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의 시대. 이병한.
407-409 추천의 글. 다른 백 년’을 ‘도둑처럼’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_윤여준
지난 100년간 우리는 서구의 근대가 씌워준 안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 이 안경은 고약하게도 사용하는 사람이 사물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보고, 그 밑에 있는 실체는 보지 못하도록 작동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근대자본주의가 식민지 정복과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한 제도이며, 그동안 지고의 선으로 갈망해온 (자유)민주주의 역시 이 근대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시작된 것이며, 따라서 1인 1표로 대표되는 대의민주주의의 출발의 기저에 상업자본주의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이 안경을 쓰고 지난 100여 년을 오로지 앞만 보며 살아온 탓에 우리는 서구가 제시하는 문명화, 근대화, 민주화를 삶의 궁극적 목표로 내면화하였다. 인간 삶의 질과 내용을 결정하는 정치를 좌·우 이념의 안경으로만 판단했다. 사람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양심이나 인성은 사리 판단의 틀에서 밀어냈다.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것이 아닌, 오로지 돈의 원리가 잘살고 못사는 삶의 윤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것,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인가? 정신적 폐허이다.
서구 근대의 역사는 불과 2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지금 우리가 유라시아라고 부르는 지역은 물론 한반도가 속한 동아시아에서, 유기적인 문명과 가치관, 세계관이 생성-발전-쇠퇴의 과정을 거쳐왔고, 다양한 정치·경제·문화적 네트워크와 개별적인 동시에 집합적인 인류 문명을 1600년 이상 형성해왔다는 엄연한 사실은 이 안경 덕분에 우리 인식의 지평에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가 20세기 전반을 군사력으로, 20세기 후반을 경제력으로 승승장구했던 지난 백 년의 ‘예외적 시기’가 저물고 있으며 다시금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문명사 학자들의 중론이다. 역사의 물결은 돌고 돌아, 미국은 아메리가 대륙으로 돌아가고, 해가 뜨는 나라 일본도 세계에서도, 동아시아에서도 ‘주변 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정상(new normal)의 세기가 오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세계가 식민지 건설과 노예무역을 불러온 대항해 시대 이전으로, 동아시아가 아편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마치 선승이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듯 일러주고 있다. 가리키는 손의 손가락 대신 달을 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국가건 사람이건 모든 사물에는 본래 그 분수에 맞는 자리가 있는 법이다. 그래야 세상이 편해지는 법이다. 이제 사물을 그 분수에 맞는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책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21세기를 맞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기는커녕 20세기 근대가 심어놓은 분열과 갈들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직도 남이 만들어 씌워준 안경을 쓰고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남이 씌워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단순한 ‘전환’이 아닌 ‘반전’의 시기라도 하는 이 대전환기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뼈를 깍는 아픔과 껍질을 벗기는 고통을 감수하며 처절할 정도로 지난 백 년의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앞으로 올 백 년을 지난 백 년과는 ‘다른 백 년’으로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지금까지 사용해온 안경을 벗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71년 전의 해방이 마치 ‘도둑처럼’ 왔듯이 앞으로의 백 년을 또사지 ‘도둑처럼’ 맞이한다면, 이 앞으로의 백 년을 지난 백 년과 다르기는커녕 더 괴로운 백 년이 될 것이다. 이 시기에, 이 땅에서 우리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이 책을 읽는 것이 좋은 출발이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