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호집(상) 이인상 지음. 박병호 옮김.
이인상이 붙들고 있던 이념은 일종의 아나크로니즘이었다. 하지만 소설가 이병주가 <관부연락선>에서 설파하고 있듯, “인간의 집념, 인간의 위대함, 인간의 특질”은 “아나크로니즘을 통해서 더욱 명료하게, 보다 빛나게 나타나는” 법이다. 그래서 <능호집>을 읽으면 슬프다.

송사행을 위해 부채에 <산거도>를 그리고, 홍양지와 함께 연구(聯句)를 지어 부채에다 썼다. 구절마다 운을 붙였는데 유창한가 난삽하가에 구애됨이 없이 그림 속의 한 사물도 빠뜨리지 않고 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그림의 세밀하기는 실낱 같았고, 글자의 세밀하기는 깨알 같았다.
묘경에 마음이 움직여/ 고상한 뜻 은자에 향하네
가슴에 품고 일천 봉우리에 이르메/ 누대를 한 점 티끝에 부쳤네.
깊은 곳 찾으니 구름이 지척이고/ 멀리 건너도 바다는 가이없구나.
구혈이 말로 전함은 망녕된 게 아니요/ 도원에 앉아 정신을 소일하네.
골짜기 굽어 도니 땅이 기이한 줄 알겠고/ 봉우리 아스라해 하늘과 가까운가 의심하네.
야인의 옷에 옛 법이 남아 있고/ 숲의 꽃이 따로 봄을 기록하네.
골짝의 맑은 바람소리 은은하고/ 뜨락의 녹음에 연꽃 기운 향기롭고/ 차 끓이는 화로는 잣나무 곁에 있네.
빈 못은 한 개의 거울처럼 환하고/ 허공의 폭포에는 두 개의 띠가 드리워 있네.
초동은 멀리 있어 저녁 노래 수고롭고/ 절은 높아 새벽 종소리 운치 있네.
언덕의 서리 단풍에 쌓이고/ 원림에 부는 바람 송죽을 에워싸네.
암혈의 집은 사립문 닫혀 있고/ 안개 낀 소로에는 지나가는 수레 적네.
산 높고 물 맑아 홀로 즐거우니/ 살림살이 가난타 말하지 마오.
학은 춤을 추다가 숲에 머물고/ 사슴을 타고 가다 풀에서 쉬네.
마음을 길러 꿩 좇아 샘물 마시고/ 덕을 숨겨 용처럼 나는 걸 사양하누나.
깊은 띠집에 편안히 앉아/ 갈건도 안 쓴 채 먼 곳을 보네.
시를 지어 종에게 들려주고/ 술로 시내에 손을 맞네.
자욱이 구름 흘러 산을 두르고/ 뾰족뾰족 석순이 솟아 있고나.
산빛은 옥덩이를 품고/ 시내의 무지개는 보물을 감추었네.
하는 일은 고작 소를 치는 일/ 무심하니 새와 친해지네.
내관하여 나를 잊나니/ 현묘한 이치는 환이지 진이 아닐세.
복지라 신령도 꺼리고/ 온전한 그 공력 조물주도 화를 내네.
회남에선 여전히 개를 쫓고/ 화서에서는 아직도 유민이 있어라.
선침이 산하에 숨겨져 있고/ 신루엔 일월이 새롭네.
드넓은 우주에 노닐 것 없이/ 여기서 순박한 기운 보존해야지.
무성한 나무 보니 집 지어 살고 싶고/ 빈 배를 대하니 나루가 어딘지 묻고 싶어라.
만나서 나누는 말에 도타운 정 부쳤고/ 말없이 마주하니 은둔을 배우게 되네.
오땅에서 음악 찾은 건 오래된 일인데/ 거문고 숭상해 그 타는 소리 자주 들리네.
가을 날씨 다시 더워 괴로울지언정/ 해와 서로 친해짐을 꺠닫게 되네.
움츠리고 폄에 우리 道 잘 보전하여/ 앞날에 천명을 믿어 보세나.




벗에게 편지를 띄우다
온 울타리에 인동 넝쿨 벋고/ 뜨락의 길 양옆에 찔레꽃 만개했구려.
속세의 길 삼백 보 걷는 것 아까지 말고/ 야인의 집에 와 그윽한 향기 주워 가구려.

명곡 동쪽 언덕에 올라 내키는 대로 읊조리다
꽃구경 같이 갈 벗이 없어서/ 홀로 가는 내 마음 서글프구나.
사람들 꽃 만개한 시절만 좇고/ 꽃 피지 않은 때는 즐기지 않네.
꽃 시들면 그만 싫증을 내어/ 모두 발길을 끊어 버리네.
봄 神의 마음에 감복하노라/ 꽃 피우고 지게 함에 사사로움이 없으니.
열흘 전 남쪽 누각에서 바라볼 적에/ 일만 나무 한창 푸른 잎 돋아/ 그윽한 꽃향기는 내뿜지 않아도/ 버드나무 맵시 새로웠었지.
흡사 복희씨가 팔괘 만들어/ 인문이 차츰 열린 것 같고녀.
어느내 열흘이 지나고 보니/ 꽃이 많고 가지는 적게 보이네.
시냇가에 산수유 반짝거리고/ 바위엔 붉은 진달래 흐드러졌네.
보슬비 내리는 밤 기다렸더니/ 훈풍이 먼저 불어오누나.
영롱하여라 조물주 마음/ 꽃향기 있어 그 마음 아네.
함께 언덕 오른 벗 비록 없어도/ 우두커니 바라보며 홀로 즐거워하네.
맑은 아지랑이 대궐에 오르고/ 밝은 햇살 거리를 비추는구나.
밝고 화사한 이 봄 사랑하노니/ 흡사 태평성대 만난 것 같네.
내일이면 꽃이 난만할 테니/ 머물러 꽃 지는 걸 구경하리라.

하13 무릇 명성과 비방은 밖에 있는 것이어서 자기가 간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도리와 덕성은 안에 있는 것이니 수양하여 훌륭하게 할 수 있습니다.
18 가만히 요즘 소년들을 보건대 시속(時俗)을 다투어 숭상하고, 방자한 말로 논의를 세우며, 마음은 성급합니다. 그 병의 근원을 찾아보면 대개 이기기 좋아하고 빨리 이루려는 마음에서 연유하는 바, 뜻있는 선비가 아니라면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2 비록 주자가 경전에 달아 놓은 장구라 할지라도 모름지기 의심을 가져 본 후에 귀일해야 성인을 독실히 믿을 수 있고 주자를 독실히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사사로이 믿는 마음을 가지는 건 옳지 않습니다. 애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가리켜 보이면 곧 믿어 버리는 건 마치 불교에서 몽둥이로 치면서 ‘할!’ 하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의심을 품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귀일은 더욱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3 유자후의 여러 글들은 아직 옛 시대의 글인지라 비록 몹시 다듬었기는 하나 간결하고 질박하며 굳세고 고아하여 부화하거나 지리한 말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흥취가 지극할 때 글을 썼기 때문 에 체재도 자연히 간결하지요.
27 군자가 자신의 몸을 닦는 것과 세상에 도를 행하는 것은 둘이 아닌 하나의 도리인 것입니다.
28 신성보에게 준 편지. 독서를 엄격하고 독실하게 한다면 생각이 정밀해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눈앞의 이익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잠을 적게 자 혼미한 기운을 물러나게 할 것이고 뜻과 도량이 점점 넓어지게 할 터인바, 이를 넓혀 가면 허다한 즐거움이 있어 우환과 질병도 그 즐거움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33 누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전하지 마시고, 누가 나를 걱정한다는 말은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를 헐뜯는 말은 전하지 마시고, 누가 나에게 바라는 말은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어리석음을 손님께서는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사랑채에 써 두었으나 몸소 실천하지 못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467 <시경>에 이르기를,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라고 했으니, 그 광채가 너무 드러남을 싫어해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되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화려하되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군자의 도는 담박하되 싫증이 나지 않으며, 간략하되 문채가 난다.
468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无悶). 이인상은 특히 <주역> 대과괘의 상전에 나오는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无悶)”이라는 말을 애호했다. 이 말은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하여 은둔해도 아무 근심이 없다”라는 뜻인데, <정전>에는 이 구절이 다음과 같이 풀이되어 있다.
천하가 비난해도 돌아보지 않음이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음이요. 온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음이 세상을 피해 은둔해도 아무 근심이 없음이다.”
41 먼저 뜻을 세워야 합니다. 뜻이 서지 않으면 만사가 분명히 판단되지 않습니다.
281 우연히 쓰다
요즘은 풍속이 부박하며, 화목한 집안이 드물다. 사람들은 모두 사사로움일 좇아 자기주장만 하나 부끄러움을 모르니, 이 병폐는 대개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가난을 편하게 여기기 않는 데서 기인한다.
대저 벗과 사귀며 서신을 주고받을 때는 비교하는 마음을 일절 경계해야 하며, 잘난 체하는 마음을 일절 경계해야 하고, 잘못을 숨기는 마음을 일절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 한번 들며 곧 진실된 마음을 해치게 되니, 통렬히 스스로를 성찰해야 마땅하다. 또 벗을 보사輔師로 삼하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도의를 위하여 사귀는 처음부터 벗을 신중히 가려 사귀어야 하며, 이미 교제를 맺었으면, 지성으로 경애하고 잘못이 있으면 간곡하게 개도하여 함께 좋은 길로 나아가야지 갑작스레 멀리해서는 안 된다.
259 귀거래관 상량문
벗을 구하는 <시경>의 <벌목>시에는 감발되어 함께 손잡고 수레에 오르길 기약했네. 띠풀 베어 터를 잡고 사는 즐거움을 기리며, 배가 흔들흔들 바람에 움직이고 바람이 살랑살랑 옷자락에 부는 걸 그리워했네. 마음을 좇아 귀거래하니 조그만 집은 일신을 겨우 용납하네.
생각건데 그대의 분은 거친 골짝에 은거함이 맞지만, 처음이 품었던 뜻은 쇠퇴한 풍속을 되돌려려는 것이었네. 그리하여 육경에든 말을 되풀이하여 외고, 성인의 학문을 온화한 마음으로 닦으며, 삼왕의 정통을 서술해 밝히고, 도에 합치되는 문에 공손히 뜻을 두었네. 관유안은 구멍이 난 의자를 쓸 만큼 검소했으나 행실이 방정하고 몸가짐이 꼿꼭했으며, 이원례는 문장이 자못 높아 명성과 비방이 함께 따랐네. 마음을 아는 벗 몇몇만 허여하고 공연히 온갖 책을 읽어 옛 도를 자임하는 바람에 지금 사람들의 미움을 샀네.
스스로 생각건대 본성에 맞는 것은 산새와 들꽃이며, 몸을 의탁할만한 곳은 큰 바위와 높은 산이었네. 어려서는 구룡연과 중향성의 길을 알아 문든 머리 감고 올까 생각했고, 늙어서는 구담과 옥순 사이에 들어가 종내 은거할까 생각했네. 돌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며 송백의 그늘에서 쉬고, 벼슬아치의 영화로움을 버려, 산천을 두루 보고 형신을 단련하여 예악과 문장의 변천을 관찰하려 했네. 운담에 집을 지어 세상을 길이 하직하고, 삽계에 배를 띄워 내가 좋아하는 바대로 살겠다고 맹세했네.
다만 “노닐 경우에는 반드시 있는 곳을 알려 두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지키며, 괜찮은 은거지를 늘상 꿈꾸었네. 멀리 노닐고자 했던 굴원의 마음을 품어 남쪽 언덕에서 난초를 딸 것을 기약하였고, 향리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려던 증자의 마음을 좇아 북당에 원추리 심으려는 뜻을 품었네.
처음에 형강 가에 나아가 대숲 사이에 집을 마련해, 몽산 아래 은거했던 노래자를 따라 침상을 억새와 쑥으로 두르고, 동려에 은둔했던 대옹을 기억하며 금으로 훈지와 가락을 맞추었네. 언덕의 나무는 겹겹이 숲을 이루고 못의 향기를 풍기는데, 때때로 달빛을 따라 작은 배를 저어 가 높은 누각에서 구름을 바라보았네. 척박한 밭으로는 쌀독을 채우지 못해 공연히 널따란 들을 생각하고, 적은 녹은 굴레와 같아 정성을 못하는 처지 견딜 수 없었네. 게을리 죽부 차고 암서 찾으니, 상수리나무 신이 문득 시원한 샘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네. 멀지 않고 가까워, 고향 근처요 선영 곁이네. 즐거이 공부하며 편안히 살려면 고을살이 그만두고 포의로 돌아감이 마땅하네.
방산을 등지고 기이한 바위 사이에 훌륭한 집터를 정하니, 고원이 조감되고 평탄한 밭이 내려다보여 농사일 살피기에 적당하였네. 마침내 흙을 져나르고 돌을 옮기며 이엉 초가를 지으니, 지붕이 낮아 머리가 닿고 방은 자그마하였네. 어머니를 모시고 뜰을 지나니 대숲이 펼쳐지고, 당에 올라 색동옷 입고 부모를 기쁘게 하매 새들이 날아와 친근함을 표하네. 홀로 뺨을 괸 채 산을 보니 지붕 위의 노을이 절로 아름답고, 지팡이 짚고 물소리 들으니 문전에 심은 곡식 점점 자라네. 이처럼 산림에서 살아가니 어찌 관에 매인 몸이 되어 고관에게 고개를 숙이겠는가? 꽃 심고 술 빚으며 세상의 영고성쇠를 절로 깨닫고, 연잎으로 옷을 지어 향기로움과 조촐함을 홀로 보존하네. 웃음지으며 풍성한 나무 아래 앉으니 예쁜 새소리 우연히 들리고, 가을 물에 몸을 씻으며 유유히 노니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깨닫네.
이에 이름을 지어 뜻을 부치고, 편지를 써 즐거움을 알렸네. 검소한 생활의 편안함을 즐겨 들려주고, 으리으리한 외관의 아름다움은 취하지 않네. 천하를 주어도 자신의 즐거움과 바꾸지 않음은 저 석호의 농부와 견줄 만하고, 태초와 이웃하여 옛날의 질박한 제도를 취하네. 바위 사이에서 서늘하게 지냄은 저 무이산에 대은이 숨었던 일과 같고, 마음을 난초와 같이함은 문산에 작은 누각에 누웠던 일과 같네. 알괘라(알겠노라). 그대가 속세를 떠나 은둔하여 이 즐거움을 잊지 않겠노라 맹세한 줄을. 베옷 입고 죽관쓰니 상관에게 머리 조아릴 일이 없지만, 벼슬아치가 되어 좋은 말 타고 일산을 쓰면 실로 눈쌀 찌푸릴 근심이 생기네. 저녁이면 가래 메고 돌아오고 새벽이 되면 바지 걷고 일 나가는 걸 어찌 잊으리? 바위 사이에 집을 지은 건 남강의 일을 흠모해서고, 벼슬살이 그만두고 은둔한 건 봉맹의 현철함을 본받아서네.
내달으니 귀거래의 마음 봄 여울 따라 산골짝에 이르고, 새 집에 거처하니 즐거운 뜻은 한가한 구름과 함께 산에 의지하네. 경전을 읽으며 몸소 농사를 지으니 어머니 기쁘게 해 드리려는 뜻 이미 이뤘고, 약초를 캐어 자급자족하니 벼슬 구하는 마음 길이 잊었네.
천명을 편안히 여겨 의심하지 않으니 육정이 힘껏 당긴다 해도 산처럼 꿈쩍 않고, 은거해 살며 근심이 없으니 만 마리 소가 끈다해도 동량처럼 까딱 않네. 이곳에 청일한 처사의 집을 세우니, 효성스럽고 우애 깊던 장중의 아름다움을 칭송해야 하리.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 후 온 집안이 복을 누리고 이웃들은 어진 이에게 귀의하며, 종이에 그린 바둑판과 바늘로 만든 낚시는 때때로 산중의 즐거움을 돕고, 고송의 씨를 심고 학의 새끼를 길러 청진한 정취를 보며, 산하를 베개 삼아 꿈을 꾸어 점쟁이에게 꿈을 해몽케 하고, 별천지 같은 작은 골짜기 그윽하고 빛나며, 애오라지 경서를 읽고 숲 밖의 일은 개의치 말기를.
175 옛적에, 누각에서 지내기를 좋아하면서도 그럴 형편이 못 되면 누각 그림을 그려 마음으로 노닐었으니, 이를 ‘신루’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