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강의. 남회근. 658쪽

종교를 초월한 대지혜
『금강경』은 불경 중에서도 아주 특수한 경전입니다. 『금강경』의 제일 위대한 점은 그것이 일체의 종교성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일체의 종교성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금강경』을 연구할 때도 그것을 불교의 테두리 속에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금강경』은 말합니다. “일체의 성현은 모두 무위로써 법을 삼으나 차별이 있다”고요. 이 말은 대략 이런 뜻입니다. 고금의 모든 성현이나 종교적 성취를 이룬 교주는 모두 도를 얻었지만, 각자의 깊이에 따라 그리고 시대나 지역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그것을 전하는 방식도 변했다는 것입니다.
21 경계반야. 진정으로 도를 깨달은 사람은 지혜가 무궁무진하게 계발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사지(無師智) 또는 자연지라 합니다. 자기 본래의 지혜 창고가 여려 다른 사람에게 배운 적이 없는 자기 고유의 지혜가 폭발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계반야입니다.
문자반야. 우리는 모두 글을 알고 책을 읽지만 진정한 문인이 되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문자반야가 없어 아름다운 구절들을 쏟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했다 하면 문장이 되며, 그것이 또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문학의 경계를 갖고 있고, 또 문자반야가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이 왜 그토록 사랑을 받아 왔을까요? 구마라습의 문자반야 때문입니다. 그가 구사하는 격조 있는 언어는 중국 문학사에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불교 문학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정초시켰습니다.
56 구마라습의 번역은 간결하지만 참으로 오묘합니다.
58 당신네 종료를 널리 펼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문학성이 있어야 한다고요. 문학적 경계가 훌륭하지 못한 경전은 잘 읽히지 않는 법입니다. 불경의 번역은 문학적 경계가 아주 높습니다.
부처는 이미 도를 이루었기 때문에 여래라 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처 자신의 해석이 있습니다. 즉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기에 여래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 도 않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정지해 있지도 않으며,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고, 높지도 낮지도 않아, 일체가 평등하고 영원히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 로 여래입니다. 좀 더 쉽게 풀어 보면, 여래란 영원히 당신 앞에 있어 일념으로 믿기만 하면 바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세에 다음과 같은 시가 지어졌습니다. 묘사가 아주 뛰어난 시입니다.
부처는 마음에 있으니 어지럽게 구하지 마라
영산은 단지 그대의 마음속에 있을 뿐
사람에겐 누구나 영산탑이 있으니 (인내천,시천주!)
그저 영산탑을 향해 수행할 따름이다
63 “내 뜻도 알지 못하면서 부처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아무렇게나 자기 생각대로 번역하고 주해할 겁니까?”
선호념. 유가든 불가든 도가든, 그 밖의 어떤 종교든 수양 방법은 모두 “선호념” 이 세 글자입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잘 살피는 것입니다.
64 바로 “선호염”입니다. 우리 이 몸과 마음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몸을 ‘염’하면 그것이 무상함을 알고, 마음을 염’하면 우리 생각은 생멸하는 것으로 거기에 의존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 사라집니다. 시시각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이 생각이 바로 우리 마음이라 여긴다면 이것은 착각입니다.
무엇을 ‘염’이라 할까요? 호흡 한 번 하는 사이를 ‘일념(一念)’니라 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일념에는 팔만 사천의 번뇌가 있다고 합니다.
머무는 바가 없는 것이 머무름! 선종의 표현을 빌리면, “머무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이요, 머물지 않은 것이 머무는 것”입니다. 또는 “머무름이 없는 것이 머무름”입니다. 수양이 이 경계에 이르면 이것이 바로 여래로서, 마음이 거울처럼 맑고 깨끗합니다. 주관도 없고 선입견도 없어서 사물이 오면 응합니다. 어떤 일이 있으면 이 거울이 바로 반응합니다. 희로애락이 있으면 희로애락에 젖지만, 지나가면 일체 남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지나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고의 명구입니다. 불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 이치를 이해한 것입니다. “사람은 가을 기러기같이 신의 있게 오지만”, 소동과는 이따금 시골로 내려가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지난해 한 곳에 들러 내년에도 다시 찾겠다고 약속했는데 과연 올해도 나타났습니다. 일이란 봄날 꿈처럼 아무 흔적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일이 봄날의 꿈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봄이 되면 사람이 잠이 많아집니다. 잠이 많으면 꿈도 많으나, 꿈에서 깨고 나면 그 꿈은 머물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인생은 원래 한바탕의 꿈입니다. 모든 일은 한 번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강물이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노인들이 언제나 옛날 생각만 하는 것도 단지 번뇌를 자초하는 것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봄날의 꿈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모든 일이 봄날의 꿈처럼 흔적 없는 것임을 체득한다면 다시 『금강경』을 연구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머물고, 그렇게 마음을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번뇌란 본래 공(또)입니다. 모든 희로애락과 번뇌는 바로 여기에 자리를 잡는 그 순간에 모두 없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95 청복의 시기에 도달한 많은 노인들이 정말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적막을 두려워합니다. 아무 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항시 젊은이들한테 당부하곤 합니다. 먼저 적막함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가히 인생을 이해할 수 있고, 또 인생의 더 높은 경계를 체험할 수 있다고요.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홍복이 번거로운 것임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불경에서는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먼저 세간의 홍복을 싫어해서 그것을 벗어나고 싶어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곧 불법을 공부하는 길이라는 겁니다.
최상승의 백지 경전. “저들 중생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문자 없는 경전을 이해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자네가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경전으로 바꿔 주게나. 진정한 경전을 한 글자도 필요치 않습니다. 본래 공(空)일 뿐입니다. 바로 그렇게 머무르고 그렇게 마음을 항복시키라는 것이 최상승의 백지 경전입니다.
121 머무는 바가 없다. 부처는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진정한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보살은 법에 대해 머무는 바가 없다(응무소주). 바로 이 한마디라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한다”
다가오면 응하고, 지나가면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행하고 나면. 잊어버려 마음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좋은 일도 남아 있지 않으니 나쁜 일이야 당연히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여! 카르페 디 엠)
146 진정한 불법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를 반대합니다. 그런데도 왜 그려 놓은 부처나 새겨 놓은 보살의 상에 절을 할까요? 그것은 부처나 보살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공경심을 끌어내기 위함입니다. 절을 하는 것은 그림이나 조각에 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최고의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구합니다. 일념으로 공경심을 다했다면, 그림이 진짜 부처니 아니니 말할 필요 없습니다. 나무토막을 보고 절을 했든 흙덩어리를 보고 절을 했든 오직 일념으로 성심서의를 다했다면 성공한 겁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그것은 “나로 인해 그대들이 공경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즉 부처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디일까요? 자신의 마음, 즉 자신의 성(誠)과 경(敬)입니다.(향아설위!)
207 소위 불법이란 불법이 아니다! …무상 중에 존재합니다. 진정으로 큰 성취를 얻은 사람은 지극히 겸손하고 온화합니다. 그리고 대단히 평범하여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부처는 자신을 부처라 생각하지 않으며, 진정한 성인은 자신을 성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207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특징입니다. 소위 <대반야경>은 지혜가 극에 이르러 한 점의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말하고 난 뒤 곧 뒤집어 버립니다. 마치 교육자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을 가르쳐서 모두 성공시켰다고 스스로 대스승이라 확신하다면, 그는 이미 스승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교사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교화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행하고 나면 그만입니다. 마음속에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이 생기는 것. 마땅히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머무름이 없고 걸림이 없어야 하며, 사물이 다가오면 응하고 지나가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253 마땅히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머무름이 없고 걸림이 없어야 하며, 사물이 다가오면 응하고 지나가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곤 하는 이 두 구절의 뜻을 억지로 풀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아무런 일도 없이 거울처럼 맑아, 경계가 다가오면 비추고 사라지면 없어집니다. 이전에 제 친구 한 명이 있었는데, 그는 불교 공부를 해서 어느 정도 마음에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막 라 이터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에게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치 라이터처럼 찰칵! 하면 켜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고요.
284 ”….수보리여! 그대는 알아야 한다. 진정한 불법에는 정해진 법이 없다!“
사람들은 부처에게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티베트의 밀교에서는 향이 있는 채소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중국의 현교에서는 소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고, 저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모두 정해진 법으로서 불법이 아닙니다. 이런 설법들은 단지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지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처는 여기서 우리에게 충분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법만 이 불법이라 생각해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요.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겁니다. 이들은 모두 부처를 비방하는 겁니다. 부처에게는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285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형식이 곧 불교라고 말할 수 없다. 저 형식 또한 불교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기 있는 여러 청년 분들은 불교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고서도, 부처라는 말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서도 불법을 널리 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이치에 따라 다른 사람을 교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불법입니다! 하필 꼭 ‘부처’라는 말이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외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외피는 벗어던질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강연의 초두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진정한 불법은 일체의 종교나 철학을 초월해 있으며, 일체의 형식을 벗어나 있다고요. 바로 부처가 말하듯, 진정한 지혜의 성취는 반야바라밀이 아닙니다. 지혜가 최고의 단계에 이르면 지혜의 경계가 없어지며,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노자 또한 말했던 바입니다.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다”, 지혜가 진정으로 극에 이르면 대단히 평범해집니다. 세상에서 제일 고명한 사람은 제일 평범한 법입니다. 달리 말하면 제일 평범한 것이야말로 제일 위대합니다.
317 신해수지(信解受持). 역시 네 가지 수행 단계입니다. 이것은 불경에 대한 후세의 해석입니다. ‘신’이란 불경의 교리에 대한 믿음을 얻었다는 것이요. ‘해’란 불법의 각종 이치에 대한 해오에 이르렀다는 것이며, ‘수지’란 도를 깨친 후 다시 수행을 시작하고 이 수행을 통해 그 열매을 얻었다는 겁니다. 바로 교,리,행,과입니다.
412 지혜가 어떻게 힘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혜안은 지혜의 역량이 충분할 때에만 비로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어떻게 힘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보통 사람이라도 총명한 사람이라면 어떤 이치를 생각하여 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흡연이 폐에 좋지 않으니 끊어야 한다는 것은 이치상 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습과 때문에 끊을 수 없습니다. 지혜에 힘이 없으니 끊을 수 없습니다…불법을 연구하여 이치로는 능통하지만 막상 구체적인 일에 부닥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지혜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역량이 부족하면 열매를 증득할 수 없고, 도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전한 혜안은 지혜의 역량이 충분할 때에만 비로소 드러날 수 있습니다.
415 진정한 불법은 평상적인 것이요, 이것이 바로 도입니다.
424 유위법은 끊임없이 생겨나므로 유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으며, 생멸 또한 없어지지 않습니다. 생멸하는 마음을 단절해 버려야 도를 증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사견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불법이 아닙니다.
(자전거 중심잡기. 모를 땐 머리로만 알려하지만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번 감을 잡으면 머리 속에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을 할 필요가 없기에!)
432 청정무위! 진정한 복보
437 이 점을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불법이 지혜의 학문이라고 해서 선행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면, 이것은 진정한 지혜가 아닙니다. 말을 바꾸면, 진정한 지혜가 있다면 자연 좋은 일을 하고자 합니다. 지혜와 선행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지행합일은 깨달음의 당연지사!)
수지독송!
우리가 받은 옛날 교육에서는 책을 외워야 했습니다. 외우는 것은 머리를 쓰는 게 아닙니다. 노래를 부르듯이 하여 아뢰야식에 들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머리를 쓸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외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을 읽을 때는 소리를 내어 낭송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몸으로 얻는 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지 독송”의 네 가지 함의입니다.
법보시의 위대함! 이것은 바로 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 교화가 법보시, 사람들의 심리적 고통을 해결하고 스스로의 인생을 성취하도록 합니다.
633 모든 교화는 참된 것이 아니다.
부처는 사십구 년간 설법했지만 『금강경』에서는 한 글자도 말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법은 말할 수 없으며, 말한 것은 모두 진짜가 아닙니다. 말한 것은 모두 법상에 머물 수 있으므로 입만 열어도 곧 옳지 않습니다. 이 이치는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한 번만 생각해도 곧 알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실제로 행해지거나 입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고 맙니다…이런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왜 글을 잘 쓰지 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이 아름답더라도 일단 문장으로 써 놓고 나면 원래의 아름다웠던 그 생각이 아닙니다. 보면 볼수록 더 아닙니다. 문장은 문장이요, 생각은 생각일 뿐입니다. 이 둘은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 밖에 생각을 글로 쓰는 것과 말로 표현하는 것 사이에도 속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생각은 아주 빠릅니다. 더욱이 총명한 사람이라면 생각은 더 빠릅니다. 그래서 일 초간에도 동시에 여러 가지 사정들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글로 옮긴다면 일 초간의 생각을 옳기는 데도 최소한 오륙 분 정도는 걸릴 겁니다. 오륙 분이면 얼마나 긴 시간입니까? 이 사이에 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나와서 결국에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말합니다. 자신은 진정한 불법을 말한 적이 없다고요. 진정한 불법은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한 것은 모두 아닙니다. 일단 입을 열면 이미 그것이 아닙니다.(개구즉찰!)
입을 열지 않고도 그것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이심전심?!)
628 “피눈물 흘리는 두견이 눈물로 혼을 다한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옛날 어떤 나라가 망하자 상심이 극에 달한 황제의 아들이 날마다 울다가 마침내 그 혼이 두견새로 변해 지금도 울고 있다는 겁니다. 울다 울다 마지막에는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는데, 그 피가 땅에 떨어져 지금의 두견화로 변했다는 겁니다. 두견은 이 밖에도 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불법을 배우거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두견입니다. 가정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불법을 배우지만, 최후에 이르러서는 도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합니다. 단지 자신이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고, 부처를 만나지 못했고, 법을 얻지 못했다고 원망할 뿐입니다. 사실 불법은 제일 평범하며, 제일 간단합니다. 부처는 『금강경』에서 남김없이 다 말했습니다.
629 실제로 그는 가장 친절하고 가장 평범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돌이켜 봅시다. 『금강경』은 서두에서 세 글자, 즉 “선호념”을 강조했습니다. 범부에게나 성불한 사람에게나 단지 하나의 법문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선호념입니다. 어떤 생각을 보호한다는 걸까요? 머물지 않는(무소주) 것입니다. 어떻게머물지않는다는걸까요? 아주간단합니다. 법상을만들지않는(불생법상) 것입니다. 성불한 사람은 어떨까요?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먹고 입으며, 밥을 먹고 나서 발을 씻고는 타좌합니다. 이처럼 평범합니다. 머리에서 빛이 난다거나, 가슴에서 빛을 뿜어낸다거나, 여섯 가지 신통력이 있다거나 하는 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밥 먹고 옷 입고 자리 깔고 앉습니다. 그러고 나서 질문하면 대답합니다. 이처럼 간단합니다. 『금강경』은평범함속의진실이며, 평범함속의초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