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붓다. 법륜 스님.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성차별과 계급 차별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 인도 사회에서 이러한 가르침은 기존의 사회질서와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부처님을 ‘위대한 스승’에서 세상을 뒤흔든 ‘혁명가’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이라는 이전에 지은 책의 제목을 이번에는 부처님이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인 혁명가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혁명가 붓다’라고 바꾸기로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100년 전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왜 괴로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먹을 게 없나? 입을 게 없나? 잠잘 데가 없나? 나무를 때서 밥하는 것도 아니고, 냇가에 가서 빨래하는 것도 아니고, 먼 길을 걸어 다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괴로운가?’
이렇게 의문을 가질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모든 게 다 갖춰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비해 나아졌지만 늘 부족해서 힘들다고 합니다.(여전히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세상 때문?)
싯다르타, 풍요로운 삶 속에서 고뇌하다(생각할 여유가 있어야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82 중도라는 것은 정해진 길이 아닙니다. 중도는 탐구하고 또 탐구해서 가장 적절한 길을 찾아 나가는 것, 치우침이 없는 길입니다. 제가 하는 즉문즉설 강연에서도 정해진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맞게, 그 사람이 지금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붓다의 가르침, 중도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 는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부분적인 해결책이라 하더라도 실제 우리 삶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탐구하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새로운 길, 새로운 관점을 찾은 부처님은 극한의 고행을 했던 전정각산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강 건너 숲이 우거진 곳에 있는 보리수나무 아래 목동이 준 길상초를 깔고 앉아서 정진했습니다. 부처님은 이제 굳게 각오하고, 결심하고, 긴장하면서 정진하지 않았습니다. 편안한 상태로 오롯이 깨어서 정진했습니다.
91 치우침이 없는 중도와 세계의 실상인 연기법, 이 두 가지는 불교만이 갖는 유일한 특징으로 고타마 붓다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설해진 사물을 보는 관점입니다.
(인과응보가 아닌) 인연과보.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물리학 법칙 같은 것.(불연기연)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연기법과 중도, 인연과보의 법칙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계급을 타파했는데도 사회적 관습을 극복하기는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 이런 현실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에는 네 개의 계급이 있다. 그러나 내 법 안에서는 하나다. 마치 세상에는 네 개의 큰 강이 있지만 바다에 가면 하나가 되듯이, 내 법 안에서는 모두 하나다.”
이처럼 부처님은 이미 2600년 전에 계급과 성의 차별을 타파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총칼을 들고 싸워서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혁명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억압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