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무수상보시. 보살의 경지인 성인은 베풀되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베풀 뿐입니다.
엄마가 갓난하기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무주상보시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아낌없이 다 해주면서도 아무 요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갓난아기하고는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때의 엄마는 성인과 같습니다. 그야말로 보살입니다.
100계율을 지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서로 모르는 낯선 남녀 둘이 외딴 곳에 있 다 하더라도 상대가 절대로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지 않고, 물건 을 빼앗거나 훔치지 않고, 원치 않는 성적 접촉을 하지 않으며, 거짓말이나 욕설을 하지 않고, 술에 취해 이성을 잃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겠지요. 그런 만큼 오계 는 우리 모두의 삶을 평화롭게 하는 기본 원칙입니다.
101 계율을 지킨다는 생각없이 지키는 것이 성인의 수준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에게 지계는 무거운 속박이지만, 인연의 고리를 볼 줄 아는 지헤로운 자에게는 자유로움입니다.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임을 확연히 알고 나면 계율은 더 이상 속박이 아니고 자유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지. 참아야지’ 하고 결심하고 있다면 지금 담배 피우고 싶은 욕구에 이미 사로잡혔음을 알아야 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피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계바라밀입니다.
(꺠달음이 중요하다?) 계율의 가르침을 확연히 깨달으면 지계바라밀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단순히 계를 지키는 것에만 머물러 계율에 속박을 받게 되면 자꾸 계율을 어기게 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키는 것만으로는 비리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106 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이고 하기 싫다는 것은 마음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바탕 위에 있습니다. 노력한다는 말은 하기 싫다 는 마음의 다른 표현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데 이부자리에 누워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는 건 일어나기 싫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일어나려고 노력하지 말고 일어나기 싫다는 마음을 놓아버리면 됩니다. ‘일어나야지’ 하는 식의 공부는 해탈도가 아닙니다. 일어나려는 생각의 밑바닥에 일어나기 싫은 마음이 깔려 있음을 알고 그 싫은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이 해탈의 길입니다.
그러면 그 싫은 마음을 어떻게 하면 놓을 수 있습니까? 그냥 놓으면 됩니다.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 일어나기 싫다’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데에도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싹 일어나면 됩니다. 자명종이 울리는 순간 싹 일어나는 게 공부입니다. 한번 싹 일어나 보면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노력할 것도 없고 애써 닦으려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행하는 바가 그대로 닦음이 되는 경지가 정진바라밀입니다.
108 욕망을 따라가면 쾌락이고 억눌러 참으면 고행입니다. 그 두 가지 모두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참는 것도 아니고 따라가는 것도 아닌 길, 다만 알아 차릴 뿐입니다. 그것을 다만 그것으로 알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억누르고 참는 것은 고행이지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요하려고 애쓸 것 없이 고요함에 이른 사람은 혼자 있으면 호젓해서 좋고, 둘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서 좋습니다. 산에 가면 산이 좋고, 저자에 가면 저자가 좋습니다…그런 경지가 선정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이 바라밀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바탕에 깨달음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치를 온전하게 알고 나면 베풀고 지키고 참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가릴 필요 없이 지금 여기 하루하루의 삶 그대로가 선정이 됩니다. 법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바른 수행이 가능하며, 또한 그런 수행을 통해서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인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있습니다.
159 중생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 무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존재의 참모습이 연기임에도 연기 를 모릅니다. 존재의 참모습이 무상이며 무아인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항상함이 없고, 영원하지 않고, 변해가는 것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항상하여 영원하다고 착각합니다.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단독자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음에도, 완전히 독립된 단독의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 최고의 핵심은 연기이며, 연기는 무상과 무아로 정리됩니다. 제법이 무상이고 무아임을 깨달으면 열반의 경지에 들게 되고, 아견과 상견에 빠지면 괴로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십이처, 십팔계설….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다!라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반야바라밀! 열반의 경지로 가는 길!)
우리의 모든 행위는 자신의 업식으로부터 일어난 욕구에 근거하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추적해 과거로 돌아가 보면 처음은 욕구가 아닙니다. 시작은 무지에서 시작되어 습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삶의 반복된 과정을 무명• 행이라 정리합니다. 모든 것은 무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과거에 무지로 인한 행으로부터 현재의 씨앗인 식이 생겨났고 식에 의해 명색->육입->촉->수가 나타나고, 수에 충동적으로 반응해서 애->취->유의 모든 과정이 진행됩니다. 식부터 유까지의 팔연기는 과거의 원인으로 인한 현재의 결과와 미래의 결과를 낳을 현재의 원인을 짓는 과정을 분석해 놓은 것입니다. 과거에 되풀이되었던 현재의 원인들을 정리한 것이 무명과 행이고, 현재 삶의 원인으로 미래에 나타날 결과로 되풀이되는 것이 생과 노사입니다. 현재를 분석한 팔연기에 과거의 무명•행과 미래의 생• 노사까지를 합하면 모두 십이연기가 됩니다.
265 찰나에 항상 깨어있으면 순간의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불꽃이 일어날 때 알아차려서 불길로 번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기분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이 갈애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하고, 불쾌한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이 혐오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몸의 감각과 마음의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집중력을 최대한 높여서 호흡을 관찰하고, 코 언 저리의 감각을 관찰하고, 몸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감각을 관찰하고, 결국 감각 따라 일어나는 미세한 느낌까지 관찰해야 합니다. 감가과 느낌은 알아차리면 그것이 불길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이것을 관법수행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집중을 통해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항상 깨어있음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담배연기 냄새를 맡고 마음에서 그에 대한 쾌·불쾌의 반응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욕구에 맹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또렷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해요.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참는 것은 이미 솜에 옮겨붙은 불을 끄는 수준입니다. 피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건 마음이 이미 욕망에 끄달려 긴장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고요한 상태에서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다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345 참자유란 무엇일까요?…그 어떤 조건이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자유로운 삶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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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그러나 많은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경험을 쌓는다해도 앎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접하는 정보들 가운데는 잘못된 것들이 수없이 많고, 우리는 그 정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지금 내가 바르게 안다고 확신하는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실은 잘못된 앎입니다. 남편, 아내, 자식, 친구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진 탓에 많은 부분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빠져 남의 얘기를 제대로 듣지 않고, 듣는다 해도 자기 식대로 들어 아는 것은 밝은 앎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깊이 안다고 해도 확연히 깨닫는 것보다 더 밝게 알 수 없는 거예요. 온종일 깜깜한 방 안에 앉아 여기저기를 더듬의 방의 모습을 알아냈다 해도, 불을 탁 켜고 한눈에 보아 아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더듬어 추측하였을 뿐이니 자기 나름대로의 착각으로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반야바라밀다는 그 어떤 앎보다 더 밝은 앎입니다. 그 어떤 신통력도 깨달음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신통력을 가졌더라도 그것으로는 중생의 삶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322 실천을 행함으로써 결국 이루게 되는 궁극이 깨침입니다. 확연히 깨치는 것보다 더 높은 실천은 없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다 보면 문리가 트이는 순간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한 글자씩 배우고 뜻을 새겨 나가지만,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전체의 흐름이 저절로 아는 경지가 옵니다…자전거 탈 때도 그래요. 수도 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지다가, 어느 순간에 균형 잡는 요령을 알고 나면 넘어지지 않고 탈 수 있게 됩니다…연습을 거듭하며 실천하다보면 이처럼 저절로 되는 단계에 이르는데, 이때 비로소 모든 이치가 확연이 한눈에 보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실천의 가장 높은 단계에 꺠달음이 있고, 깨치고 나면 그때까지의 모든 단계를 뛰어넘게 됩니다. 꿈속에서 무슨 일이 있어다 한들 궁극에는 눈을 떠야만 하며, 눈뜨고 나면 꿈속에서 있었던 모든 순간을 넘어섭니다. 깨달음은 최고의 실천 단계이고 최고의 행行이니, 이보다 더 높은 실천은 없습니다.
324 믿음도, 지식도, 실천도 내 스스로 경험하여 증득해야만 궁극적으로 진리임이 증명됩니다. 진리는 내 것으로 얻는 것은 그 어떤 얻음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오로지 깨달음만이 다시는 괴로움에 빠지지 않는 열반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로지 깨달음만이 다시는 괴로움에 빠지지 않는 열반임을 알아야 합니다.
345 참자유란 무엇일까요? 물이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이, 어떤 정형이 없어서 어디를 가도 걸림이 없는 삶을 사는 거예요. 산에 가면 산이 좋고, 바다에 가면 바다가 좋고, 집에 오면 집이 좋고, 돈이 없으면 수행하기 좋고, 돈이 있으면 베풀기 좋고, 지위가 높으면 포교하기 좋고, 지위가 낮으면 인욕하며 하심하기 좋으니, 그 어떤 조건이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자유로운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