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미래를 위한 확실한 대안. 이계삼 외. p196
앎과 삶 시리즈 1
#한국 교육, 변화를 위한 시론(試論)_이계삼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유하,『학교에서 배운 것』
우리는 모두 한국 교육의 불행한 자식들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어찌 우리 인생의 일할만이겠는가. 시인 유하의 저 고백은 특별히 예민한 사람만의 회고가 아니라 일반적인 한국인의 내면에 두루 새겨진 상처인 것이다…그것이 행복한 체험이었을리 만무할 텐데, 왜 자기 자식에게 야만스런 체험을 대물림하려는 것일까. 학교 교육을 통해 내면화된 가치, 학교에서 얻게 된 트라우마는 일생토록 따라다니며 우리들 삶의 여러 국면에 개입하며 균형 잡힌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끝없이 방해한다. 배움에 대한 혐오, 보수적 정치 이념과 속물적 인생관, 경쟁과 질시, 승자 독식의 논리…나열하기에도 숨이 차는 이 ‘악한’ 것들을 오늘날 한국의 학교는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입시 경쟁 교육이 훌륭한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아이들을 이렇게 빡빡 굴려야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간다고 믿는 얼간이 또한 아무도 없다. 그러나 교과의 특색에 따라 그야말로 상식적인 수업을 꾸려가려는 교사들에게 언제나 ‘지금 그런 거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소 .일제고사 성적을 올려야지….’라는 견제가 곧장 들어온다. 연예하는 아이들, 음악이건 뭐건 취미 생활을 누리려는 아이들에게는 ‘그런 거는 어른 돼서 하거라’는 충고가…”지금 그런 거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너만 그런다고 되겠어?” “남들은…” 이 세 문장은 모든 소중한 일상적 가치를 유예시키고 폐기시키는 마법을 부린다. 비정상이 정상을 질질 끌고 가는, 그야말로 악마적인 시스템이다.
한국인들의 교육열. 그러나 그것은 교육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람 만들겠다’는 의지로 보기 어렵다. 그저 지위 경쟁의 앞자리에 올라타 ‘노동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망하는 바람이자 배우지 못함으로 겪은 뼛골에 사무친 ‘한’의 표현일 따름이었다.
지금껏 그러했고, 현재도 그러하지만, 한국의 공교육이 갖춘 공공성이란 세금으로 조성된 공적 자금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말고는 참으로 박약한 근거 위에 서 있다. 한 존재를 균형 잡힌 존재로 키우는 수단도 아니며,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계층간의 격차를 조정하기는커녕 이기심과 특권의 재생산이 이뤄지는 장일뿐이다.
우리의 대안 프레임1: 교육이란 ‘섞이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의 구축
‘하향 평준화’된다고들 말한다. 교육은 이러한 ‘현실적 이해관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수많은 연구 결과들 또한 평준화로 인해 학업성취도가 더 향상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핀란드 교육 혁명』이 공히 지적하듯 완전한 평준화 체제인 핀란드가 국제적인 성취도 평가에서 거둔 괄목할 만한 성과도 빠뜨릴 수 없다.
우리의 대안 프레임2: 인문학과 육체노동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학교교육의 효율성을 회복하는 흐름으로 귀결된다면, 사교육 시장에게 빼앗긴 ‘지식 전수 공간’으로, ‘입시 준비 기관으로서의 권능’을 되찾아오려는 흐름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또다른 야만의 재생산일 뿐이다. 이런 학교 혁신의 흐름에서 실로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문·사·철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물적 조건과 상황에 놓이건, 어쨌든 대세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전환을 위한 사유에서 또 하나의 축이 되어야 할 것은 ‘농업’의 가치이다.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 불과 10년 안으로 농사를 지을 세대는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농업은 미구에 닥쳐올 세계 자본주의의 공황적 상황에서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될 수밖에 없을, 인간 생존의 물적 기초를 말하는 것이다. 농업은 아이들의 삶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린 몸의 교육, 실용, 실과, 노작 교육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의 대안 프레임3: 학교 바깥을 사유하자!
의미 있는 교육 담론의 형성을 위하여
“사람들이 정치권력에 너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어요…그래서 이명박 정부를 반대하고 지도자가 바뀌면 세상이 바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내가 다시 들어가도 뭐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힘들어요…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움 사람, 무의식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역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배 논리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거죠.”-노무현, 『진보의 미래』
결국 아래로부터의 실험만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사실이다. 『덴마크의 자유교육』이 소개하듯, 덴마크가 150여 년 전 근대 사회로 이행하던 시기에 풀뿌리 민중들이 국가 주도의 공교육 체제에 맞서 일구어온 자유 교육의 전통 속에서 오늘날 덴마크의 높은 수준의 시민적 교양과 복지사회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이러한 교육 문제들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올바르게’ 형성하는 것이다.
교육 문제 해결을 선거를 통한 집권과 제도 개선으로 국한해서는 안 된다. 교육은 결과와 과정의 변증법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다. 교사, 학부모, 언론, 교육시민사회, 정부 모두 이 교육적 과정에서 열외자일 수 없다.
##대한민국 교육 24시
#평화로 가는 학교가 행복하다_김종철
전성은, 『왜 학교는 불행한가』
학교의 기원? “학교는 그 출발이 국가를 위해 전쟁에 필요한 전사 양성이 목적이었고, 그 다음이 세금을 걷기 위해 글을 쓸 줄 하는 관리의 양성과 왕실을 지탱해줄 종교에 필요한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모두 국비로 설립되고 운영되는 국립이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예로 들어보면 학교교육의 목적이 명백히 드러난다. 그가 세운 ‘교육입국’이란 말은 “자유와 정의 위에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뜻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학교가 국가의 경제발전계획에 필요한 직업군을 길러내는 일을 하자는 뜻으로 태어났다…결국 산업전사를 길러내자는 게 교육입국이라는 구호의 실체였다.”
#교육을 바꾸려면 사회부터 바꾸어야 한다_김종락
『경제학자, 교육혁신을 말하다』
상위1%를 위해 99%는 억지로 끌려가는 게임.
“학벌경쟁게임의 구조가 지니는 사회적 낭비, 결국 상위 1%만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게임에 나머지 99%의 참가자들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하는 그 성격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게임의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자하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한다 가난을 낳는 구조를 바꾸자하면 사람들이 나를 빨갱이라고한다.” -돔 헬더 까마라 브라질 대주교
##학교, 바로 보기 뒤집어 보기
#시대를 뛰어넘어 ‘배움’의 진짜 의미를 묻게 하는 힘_이한
이반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
‘학교’의 신화를 부정하다
도구의 성장이 지나쳐 분수령을 넘어서면 조작적 도구가 출현한다. 삶을 위해 도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가 삶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일리히는 조작적 도구의 대표적인 예로 도로와 학교 제도를 꼽았다. 자동차를 더 빨리 달리게 하기 위해 많은 보조금이 투입되는 도로는 사회 구성원들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고, 대중교통을 더 비싸게 만들어 사실상 더 많은 시간을 빼앗는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더 빨리 달리게 한다는 명목으로 건설된 도로가 실제로는 사회 구성원들의 시간을 더 빼앗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동차는 ‘시간을 아껴주는’ 도구로 간주된다.
학교는 어떤가? 학교 제도는 학교를 가지 않는 사람과 가는 사람을 구분 짓는 근거가 된다. 학교를 가지 않고 배운 사람에 대하여 낙오자와 교육받지 못한 자라는 딱지를 붙이며, 교육 자원과 재정을 학교가 독점한다. 그리하여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으며, 급기야 ‘학교를 다니는 것’이 ‘교육을 받는 것’이나 ‘배우는 것’과 동치된다. 이것이 가치의 제도화다. 가치에 봉사하기 위해 생겨난 도구가 오히려 스스로 가치를 규정해버리는 도치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학교 이전에 배움이 있다
#보편적 복지국가의 교육 주체는 누구일까?_
당시 스무살의 대학생이었던 저자 이반, 『학교를 넘어서』
“‘교육문제’같은 것은 없다. 다만 ‘교육을 맡고 있는 학교라는 국가기구’ 안에서 이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라고. 하여 “이 사회의 탈학교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결론은 이런 “탈학교운동은 교육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폭넓은 사회, 정치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탈학교’보다 ‘자치교육’에 초점이 맞춰져야
#’성공한 교육과 진실’을 위하여_류대성
“학교는 중요한 진실을 회피한다”-노암 촘스키
노암 촘스키,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학교교육의 목적이 인재 양성이라고 하는 것은 신화다. 깨어져야 할 신화다. 그건 기능이지 목적이 아니다.
교육의 목적은 인류 평화다.
지배와 억압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일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정의다. 불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은 반역사적인 불의다.-『왜 학교는 불행한가』
“교사가 진정한 지식인이 되려면 비판적 언어로 무장해서, 위선과 사회적 부정 그리고 인류의 불행을 규탄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의 몰락과 지식 공장의 출현_정용주
서보명, 『대학의 몰락』
무너지는 대학, 사라지는 가치
이제 대학은 형이상학적, 종교적 담론 속에서 ‘인간이 바르게 산다는 게 무엇인가’ 하는 이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는 것을 포기했으며, 교수도 소명을 가지고 학생들과 교실에서 배움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 관심을 갖지 않고 직업훈련소에서 유용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듯이 리서치 기술을 가르치고, 글쓰기를 비롯한 모든 것들을 기능화한다. 베버식으로 말하면 관료화와 사회적 관계들의 사물화가 진전됨에 따라 가치를 제거한 기능만을 가르치는 목적합리성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기업화된 대학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서 진정한 배움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기업화된 대학에서 교수는 생산관리직 일꾼이고, 학생은 교육의 소비자로서 그들의 만족을 위해 교육의 내용은 품질관리의 대상이 된다.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하여_김종철
학벌없는 사회,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
#절망의 공교육에 희망을 꽃을 피워 올리다_백화현
『작은 학교 행복한 아이들』, 『학교를 바꾸다』
##가르침이란 배움이란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을 위하여_주상태
파울로 프레이리, 『프레이리의 교사론』
진정한 교육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필독서
#어린이 해방 교육을 꿈꾸며_이주영
이오덕,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이오덕은 40여 년을 초중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40여 년을 교육 현장에서 교육자로 살면서 그는 항상 괴로워했다. 우리 교육이 아이들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은 겉으로는 민주 교육이라고 떠들면서 실제로 하는 짓은 독재정치 앞잡이 노릇을 하고, 민족 교육을 한다고 자랑하면서 가르치는 내용은 동족을 증오하는 반민족적 교육이며, 전인교육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도 지식 암기 위주 경쟁 교육으로 몰아왔다. 학교는 아이들을 사람답게 함께 사는 삶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서로 잡아먹는 적자생존 기술이나 지식만 익히는 훈련장이 된 것이다.
이런 학교 현장에서 40여 년을 버티고 살았으니 괴로울 수밖에 없었고,….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에 대한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으로 축적된 것이다. 그가 실천한 학급 교육 결과를 기록한 『일하는 아이들』, 『우리가 크면 농부가 되겠지』, 『허수아비도 깍꿀로 덕새를 넘고』, 『봄여름가을겨울』 같은 책에 실린 어린이들이 쓴 글과 그림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물을 보면서 교사들은 ‘아, 정말 이런 교육이 가능하구나’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놀이와 배움이 하나가 되는 교실을 꿈꾸다
교과서 외워서 점수 경쟁하는 것은 삶이 아니다…삶이란 무엇인가? 삶은 일하는 것이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삶,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삶이란 ‘일과 놀이와 배움이 하나’가 되는 거라고 보았다. 따라서 일하기를 제쳐놓고 삶이 있을 수 없다. 놀이가 빠진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일을 즐겁게 할 때 그 일이 놀이가 되고 노래가 되고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어른들 노동이 억압당하고 왜곡되어 왔다. 그 사회가 삶이 없는 교육을 강요하고 있고 삶을 빼앗긴 아이들은 일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어른으로 자라게 된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진정으로 사랑해보셨나요?_이현숙
안준철,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들의 숨결은 학교에서 가정에서 억압당하는 것이 현실이다…모두가 입시 경쟁의 치열한 좌표 안에서 오직 학력 신장의 광기에만 매달려 불확실한 미래에 돈과 정열을 낭비하는 이 순간에도 옆 반의 연재, 혜린, 수경, 민혜 등 수많은 아이들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담임 업무와 사고뭉치 아이들의 뒤처리까지 아웅다웅 학생들과 싸우다보면 어느새 하루 일과가 끝난다.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종례 시간에 학교 일정을 전달하고 검사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은 힘에 부친다. 도대체 이런 일상에서 학생들과 사랑으로 관계를 맺고 사랑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그것이 가능하다고 온몸으로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선생님이 계시다. 바로 안준철 선생임이시다.
안준철 선생님의 사랑의 법칙은 간단한 것 같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이던 것과 다르러라’는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아이들을 사람하고 더욱 크게 이해하고 함께 나눈 사랑에서 삶의 행복을 누리신다…사랑의 도사처럼 보이는 이분도 자신의 사랑법 비결에 대해 “끝없는 사랑을 단련시키는 데” 있다고 말씀하신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늘 영혼이 깨어 있어야 하며, 쓰라린 실패를 통해서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 아이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사랑은 단련된다고 말씀하신다.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나는 풀잎이 되고 싶다/ 흔하디흔한 빗방울도/ 반짝이는 보석이 되게 하는
나는 눈부시지 않아도/ 너를 눈부시게 하고/ 나는 반짝이지 않아도/ 너를 반짝이게 해 주는 – 안준철, 『풀잎과 거미줄』 중에서
#’눈물’과 ‘사랑’의 교육을 위하여_박종호
이계삼,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우리 교육을 바라보는 이계삼 선생의 눈은 매섭고, 차갑고, 몹시 단호하다…타락한 한국 사회가 고스란히 재현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언사는 아이들의 구체적인 삶을 잣대로 나온 것이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자연으로부터 쫓겨나 한국 교육이라는 집단 가학 시스템 속으로 유폐된 이 아이들은 제 자연적 본성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말초적 즐거움에, 디지털로 분절되는 기계적 단순성에,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고독하고도 야수적인 경쟁논리에 가탁하면서 서서히 영혼 없는 사회의 복제품이 되어간다. 소란스럽고, 무례하며, 폭력적인 이 모든 것들을 아이들은 온통 뒤집어쓰고 있다.”
아이들은 삶의 주인으로 존중받으며 성장하기는커녕 어른들, 사회의 그릇된 잣대에 길들여지고, 폭력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살아오고 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비판은 돌팔매를 맞기 십상이지만, 그는 이를 전혀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나아지지 않는 교육 현실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가치는 정녕 없는 것일까? ‘상처’를 응시하고, ‘자신의 삶’을 살도록 응원해야
#엄마보다고 내 아이게 오래 살게 하는 교육_송경영
박문희 , 『마주이야기』
희연이 이렇게 자꾸 말 안 들을 거야?/ 싫어! 싫어! 안 해./ 그러면 엄마는 이제 힘들어서, 희연이 다른 엄마한테 데려다 주고 다섯 살짜리 다른 아이 데려와서 키울 거야. 엄마가 예쁜 아이 봐 났어. / 그럼, 나도 다른 엄마 데려올 거야. 나도 예쁜 엄마 봐 났어.
‘마주이야기’는 ‘대화’의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다. 참 쉽고도 좋은 말이다. 박문희 선생님은 이오덕 선생님이 쓴 『우리 문장 쓰기』란 책에서 ‘마주이야기’란 말을 접했다. 그리고 곧바로 유치원 교육법으로 삼기 시작했다.’
‘아이들 말을 귀담아들어주면서 엄마, 아빠, 선생님이 쓰는 마주이야기 공책’이라고 써서 집으로 보낸 후, 그들이 써온 마주이야기를 읽고 아이들을 맘껏 칭찬해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주이야기 교육을 시작하면서 유치원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미술(만들기), 음악(악기), 체육(태권도), 발레’ 같은 ‘갖고 있는 특기까지도 죽게 만드는 특기 교육’이 사라졌다. ‘자기 말이 아닌 남의 말을 달달 외우게 하는 웅변, 동화 구현’이 사라졌다. ‘다른 나라 말을 배우느라고 엄청난 돈을 없애고 시간을 허비하고 피와 땀을 흘리고 본전도 찾지 못하면서 우리말까지 죽이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안달복달하는 영어 교육은 아예 시작하지도 않는다.
대신 구슬치기나 딱지치기 같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들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고, 아이들은 구슬치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수리력, 집중력, 창의력을 키운다.
못해서 주눅 드는 영어 대신 ‘지금까지 애써 가꾼 착한 삶이 터져 나오는 우리말’에 귀기울여주고 칭찬해주는 선생님들 덕분에 아이들은 자기 입에서 나온 말들을 글로 쓰고 그림도 그린다.
어른이면 누구나 알아야 할 교육의 기본
자기 말에 귀기울여주고 맞장구쳐주는 어른들이 한 명도 없는 아이들의 모습은 참 슬프고도 안쓰럽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미래를 위해서 희생하고 열심히 공부만 하라고 한다. 진짜 공부도 아닌 문제풀이 공부를.
“나는 일생동안 숙제를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집에 와선 내가 원하는 것을 했다. 다른 친구들이 (숙제) 문제를 푸는 동안, 난 지하실에서 나만의 실험에 푹 빠져 살았다. 내겐 꿈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 노벨화학상 로저 콘버그
민석아, 저 할머니가 90살 이래./ 우와! 그러면 100살까지도 살 수 있겠네/ 저 손주가 할머니 말을 잘 들어야 건강하게 오래 사실 수 있지/내가 엄마 말 잘 들어야 엄마 오래 살아?/ 그럼/ 그럼 엄마는 오래 살아도 나는 오래 못 살아/ 왜?/ 엄마 말만 들으려면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야 되는데, 공부하라 하면 공부해야 되고, 밥 먹으라면 밥 먹어야 되고, 하지 말라면 안 해야 되는데, 그럼 엄마는 오래 살아도 나는 오래 못 살아.
#질문을 멈춘 교사의 부끄러운 고백_신현수
『교사, 대안의 길을 묻다』
대안학교과 대안교육의 모든 것. 사실 풀무학교는 현재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대안학교과 대안교육, 대안교사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당과 같은 전통적 교육 방식에 대한 재발견. 가장 고전적인 견해가 바로 교학상장, 배운 다음에야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다음에야 자신의 문제점을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알고서야 스스로 반성할 수 있고, 문제점을 알고서야 스스로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가르침과 배움을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킨다.
#아이들 교육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부모들에게_김경숙
윤구병, 『꿈이 있는 공동체 학교』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희망
특히 교사가 명확하게 알지 못한 채 하는 독서교육은 자칫 종살이 훈련에나 도움을 주는 꼴이 된다고 경계한다. 아이들의 체험과 동떨어진 책을 억지로 읽힐 경우 그림자 삶이 되게 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아이들은 2세대 노동력이 아니다!_고영직
강수돌, 『나부터 교육혁명』
다른 세상을 만드는 ‘나부터’ 철학, 마을 이장, 고층아파트 건설 반대 운동 같은 ‘궂는 일’을 주동하는가 하면 초·중등아이들과 함께하는 글쓰기 교실을 여는 등의 작은 실천 사례들을 보라.
“좋은 실천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아리스토텔레스
#행복한 책읽기를 꿈꾸며_장현진
백화현, 『학교도서관에서 책 읽기』, 『책으로 크는 아이들』
##다른 나라의 교육
#가장 한국적인 교육 대안을 위하여_
교육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고민할 때 우리는 외국의 많은 사례를 가져와서 적용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지역적이고, 문화적인 특성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은 채 적용하기 때문에 많은 잘못을 야기해왔다. 국민들 역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화하는 교육과 입시의 정책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정보의 부족으로 많은 비용을 사교육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정체성부터 고민해야.
『덴마크 자유교육』을 읽으면서 그동안의 교육운동에 대한 나의 행보를 크게 반성했다. 한국에 대해서, 한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채 교육일 이야기해 왔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덴마크의 전환기에 그룬트비나 콜과 같은 교육운동가들은 스스로에 대해, 즉 엘리트가 아닌 덴마크의 농민과 평민에 대한 스스로의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교육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채 마구잡이로 경쟁하는 신자유주의식 교육으로 지쳐가고 있다. 나에 대하여 고민하기 이전에 ‘엄친아(엄마친구아들)’에게 경쟁심을 먼저 느끼는 한국 사회 속에서는 인생의 오래 달리기를 해야 할 어린 학생들이 초반부터 레이스를 이탈하고 싶어 한다.
덴마크에서는 민주교육이라는 자체가 학교 문화다.
자유롭게 자신들이 원하는 학교를 만드는 것을 허가한다고 한다…학부모와 학생들의 가치와 취향에 따라 다양한 학교가 존재한다…그러한 문화 속에서 성장한 아이들 역시 민주 시민으로서의 충분한 역량을 지니게 된다.
단순히 제도나 정책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학교라는 공간에서 민주시민교육이 가능하게 했는지를 읽어볼 수 있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우리에 대해 말하지 전에, 나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각기 독특한 특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자신을 하나의 인격으로 흥미롭게 발견하는 일은 전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만을 유일하게 흥미로운 존재라 여겨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그렇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된다 함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위의 대목은 덴마크 교육의 큰 획을 그은 그룬트비의 사상을 잘 설명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