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대전2. 도올김용옥

149 표영삼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모두 “동학한다”고 했지, “동학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동학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행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론적 탐구가 아니라 실천의 행위였다. 처음에 입도하는 자에게도 “동학하자!”고만 얘기했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믿지 못할 것이 많은 대상”을 믿는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믿지 못할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입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이적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예수가 메시아(구세주)라는 것, 예수가 죽었다 부활하여 다시 재림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불합리한 믿음의 선택이 없으면 입교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기독교는 “믿는다”는 말을 쓴다.
그런데 동학의 경우 믿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동학의 모든 신비는 우리의 상식적 판단을 벗어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수운은 초인간적 능력의 소유자도 아니다. 단지 건강한 도덕적 메시지만 말했을 뿐이다. 따라서 동학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행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불연기연不然其然. 불연不然은 기연其然이다!

194 한번 생각해보자! 다산은 과연 그 방대한 『 여유당전서』 속에 진정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았을까? 그가 살고있는 시대적 담론의 상궤에 따라 많은 땀방울을 떨구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한우충동하는 언어쓰레기 속에서 소리없이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수운의 『동경대 전』은 『여유당전서』 는 차원이 다르다. 양자의 가치를 동일한 천칭 위에 올려놓을 수는 없겠으나, 나는 수운의 원고 1장이 다산의 원고 1만 장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운은 문학(학문)의 과시가 없다. 그러나 수운은 오리지날하다.
196 나에게는 나의 엄마, 나의 아버지가 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났다. 이것은 “기연”이다. 이것은 “그러하다”이다. 그런데 인류의 태초의 조상은 과연 누가 낳았는가? 태초의 조상이 딱 한 명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한 명이 진실로 태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태초이기 때문에 누구에 의하여 만들어질 수가 없다. 여기에 우리의 “그러하다其然”라는 인과적 설명이 단절된다. 그 단절 이상의 세계는 “그러하지 아니하다不然”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불연” 은 초험적 사태, 감성을 넘어서는 초감각적 사태, 비인과적인 사태, 비논리적인 사태, 비이성적인 사태를 의미한다.
사실, 우리 동양사상에 이러한 초월과 내재, 본체와 현상, 초이성과 이성, 비논리와 논리라는 문제는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러셀의 말대로 모든 것 의 오리진Origin을 추구하는 사유,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는 최초의 기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유 그 자체가 매우 비과학적인 사유에 속하는 것이다. 동방인 들은 존재의 신빙성을 따지기 위하여 존재의 최초의 오리진을 규명할 하등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존재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최초로부터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복합적 관계이다.

최초를 규명하는 사유는 기실 중동사막문명의 종교적 사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오리진을 규명해야만 그 궁극에서 항상 단절적인 초월자, 즉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연의 갶이 있기 때문에 만물의 창조주이며 주재자인 하나님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란 본시 변화를 감지하는 우리의 인식의 문제이지, 그것 자체로 움직이는 실체적인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실체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 움직임을 형상화하여 생각한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때는 대강 시간은 횡적으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존재의 오리진이나 역사를 생각할 때는 흔히 수직적으로 된다.
그런데 이런 수직적인 시간관에 있어서 우리는 항상 기연으로 설명되지 않는 단절을 만나게 된다.


불연을 시간의 수직구조 속에서만 생각하는 서학의 논리는 초월자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기 위한 엉터리 논리포석이라고 수운은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207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불연지일 뿐이고, 우리가 일상경험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들 을 기연이라 하는 것이다. 사물의 이치를 머나먼 형이상학적 세계에 비정하여 규명하려고 하면, 모든 것이 불연이고 또 불연이고 또 불연의 사태가 되고 만다. 그리고 또 한편 그것을 사물이 생성되어가 는 조화의 세계에 의탁하여 생각하면 모든 것은 그러하고 그러하고 또 그러한 이치일 뿐이다!

203 처음에 멋도 모르고 그 정확한 개념규정이 없이 「불연기연」을 대했을 때와는 달리, 수운의 논리가 매우 명쾌하고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지금 수운이 제기하는 문제는 근원적으로 동아시아철학체계 내에서는 제기되지 않는, 제기될 필요조차 없었던 문제였다. 천황이 어떻게 사람이 되었고, 어떻게 군주가 되었는가? 그런 것은 신화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써, 근원적으로 이성적 탐색의 논리적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232 현재 대한민국에 ”오도(吾道)“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20세기를 통해 어느 철학과 교수가 오도를 말할 수 있으며 또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그렇다고 성철인들 오도를 말할 수 있는가?…모든 철학과 교수들도 남의 철학을 누가 더 잘 아는가를 경쟁하는 선수들일 뿐이다. 수운은 다르다. 오직 자기 생각을 말했고, 자기 생각을 키웠을 뿐이다. 강수를 만났을 때에는 이미 수운은 성숙한 ”오도“를 지닌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