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이 지은 하느님 노래 용담유사. 도올 김용옥 현재 우리말 역
322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무화無化시키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태허太虛의 무한한 포용에 자기를 던지는 순간 사랑은 달성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나는 평화라고 부릅니다. 진리도, 선함도, 아름다움도 평화를 상실하면 불인不仁하게 됩니다. 평화가 없으면 진·선·미라는 모든 문명의 가치가 잔인하고, 경직되고, 몰인정하게 되고 맙니다.
예수는 바울과는 달리, 종말대망공동체 내부의 사람들끼리의 사랑을 외치지 않았으며, 살아 움직이는 갈릴리 평원의 인간 모두를 향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라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도는 하느님을 무화시키는 것입니다. 존재자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실체가 시공의 변화 속으로 사라질 때만이 하느님 사랑은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놈들의 총구 앞으로 나아간 조선의 민중은 무아의 해탈을 성취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존재, 그 실체를 무아의 평화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323-324 천주학은 천주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운은 이러한 평등사상을 통하여 자신의 우수한 유학선배들이 서학에 매료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학의 경전을 탐독한 수운은 그러한 평등관의 배면에 변합없이 초월적 독재자 천주天主가 엄존하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가장 본질적인 사실은 인간을 억누르는 권위주의적 이념들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념들의 총체, 그 근원, 그 이념 중의 이념이 곧 “야훼” 혹은 “데우스”라는 이름으로 만유에 군림하는 천주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수운은 선포합니다. “인간의 평등은 오로지 인간이 하느님과 평등할 때 달성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수운의 포효에 대해 세계의 크리스챤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기독교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겸손을 가르친다.”
수운은 다시 말합니다. “겸손해야 할 주체는 우리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야훼는 민족신이고, 전생신이며, 질투하는 하느님이고, 호오가 확실한 하느님이며, 인간집단을 도륙하는 데 하등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정의를 결하면 그것은 하찮은 우상에 불과 합니다. 민족에 대한 호오가 있는 하나님은 특정한 문명권 밖으로 수출되어서는 아니 되는 하느님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하느님을 거부했습니다. 야훼는 하느님의 자격이 없는 우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예루살렘성전을 뒤엎었습니다. 즉 다윗왕의 보디가드 노릇을 하는 야훼를 축출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는 다윗왕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예수를 다윗의 후계자로 만들고 그를 메시아로 조작했습니다. 수운은 이러한 조작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서양의 사람들은 천주의 뜻을 빙자하여 좋은 일을 베푸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천하를 공취攻取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