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의 서유기. 성태용. 534쪽.
67 (스승을 찾아 나선 손오공)우선 우리 삶에 모범이 될 만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복이 없을 큰 복이죠. 배울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이요? 배우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하기에, 배울 게 없다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큰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더 배우겠다는 열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열망을 가진 눈은 늘 신선한 활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반대로 배울 것이 없다는, 권태롭거나 오만한 마음을 지닌 사람의 눈은 시커멓게 죽어 있으며, 언제나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마련이죠. 한마디로 말해서 한쪽은 나날이 살아나가는 사람이라면, 다른 쪽은 나날이 죽어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배우려는 열망을 가졌다고 해도, 그 열망이 올바른 지향 없이 아무거나 취하려고 날뛴다면 큰 문제입니다…헤매니즘…계속 헤내는 것으로 끝나면 정말 곤란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참으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올바로 선택해야 합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답을 반은 아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제대로 잡은 사람은 반 이상 배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68 답을 구하기에 앞서 중요한 제대로 된 질문하는 법! 저는 선생,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선생의 입장에 서면 좀 엄해집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아무 질문이나 툭툭 던지면 거기에 대답을 해주기보다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라고 타이르거나 유도를 하죠. 선생에게 질문을 하려면 무엇이 핵심인지 한 번쯤 생각을 해보라구요. 그렇게 스스로 생각을 해보고 물음을 던질 때, 선생은 제대로 된 답을 줄 수가 있고, 또 제자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잘 소화해내게 되죠.
69 스승으로서 훌륭한 제자를 만나는 것은 제자가 좋은 스승 만나는 것 이상의 큰 복입니다.(자식이란 자신의 생명을 잇는 자, 제자는 스승의 생각, 사상을 이어가는 자식)
83(수행발전, 일신우일신?하기는 힘든 법? 비약,도약이 필요!)질적인 변화는 어느 날 임계점을 완전히 넘어섰을 때 확연히 느껴지는 거죠.
그런 질적 변화를 통해 ‘비약‘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108 불교와 도교의 차이? 깨달음vs 불로장생!
불교와 도교의 근본 지향이 본디 좀 다르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불교는 근본적으로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이 근본 아닌가요? 그러니까 신선이 된다든가, 장생불사한다든가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에 반해 도교는 그 근본 목적이 ‘연년익수 우화등선’입니다. 수명을 늘려 오래오래 살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선이 된다는 말이죠. 굉장히 인간의 현실적인 욕망을 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지향성이 있습니다. 물론 청정과 무욕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도 다 장생불사를 위해서입니다.
113 탐욕과 서원은 무엇이 다른가? 탐욕과 서원도 둘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기의 소유로 끌어당기려 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서원을 세우라는 게 아닙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통해 연기의 진리를 알게 되면 아집, 아상이 없어지게 됩니다. 나와 너와 사회와 국가와 세계…그것들이 무한한 연기성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나만을 위하던 욕망이 너와 사회와 국가와…나아가 온 중생이 모두 잘되는 방향으로 확장됩니다. 그것이 바로 서원인 것입니다.(무조건 욕망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문제)
177 네가 화두에 순일하게 되면 저절로 도둑은 물러가는 법인데, 그것을 도둑으로 의식하고서야 어찌 그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의식하는 순간 벌써 뺏긴 것이거든?
179 그것들을 의식하고, 그것들에 대항하고, 그것들을 없애려하는 것 자체가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요, 그것들에 지는 일입니다. 꿋꿋하게 내 갈 길을 가는 것, 서둘지 않고 뚜벅뚜벅 큰 길을 걸어나가는 것이 수행의 왕도라는 점을 기억해두시면 좋겠습니다.(인욕바라밀. 참지 않고 참는 법?!)
188 “허물을 범하였거든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논어)
205 막을 수 없는 게임중독? 훌륭한 게임을 통해 좋은 성향과 심성을 형성해낼 수 만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다 보니 서유기처 럼 좋은 게임의 소재가 없더군요. 우선 재미가 있지 않습니까?
이 시대의 화두는 뭐니 뭐니 해도 결국 재미입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재미없으면 그걸로 끝! 재미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한번 돌아보세요. 우리는 어떤 존재를 본디부터 나쁜 존재로 생각하고 그것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그 대상을 증오하고 말살하려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은가요?
자기와 입장이 다르거나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를 본디부터 악한 존재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존재를 없애버리는 길밖에 남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연기법의 깨달음? 자비!)
264 인삼과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대형사고까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전개지요. 그런데 바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전개가 거의 모든 대형사건의 배경에 깔려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사람을 죽인다든지 하는 끔찍한 사건을 살펴보면 대개는 “니가 뭔데?””내가 어쨌다구?'”, “근데 왜 반말 하냐?” 어쩌구 하는 하찮은 일들에서 맘을 상하는 것이 그 출발 점입니다. 사람이 조그만 것을 더 참기 어려워하고 그게 증폭되어 큰 사건이 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통증을 참기는 쉽지만, 가려움을 참기는 힘들다” 는 말이 있습니다. 가려움과 같은 가벼운 일을 잘 참아내는 수양이 참으로필요하다는 뜻이지요…자그마한 일에 발끈하는 것을 참아내는 수양, 그것이 수양의 출발점입니다.
328 부처님도 결국 ‘지금‘, ’여기’만을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 때가 많습니다.(여여.카르페디엠)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 남는 것은 ‘지금’, ‘여기’일뿐입니다. 어떤 생이 올 것인가? 그것은 지금의 생에 달려 있지요. 과거의 생이 어떠했는가? 그것도 지금의 생을 보면 되지요. 언제나 지금과 여기, 이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안다는 것은 결국 삶을 아는 것으로 돌아오지요.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공자님 말씀(삶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과 부처님 말씀이 다를 것 없어 보이기도 해요. 괜히 과거의 생을 알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또 미래의 생이 어떨 것인가 미리 내다보려 할 필요도 없지요, 지금! 여기! 과거와 미래가 한순간에 펼쳐보이고 있으니까요.
334(이름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뿐!) 이름을 통해 무엇을 안다는 것은, 전체를 환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특징을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에 불과함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금각, 은각 이야기. 끝없는 시련(시험?)의 이유? 수련, 단련!?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근육과 뼈를 고달프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빈궁에 빠뜨리며,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이는 그의 마음을 활동시키고 참을성을 길러주어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서유기의 끝날 줄 모르는 시험? 이야기가 되려면 모험이 필요하다!)
349 인과응보는 털끝만큼도 벗어날 수 없으니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실제도 헛된 것이거늘 하물며 이름이랴!
갈 길을 그저 갈 뿐, 무엇을 남기려 하랴.
376 강직한 사람은 그 강직함 때문에 실수를 범합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그 너그러움 때문에 실수를 범하고요. 논어에 이런 말이 있지요. “사람의 허물은 그 사람의 부류에 따라 다르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허물을 범하는가를 살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현장법사가 허물을 범하고 실수를 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잘 살펴보면 현장법사의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실수를 자꾸 하는 것으로 보아 현장법사는 자비로운 분이 틀림없습니다.(자비심 때문에 번번히 고생하는 삼장법사? 과잉 자비, 눈먼 자비! 중용의 지혜 부족!)
원효 스님이 말씀하신 일심이문. 생멸문과 진여문! 그러니까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은, 바로 차별과 집착이 있는 세계에서 모든 차별을 넘어선 세계로 나가는 거이라 할 수 있어요.
421 원효 스님이 말씀하신 일심이문()의 틀에 의하면,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나가는 것이라 합니다. 생멸문과 진여문이 바로 이문이지요.
그게 무슨 문이냐구요? 생멸문은 말 그대로 생멸이 있는 현상세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기고 소멸함이 있는 세계, 차별이 있는 세계를 뜻합니다. 진여문은 그 반대입니다.
참다운 진리의 세계입니다. 그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차별 없음’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은, 바로 차별과 집착이 있는 세계에서 모든 차별을 넘어선 세계로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422 법신에는 앉을 자리가 없음이 유감이로구나! 수행의 목표는 이처럼 불가사의한 업을 짓는 것입니다. 진여라는 자리에 가서 털썩 주저앉아 편안히 쉬는 것이 아니라구요. 그것을 서유기의 저자는 “법신은 앉을 자리가 없다!”라는 말로써 표현한 게 아닐까요?
(응무소주 이생기심!) 피곤한 일 아니냐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니까요. ‘불편하다, 힘들다’는 생각은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순간에 생겨나는 법입니다.(인욕바라밀, 참음이 없이 참는다! 금연? 담배 생각 없이 담배를 안 핀다!)
道不同, 不相爲謀. 공자님 말씀. 추가하는 길이 다르면 더불어 무엇을 꾀할 수 없다!
447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온전한 대자유, 즉 해탈에 이르기 위해선 결국 그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색욕,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자유로워져야 그것을 옳게 쓸 수도 있으니까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그리고 삼장법사! 모르는 이가 없을 이야기이지만, 제목 그대로 철들고 다시 들어보는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레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재미와 함께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