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라시아 견문. 이병한.382-383
약관 28세의 현장이 죽음을 불사하고 천축으로 향한 이유는 크게 셋이다. 첫째는 성지 순례. 둘째는 유학. 당시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중구난방이었다. 정확하고 엄밀한 번역이 부재했다. 마땅한 스승 또한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본고장에서 불학의 정초를 닦고자 했다. 무엇보다 그가 고뇌했던 철학적 난제는 ‘인간의 성불 가능성’이었다. 과연 모두가 해탈에 이를 수 있는가? 만인이 붙타가 될 수 있는가? 현장의 평생 화두였다. 유학생이었지만 불심에 대한 향학열은 발군이었다. 산스크리트어를 익혀서 원전을 독파하고 암송했다. 그를 유난히 아꼈던 고승들이 나란타에 머물러 학맥을 이어주기를 청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현장은 귀국을 선택했다. 애당초 돌아오기 위한 출타였다. 천축행의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중생의 구제였기 때문이다.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하여 순례를 단행했던 것이다. 즉 소승보다 대승이었다. 홀로 아라한에 이르는 것으로는 족할 수가 없었다. 속세로 나아가 보살행을 실천해야 했다. 구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땅을 정토로 전환시키는 변혁에 있었다. 그래서 달달 외운 불교 원전을 잔뜩 짊어지고 돌아온 것이다. 훗날 무거운 책 지게를 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상징이 되었다. 별명도 ‘경전 상자’, 당대의 ‘걸어다니는 사전’이었다.
귀국 후에도 방심할 틈이 없었다. 여생을 경전 번역에 헌신했다. 밤낮을 불문하고 촌음을 다투어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한문으로 옮겼다. 그 전에는 한문에 능숙하지 못한 서역인들이 주로 번역을 했다. 그래서 번역투가 심하고, 뜻 또한 명료하지 않았다. 현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제대로 된 한역 불경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의 초인적인 집념으로부터 불교는 동아시아 정신세계의 거대한 지반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