은 새로운 생명농업을 잉태하기 위한 축복받은 진통인 것이오. 그러니 모든 걸 자연에 맡기시오. 자연은 자연의 순환법칙을 통해 그대의 그 통증을 치유해줄 것이오.”
붉은 노을 아래 펼쳐진 나락은 유난히도 불게 보였다….생명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나서 농약을 쳐야 되겠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겠다는 것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를 입고서도 자연치유가 되기를 기다리는 자세와 같다. 흐르는 피가 저절로 멎어 아물 때까지 상처의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듯이, 무농약 농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외적 조건과는 물론 자기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벼농사에 뿌리박은 삶-일본의 생활자치운동_후루사와 코유
인간적 규모의 비집중화된 경제
오늘날 일본에서 쌀에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 삶의 거의 모든 면이 경제적 합리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국제적인 곡물가격의 불안정
협동조합 ‘생활클럽’-정치는 나날의 생활에서 시작된다! “부엌으로부터의 정치개혁”
신뢰에 기초한 협동조합, 농민과 소비자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을 크게 중요시한다!!!
‘젊은 잎사귀들’ 협동조합에는 400가구와 11개 농가가 들어 있다.
‘젊은 잎사귀들’ 같은 협동조합에서 소비자들은 여러 면에서 이익을 얻는다. 농작물은 거의 다 익었을 때 수확되고, 통상적인 경로로 분배될 때보다 훨씬 빨리 소비자들에게 도달한다. 이것은 더 맛있을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더 좋은 음식을 제공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철에 나는 것을 먹고 자기 지방에서 자란 음식을 먹으면 보다 큰 영양적 가치를 얻는 것이다!(생산적 소비)
#아미쉬-살아있는 생태공동체_토머스 포스터
산업문화와 반대되는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공동체
농업중심의 생활과 적정기술의 이용에 대한 도덕적 헌신이 있고, 그와 함께 도시적 생활양식과 공장기술에 대한 도덕적 거부가 있다.
생태철학을 구현할 수 있는 ‘검소한 공동체'(자발적 간소함,simple living)
자급자족! 아미쉬들은 여하한 종류의 정부농업보조금이나 복지금도 받기를 거부한다…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보살피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사회보장제도 제외해달라 법원 청원, 수락된 유일한 집단)
적정기술과 화석연료로부터의 해방
에너지 효율적인 노동집약적 농법? 적자에 허덕이는 값비싼 현대기술을 이용한 첨단(?)농법보다 높은 수익성!!
소비지향 교육으로부터의 자유? 아미쉬학교들의 주요 목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외부가치들, 즉 개인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로부터 아동들을 단절시키는 것이다!(상업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잡지광고로부터도 단절되어 있다)
물질중심주의와 소비주의의 끝없는 욕망? 그러나 사람이 자기의 욕구를 제한하도록 교육된다면 만족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들은 아마 의견일치를 보였을 것이다(탐욕의 반대말은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다!)
##가이아의 얼굴
#삶의 도랑에서_장일순
한밤의 풀벌레 소리에 놀랄 때? 이럴 때면 내 일상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삶의 허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그 풀벌레는 나의 거룩한 스승이요,…
#삶의 진실_박경리
물질이 유한이면 그것은 현재이고, 무한은 미래다. 눈앞의 것은 보이지만 먼 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는 확실한 것만이
우리를 구제해준다는 것은 망상이며, 가시적인 것이 결코 전체는 아니다. 가시적인 것, 현재만을 믿고, 보이지 않는 것, 미래를 망각한다면 개인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민족과 인류 모두의 욕망은 일그러질 것이다.
#이박삼일의 남도기행_박완서
나에게 시골이란 말은 고향과 거의 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여행을 한 적은 많지만 시골맛을 본 것하곤 달랐다. 나에게 시골맛이란 완전한 평화와 안식을 의미했다!
근대화? 도시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돈과 편리를 추구하는데, 농촌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없었다!
오염 안된 시골이란 환상? 도시의 간교함과 농촌의 촌스러움을 조잡하게 뒤섞어 놓은 것처럼 어중간한 시골 인심에 접하는 것은 민망하고도 피곤한 일이었다
서울역의 혼잡함? 멀미 중 제일 고약한 사람 멀미!(인도주의니 인류애니 하는 것이 실은 얼마나 믿을 게 못되는가?!)
수없이 정거하는 시외버스와 시골풍경? 감동이라고 해도 좋았고 개안이라고 해도 좋았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여행은 과정을 무시한 목적지 위주의 여행이었다. 그게 얼마나 바보 여행이었던가를 알 것 같았다
자연은 위대한 영혼을 낳기도 하지만 위대한 영혼 또한 자연의 정기가 되어 자연을 빛나게 한다(초의선사의 일지암과 다산이 넘었다는 험준한 봉우리)
#먼저, 마음을 무(無)로 하십시오-환경을 건지는 원점_오시다 시게토
사람이 나라는 ‘자아(ego)’의 입장에서 다른 존재를 보았을 때, 하나하나의 존재는 참된 제 얼굴을 내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욕망이 거기에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나만의 세계를 떠나서 마음이 무가 되었을 때, 한 존재, 한 그루 나무의,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함을 느끼는 것입니다…산소를 내주고 있다는 그것뿐이 아니라, 그 존재 때문에 나도 삶을 허락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이 있을 때 비로소 환경이라는 말을 할 스 있는 것이며, 그것을 소중히 한다는 것이 곧 환경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존재, 흙도 돌맹이도 살아있어요. 하지만 나(에고)라는 입장에서 보면 전부가 물건으로 보이는 거예요. 이것이 현대문명입니다. 무명(無明)의 세계이지요. 이걸 문명이라고 그러고 편리하다고 하고 좋은 것인 줄로 알고…자연이 무엇과고 대신할 수 없는 존재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환상과 야심을 버려야 한다!
1+1=2라는 것은 그런 것 같다는 기분이 들뿐이라는 자각이 없는 한, 수(數)라는 것이 금같이 귀중해집니다…썩어야 할 물건에 썩지 않게 하는 물질을 넣으면 생명의 순환에 해독을 준다는 것쯤은 알 터인데, 머리로 생각하는 놈들은 그것도 몰라요. 천연스럽게 방부제를 넣지요. 자기가 돈을 벌기 위해서.
1+1=2가 진리라는 교육을 하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이 형성돼버리는 것이예요. 그런건 전혀 진실이 아니에요. 그런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입니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란 셀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은 서유럽에서 들어온 환상이지요. 수를 절대화하고 기하학을 절대화하는 것은 서유럽적인 환상입니다.
##교육이냐 폭력이냐
#학교교육의 횡포_존 테일러 개토
[바보 만들기-강제적 학교교육의 감추어진 과정]
학교가 제일 잘 가르치는 것은? 멍청함!
오늘날 멍청한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것이 아니라 진부한 개념을 생각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생긴 피해자이다
타임지, CBS, 뉴욕타임즈에 정통한 멍청한 사람들? 그들의 일은 남들이 한 생각, 얻어들은 의견들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 마음에 드는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무지의 제국에서 남들의 생각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엘리트이다.
대규모의 멍청함은 현대사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멍청한 사람은 심리적 조작을 하기에 아주 좋은 유순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지식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고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집단토의나 집단치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에서만 생겨난다.
새로운 멍청함-수용된 개념에 대한 무사고-은 단순한 무지보다 훨씬더 위험하다.
사고의 통제는 학교교육이 의도적으로 수행하는 일의 일부? 미국 최고위 교육행정가 윌리엄 토레이 해리스의 [교육의 철학]!
“백명 중 아흔아홉명(의 학생)음 조심조심 정해진 길을 따라 걷고 정해진 관습을 따르는 자동인형들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실질적인 교육의 결과인데, 과학적으로 정의하자면 교육은 개인의 평준화이다”라고 해리스는 설명한다.
받아들여진 개념들, 남들이 이미 다 해놓은 생각들의 무게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개인들은 스스로 사물을 평가하려는 노력을 포기해버렸다. 학교에 대중매체들이 기성품으로 됭 생각과 판단을 수없이 제공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스스로 하려고 애쓴단 말인가?
새로운 멍청함은 순응을 강요하는 수많은 요구에 의해 이미 경박스럽게 되어있는 중산층이나 중상류 사람들에게서 특히 심각하다.
쓸모있는 교육? 쓸모있는 지식?(집짓기, 목선 만들기)
우리에게 학교교육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다!
평균적인 스웨덴 사람은 학교교육을 너무 많이 받은 미국인들보다 낫다. 어째서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여러분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학교의 과학과 진짜 과학? 과학교사가 과학자, 즉 자연의 신비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자신의 시간에 이런 관심사를 추구하는 사람인 경우는 거의 없다!
텔레비전이 남의 눈을 통해 본 모습, 남들이 해본 생각, 그리고 불건강한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사람의 사고능력을 파괴해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PNS 공영텔레비전은 예외일 거라고 믿는 가련한 지식인들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다.
진짜 책과 학교 교과서는 다르다? 위장된 교화 도구? 가르치는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의도된 그림 짜맞추기 같은 교과서!
프러시아식 학교교육
지휘요원에게만 생각하는 훈련을
국가적 교육의 목적은 지적 훈련이 아니라 복종과 예속
점수와 보고서가 측정하는 것은 지적 성장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복종? 정교한 교육학. 학교교육이 세속의 종교, 공식적인 국가종교!
학교교육의 중심목표? 집단화
교과서는 군중통제의 수단이다
마취제로서의 텔레비전의 기능 그 자체야말로 좋은 프로그램과 나쁜 프로그램 간의 하찮은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것이다
진정한 책은 교육을 하고 학교 교과서는 훈련을 시킨다
#심성교육과 작은 학교_사티쉬 쿠마르
어머니는 가장 좋은 스승이다
나는 누구도 어머니보다 윗자리에 둘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에서는 어머니가 나에게 무어라도 가르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 견해를 나에게 준 일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대의 아이들은 그대의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갈망하는 생명이다”-칼릴 지브란, [예언자]
아이들에게 사랑은 주어도 되지만 생각은 주어서는 안된다
위험한 생각들을 썯아넣느라 바쁘게 돌아서면서 한 조각의 사랑도 주지 않는 학교교육
나의 어머니의 관점에서는 아이가 텅 빈 물통이 아닙니다. 아이는 하나의 씨앗, 한 개의 도토리입니다.
“어린애가 뭘 알아”
“얘야, 너는 모든 걸 알고 있다. 네 속에, 너의 영혼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어. 도토리처럼”
때로 사람들은 오만하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이크로 칩이나 컴퓨터 디스크나 CD 같은 멋진 것들을 만들어냈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가. 이 하나의 디스크에 몇 메가바이를 저장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조금 겸손해져서 도토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몇 메가바이트의, 얼마나 많은 정보가 거대한 참나무로 자라나서 수백년을 살고 수백만개의 도토리와 나뭇잎과 가지들을 만들어낼 저 조그만 도토리 속에 들어있는 것인가?
꿀벌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꽃과 꿀벌 사이에는 완전한 비폭력적 관계가 이루어져 있습니다…인간은 자원이 끝장이 날 때까지 갑니다.
우리는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꿀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시간을 절약해?”
“시간이 부족하니? 신이 시간을 만들 때 넉넉히 만들었단다. 어리석은 아이야. 무한한 것을 절약하려고 하는구나! 그리고 너는 한도가 있는 것을 소비하려 하고 있어. 전기니, 금속이니, 기계를 만드는 데 쓰는 모든 재료들, 그런 것은 한도가 있는 자원이다. 너는 무한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한도가 있는 자원을 쓰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만둬, 나는 바늘을 쓰는 게 좋아!”
작은 학교-촛불 밝히기
어둠을 저주하고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촛불을 켜는 것이 더 낫습니다.
거대한 학교들 계속 비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음식 만들기는 가장 기본적인 학과목입니다
땅에 뿌리를 내린 교육
기본적인 배움으로서 우리는 음식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트랜드의 작은 학교에서 우리는 마을 전체가 우리의 학교라고 말합니다
#사회정의와 공생의 기술_나린다 싱
조금 도식적으로 말해본다면, 처음에 기술을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인, 즉 인간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기술이 선택되고 나면 기술은 저 나름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극단적으로 환원주의적인 기술적 효율성의 개념이 생존의 조건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그보다 다른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뿐만 아니어 그것은 인간생활의 기초적 필요의 충족이 아니라 인위적인 욕망의 생성과 자극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인 만큼 결코 합리적인 사회가 될 수도 없다.
***진정한 사회진보는 ‘욕망’에 기초한 경제로부터 일차적으로 ‘필요’에 기초한 경제로 옮겨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달려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자동차로부터 자전거로의 비약적 전진이 있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_소기얼 린포체
서구에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의 전체로서 보도록 가르침을 받자 않습니다. 죽음을 따로 떼어 봅니다. 이것은 우리거 삶에 몹시 집착하여, 죽음을 거부하고 부인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서구세계가 죽음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 개인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지구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느끼시지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부정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장기적인 어떠한 안목도,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그리고 어떠한 진정한 자비심도 없는 세계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환경파괴에 대한 우리들의 무책임성에 간접적으로 기여합니다.
간단히 말하여, 깨달음이란 괴로움을 끝내는 것을 뜻합니다.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무지에서 옵니다.
“당신의 과거의 삶을 알고 싶으면 현재의 당신의 행동을 들여다보아라. 당신의 미래를 알고 싶으면 현재 당신의 행동을 들여다보아라.”(인과, 윤회)
#아흔살의 관점_헬렌 니어링과의 대담
우리은 아주 충만한 삶을 살았어요. 우리는 그것은 좋은 삶이라고 불렀지요. 우리에게는 정말 좋은 삶이었어요. 누구에게나 그렇지는 않았을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그랬어요.
우리는 돈보다 자유로운 시간에 관심이 더 많았지요.
[요리에 반대하는 책]
내 생각에는 익히지 않은 채소와 과일들이 더 생명력이 있고 더 건강한 식품이에요. 음식을 익히는 것은 부자연스러워요. 식품은 본래 익어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있는 거예요.
“녹색평론선집2 | 환상과 야심을 버려라”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