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대안의 길을 묻다. 고병헌·김찬호·송순재·임정아·정승관·하태욱·한재훈. p536
대안교육을 위한 아홉 가지 성찰
#길 찾는 교사들에게
한국의 청소년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은?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은? 모두 학교다! 직업 1순위는 교사. 의사와 변호사도 경제 불황의 직격탄을 맞는 상황에서 교육대학은 의대나 법대만큼이나 경쟁이 치열하다.
선망의 직업, 교사들은 행복한 사람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괜찮은 봉급, 보장된 정년, 일년에 두 번씩 꼬박 돌아오는 방학이 없다면 그만둘 교사가 적지 않으리라.
황폐한 교육 현실을 걱정하면서 진정한 배움을 추구하는 운동이 대안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지 어느덧 십 년을 훌쩍 넘겼다…하지만 대안교육은 진정 잘 해 나가고 있는 것일까?
삶에 대한 최소한의 긴장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배움터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다부지게 성장하기 어렵다…교사의 열정과 헌신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교육의 근본 철학이 분명하지 않을 때 구체적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헷갈리고 엇나간다. 일부 대안학교에서 경험했듯이 사소한 차이가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되고 끝내 돌이킬 수 없는 분열로 이어지는 까닭도 처음에 함께 내세운 ‘대안’의 내용을 충실하게 다지고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이 책의 후속 연구가 진행된다면 가장 우선적인 주제가 바로 ‘대안적 교사대학’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교사는 과연 누구인가?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질문을 멈춘 교사, 그 사람은 더는 교사가 아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과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확인하면서 그 두 지점을 잇는 길을 찾지 않는다면 ‘대안’이라는 간판을 내려야 한다. 지금 대안학교들이 나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올바른 이름’을 찾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 행복한 교사, 그 행복에 전염되는 아이들, 지성의 경이로움을 일깨우면서 함께 성장하는 교실을 우리는 꿈꾼다.
어둠과 혼돈 속에서도 우리 교육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서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하게 ‘대안의 길을 묻는’ 모든 교사들에게 이 책을 받친다.
##대안적 교육을 꿈꾸며
#어떠한 교육이 삶을 변화시키는가
최근 교육의 방향에 대한, 좀더 근본적으로는 이 시대 한국 교육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이 심각해지고 있다…교육의 존재 이유에 대한 모든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앎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인문학자는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그렇게 행동해서도 안 된다. 그이 앎이 그의 삶으로 증명되지 못한다면, 그의 말이 그의 행동으로 표현되지 못한다면, 인문학자는 ‘앎을 통해 삶을 바꾼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그래서 교수(professeur)로서 배움의 장에서 말하는 자는 ‘말한 대로 살아야 하고’ 그 전에 ‘살아온 대로 말해야 한다.’ 인문학자의 경우에도 ‘앎을 추구하는’ 것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르침이 전적으로 교사의 몫이고 배움이 전적으로 학생의 몫일 때, 교육은 ‘지배자-교사’의 가치를 ‘피지배-학생’에게 주입하는 일 이상이 되지 못한다…현재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함께 ‘현장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노들야학’의 홈페이지 인사말에는 아주 인상적인 문장이 쓰여 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 여성이 했다는 이 말은 ‘현장인문학’ 프로그램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문장을 한 번 바꾸어보자.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우리를 가르치러 온 것이라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배움이 우리의 배움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공부해봅시다.’
‘교수 행위’를 하는 인문학자는 ‘배움의 공동체’ 일원이며, 그의 교수 행위 역시 자기 배움의 방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해방에 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해방을 구하는 광정에서이며, 누군가를 교육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배움을 통해서이다.
말한대로 살아야 하고, 그 전에 살아온 대로 말해야 한다.
모름지기 교육이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실현되어야 한다. 가르치려는 자가 이미 배운 것이어야 하며,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의 삶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크게 머리로 배운 것을 말로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로 깨달은 것을 가슴에서 숙성시켜서 몸으로 살아 보이는 교사가 있다…가르치는 자가 말하는 내용이 적어도 그 사람의 삶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는 것이어야 그 교육은 살아서 학생들의 가슴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가슴’이 빠진, 머리로만 가르치는 것이며, 따라서 ‘대안적 교육’을 말하려면 대안적 앎이 대안적 삶을 견인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은, 나누고 싶은 ‘절실한 삶’이 없으면 교육은 성립될 수 없다…그런데 우리 교육은 주로 ‘테크놀로지’에 의존한다. 이것이 문제다. 교육을 주로 공학적으로, 기술적으로만 접근하는 데에 우리 교육이 파행으로 치닫는 근본 이유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프로그램화되어야 할 로봇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역동적으로 고동치는 가슴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학생들을 가르치는 우리 교육에는 가슴이 없다.
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대안교육? 대안학교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가르치는 교사들도 자신들이 비판하는 기존 교육 체제의 교육 경험들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를 대할 때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 두 손을 얹으라 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또 가슴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한 대로 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학생으 삶을 견인할 수 있으려면 ‘말’이 아니라 교사의 ‘삶’을 활용해야 하고, 그래서 고대 현인들의 말처럼 “살아온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모든 대안학교 교육 방법의 근본 원칙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대안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앎을 실천하는 학교가 대안학교다’
#세계 대안학교들과 그 교육사상적 동기들
교사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 교사가 근무할 학교의 교육이념이다. 학교 교육이념의 성격에 따라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교사가 갖춰야 할 핵심적인 능력이나 자질, 품성 등이 무엇인지가 결정될 것이고, 이것은 다시 그러한 능력과 자질을 기르기 위한 교육과정의 중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간표를 보며 가장 가슴이 뜨금한 것은 문명에 대한 반성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근대문명이 빚어낸 소비와 소유의 욕구 충동,..생태계 교란으로 인한 숱한 문제들…시간표는 그에 대한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국어, 영어, 수학,…정말 이래도 된단 말인가…대안학교에서 말하는 대안은 도대체 무엇의 대안인가? 무엇을 대체하고 싶어서 대안학교를 하려했던 거지? 나는 왜 굳이 공립학교를 뛰쳐나와…대안학교를 세우려 했을까?…새로운 교육을 찾아 나선 것인데 지금에 와서 시간표를 보니 (일반) 학교에 있을 때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일관성과 철학, 삶과 통전된 앎을 그토록 갈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시간표는 내게 말한다. 그게 뭔데?(김희동)
대안학교들에 영향을 주었거나 앞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자유/ 사회·문화적 능력/ 사회·정치적 해방/ 전인성과 통섭적 연관 구조(고전적으로 페스탈로치가 ‘머리’와 ‘가슴’과 ‘손’의 조화로운 전개에 대해 설파한 바 있다)/ 종교와 영성/ 자연과 우주적 전망에 기초한 생태학/ 미와 예술/ 손과 노작활동(삶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창조적 행위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 작은 학교(학생들은 교사가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이런 곳에서 학생들은 비로소 인격적으로 존재한다)/ 독창성과 토착화(한국의 근대 공교육 체계는 대부분 일본과 서양, 특히 미국에서 온 것. 문제는 미국의 영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 점에서 제 혼과 제 삶에 입각한 교육을 추구하려는 것이 이 교육사상적 모티브의 핵심이다)
##교사교육의 ‘자기양성 원칙’의 교육적·시대적 이유
그러므로 교육의 요체는 스스로 훌륭하게 산다는 것, 즉 자신이 자신을 교육한다는 데에 귀착한다. 오직 이 방법에 의해서만 사람은 타인을 감화하고 교육할 수 있다. 특히 그것이 결부되어 있는 어린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어린이에 대해서 정직하고 자기의 마음 속에 일어난 일을 은폐하지 않는 것, 이것이 유일한 교육법이다.
‘교사는 궁극적으로 자기양성 과정을 통해서 교육된다’
#교육의 가치론적·교육적·시대적 의미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일’에 헌신한 이오덕은 교육이 다른 일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핵심적인 특징으로 ‘올바른 철학이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꼽았다.
“교육을 바라보는 바른 생각 없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
올바른 교육의 전제…여기에 더해 세상을, 그리고 함께 사는 세상의 미래를 올바르게 ‘희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요소가 첨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올바른 교육을 하려면 올바른 인간관, 세계관, 교육관이 세 발로 단단하게 지탱해줘여 한다. 왜냐하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바로 이 세 가지 요소에서 강하게 영향받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모름지기 인간의 탐구에서 시작한다는 페스탈로치의 신념은 교육 방법론에 대한 생각에서도 짙게 묻어난다. 개개의 어린이들이 처해 있는 처지나 상황에 대한 세심한 배려야말로 교육의 본질적 방법이며, ‘보편타당한 일반적 법칙’을 내세우는 ‘자연과학적 방법’은 교육학의 방법이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보편타당한 교육원리’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보편타당한 교육원리, 이런 것은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왜냐하면 이런한 교육원리는 어느 특정의 개인이 아니고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페스탈로치)
교육이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대상에 따라, 그 지역의 특성과 문화에 따라 그것에 적합한 교육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페스탈로치 교육 방법론의 핵심이다…한마디로, 페스탈로치가 생각하는 교육의 본질은 사랑이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행위는 실제로 어떤 모습을 띨까? 이오덕의 말로 표현하면 ‘믿음’이 아닐까 싶다.
간추리면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교육이 여기서 시작된다.
교육을 실천할 때 아이들을 믿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거짓이 된다. 그 모든 것이 아이들의 천품과 재능과 개성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노릇을 한다. 거꾸로 아이들을 믿으면 모든 교육 활동이 살아난다. 이런 활동을 하는 교사도 즐겁다. 훌륭한 교육 방법을 창조하는 슬기도 저절로 얻게 된다.(이오덕)
나는 듣고 나는 잊는다. 나는 보고 나는 기억한다. 나는 행하고 나는 이해한다.-닐
지식의 유일한 원천을 경험이다-아인슈타인
행동이 없는 배움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이다.-듀이
사람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 사람이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것을 도울 수 있을 뿐이다-갈릴레오
우리가 행하기 전에 배워야 할 것들은 행함으로써 배울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
교육의 모습? ‘학생’인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라고는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오로지 사고 치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황이 이쯤 되면 교육이라는 것이 꼭 받아야 하는 것인지…
교육이 전문(직업)교육이라면? 높은 소득을 보장하는 직장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헛공부’한 것이 된다. 실제로 ‘헛공부’한 학생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교육의 목적은 무엇이며, 또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의 삶의 모습은 어떨까?
‘삶을 위한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 ‘삶을 위한 교육’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실현하는 방식은 결국 ‘만남’을 통해서다. ‘교육은 만남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서양 속담에도 “배움은 만남에서 비롯된다It is when we meet someone that we learn something”는 말이 있는 것이다.
‘학(學)-습(習)’과 ‘습(習)-습(習)’의 만남
교육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알맹이가 ‘앎’이라고 할 때, 우선 ‘앎’과 ‘삶’이 만나야하면, ‘앎’과 ‘삶’이 만나는 것을 우리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즉 ‘학습(學習)’이라 표현한다. ‘배운 것’과 ‘사는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 ‘학습되었다’라고 표현한다.
반면 ‘교육(敎育)’은 ‘삶’과 ‘삶’의 만남을 뜻한다. ‘앎’과 ‘삶’이 만남인 ‘학습’이 개인의 내면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삶’과 ‘삶’의 만남인 ‘교육’은 사람 사이의 관계 차원의 것이다…교육이라는 것은 ‘말(言)’보다는 가르치는 사람의 삶과 그러한 삶의 모습을 뒤에서 ‘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의 삶이 만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토머스 프리드만,『세계는 평평하다』의 세계화의 시대 구분? 세계화1.0(국가의 세계화->국가의 양극화), 세계화2.0(기업의 세계화,다국적기업->기업의 양극화), 세계화3.0(개인의 세계화->개인의 양극화)
앨빈 토플러, 『부의 미래』. 농경사회(제1물결, 앎과 삶의 미분리 상태), 산업사회(제2물결, 삶터와 일터의 분리, 앎과 삶이 멀어짐, 삶과 앎의 통합 필요), 지식기반사회(제3물결, 일터가 앎터와 삶터를 흡수, 삶터와 일터의 조화로운 공존이 필요)
학문 영역간의 통합교육. 창조적 사고는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통합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전문화 추세가 가속화되면서 지식은 오히려 파편화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작 그것들의 기원이나 의미가 무엇인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이 분과학문의 틀을 고수하면서 기득권의 유지에 골몰하는 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교사의 보편적 능력들-파카사
파카사(PACASA)? Philosophy, abilities, knowledge, attitudes, skills, aptitudes
##대안교육 사상의 아홈 가지 범주
자유와 공동체/ 사회·정치적 해방/ 전인성과 통섭적 연관 구조/ 종교와 영성/ 자연과 우주적 전망에 기초한 생태학/ 미와 예술/ 손과 노작활동/ 작은 학교/독창성과 토착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하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래서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거주하는 자리는 삶에 있어 본질적이며, 농사와 제반 수공활동의 가치 역시 본질적이다. 그럼에도 인류 역사에서 노동과 수공활동은 그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 의미와 가치가 왜곡된 이유는 대부분 국가 정치의 지배 구조와, 특히 근대적 산업생산 체제에 기인한다.
서양 교육사에서 육체적 활동과 노동에 대한 획기적 전환점은 페스탈로치의 삼육론, 즉 “머리와 가슴과 손의 조화로운 발달”이라는 명제를 통해 본격적으로 처음 마련되었다.
비노바 바베는 현대교육이 노동과 지식을 구별하여 지식교육에 치중하는 것을 두 가지 점에서 치명적 결함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책만 보는 교육은 그것이 비록 지식 획득의 첩경이기는 하겠지만 정작 교육의 본혼이라 할 수 있는실제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봉에 관한 안내서로 벌치기에 관해서 조금은 알 수 있지만 실제 벌의 세계와 친숙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둘째, 공부와 노동의 분리가 사회적 불평등을 낳기 때문이다…이러한 오류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풀무농업고등학교-농촌에 뿌리 내린 ‘총합 학교’
처음에는 교훈을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학교’라고 했지만 그 뒤 ‘더불어 사는 평민’으로 …
‘진정한’ 평민이란 깨달음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실제적 능력과 더불어 살 줄 아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어떤 계층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깬’ 사람이 평민이다.
“평민은 진실 순박하고 근면하며 사랑 고민 슬픔 눈물이 많다. 겸손하고 부지런하며 이마에 땀을 흘려 하늘에 가깝다.”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는 농촌에 뿌리를 내리고 시작되었다. 그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이찬갑은 농촌을 “새로운 시대의 총아”가 될 것이라 보았다. 처음부터 그 뜻은 인간교육과 전인교육을 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
“일만 하면 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 지금 이 나라엔 소가 아니면 도깨비뿐이요, 인간은 없다.”
생활은 정신과 노동이라는 두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와도 같다.
한국 사례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 충남 홍성군 홍동면. http://www.poolmoo.or.kr
녹색대학의 대학원과정. 경남 함양군 백전면. http://www.green.ac.kr
윤구병의 변산공동체학교
조한규의 자연농업연구소와 자연농업생활학교. 충북 괴산군 청안면
고제순의 집짓기 흙집짓기 교육원 ‘흙처럼 아쉬람’.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cafe.daum.net/mudhouse
작은 학교. 학교의 규모가 중요한 까닭
“학교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은 군중의 바다에서 사라져버리거나 자신의 외로운 자아 속으로 숨어들어가 버리거나 할 도리밖에 없다. 오늘날의 많은 학교교육의 문제는 사실 학교의 인간적 규모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군중 속에서 사람은 아무 생각 없는 집단주의자가 되거나 극단적인 개인주의자가 될 도리밖에 없다. 이것이 소외 공간의 정신병적 불안에서 자기를 방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사람의 지식은 사회적으로 얻어진다…사람은 무엇보다도 사람과의 관계에 민감하다. 따라서 지식은 서로 인간적 교섭을 주고받는 일에 짜여 들어감으로써 생생한 느낌을 얻게 되는 것이다.”(김우창)
이러한 현대의 대규모 학교교육을 ‘횡포’로 규정하는 존 테일러 개토는 현대사회가 ‘대규모의 멍청함’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한다. 멍청한 사람은 시장조사자, 정부의 정책결정자들, 여론주도자들, 혹은 이익집단들이 심리적 조작을 하기에 아주 좋은 유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산업사회의 대규모 학교는 사고의 과정을 장려하기는커녕 개인의 타고난 정신의 힘을 씻어 없앤다. 현대의 학교는 사람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기보다 사람들을 분류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대 산업사회가 부추기는 사회는 크고, 빠르고, 많은 쪽으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는 사회다. 그 러나 유한한 환경 속에서 무한한 성장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새로운 학습의 방식’. “학교를 그만둔 것이지, 공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에요”라는 어는 탈학교 십대의 말에서 잘 드러나듯이 적지 않은 아이들이 계속 뭔가를 배우고 싶어한다.
21세기의 학교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어도 된다. 학교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관계망이며,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지적인 운동 그 자체이어야 한다. 정보 회로가 사방팔방으로 뚤려 있어 모두가 모두에게 통하는 네트워크 시대에 학교는 더 이상 어느 특정한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틀랜드의 ‘작은 학교’와 ‘인간적인 규모의 교육’
동양 전통의 ‘교학관’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를 성장시킨다’
“배운 다음에야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다음에야 자신의 문제점을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알고서야 스스로 반성할 수 있고, 문제점을 알고서야 스스로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가 서로을 성장시킨다’고 한다.”- 『예기』, ‘학기’편
스승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이면서도 죽는 날까지 스스로 ‘학인’으로 자처한다. 죽는 날까지 그는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지향하며 산다…나이가 들었다고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삶이 허락되는 그날까지 지금 이 순간과 오늘 이 하루를 그저 부지런히 그 길을 향해 갈 뿐이다. 이런한 삶의 태도는 그의 사회적 지위나 직업의 귀천과 같은 외적 조건들과는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여야 한다.
“덕이란 도를 행하고서 마음에 얻음이 있는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그저 입을 통해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스승의 몸을 통해 여과된 것으로서 전해질 때 제자들에게 살아 잇는 ‘생명수’가 될 수 있다.
공자와 퇴계를 통해 배우는 교사의 자기양성
공자의 가르침과 배움
“배우고 그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배움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보다 낫게 만들고, 작년의 나보다 올해의 나가 더욱 성숙될 수 있게 하는 절실한 길이다…”
‘배움’은 자신의 삶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사랑의 실천으로서 내 삶을 성숙하게 이끌어가는 힘이고, ‘나눔’은 내 배움이 나를 넘어 세상과 더불어 향기로워지는 이타적 사랑의 울림이며, ‘의연함’은 무거운 고독 속에서도 본질을 되묻는 기백으로 비겁하거나 비굴하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다.
사람들은 대개 부자가 되기 위해 삶의 거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러나 정작 부자가 되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부자가 구해서 될 일인지’에 대해 반문하고 있다. 만일 구한다고 얻는 것이 보장되는 부자가 아니라면, 공자는 자신의 소중한 삶을 기약 없는 부자 되는 일에 허비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고 단언한다. 공자가 말한 (제자 안연의) ‘즐거울 수 있는 가난’의 열쇠는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에 있었다…내 삶이 즐겁고 행복해지는 것을 갖는 것에 있어서 굳이 가난이 장애가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안연은 가난했지만 스승을 통해 다른 차원의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먼저 스승은 글을 통해 안연의 앎을 넓혀주었다. 앎을 넓혀준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다는 의미다. 가난이라는 삶의 무게에 겨워 발 밑만 보고 살던 제자는 배움을 통해 눈을 들어 지평선을 보게 되고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보게 되었다.
배움을 통한 앎의 확대는 근시안적 삶의 굴레를 넘어 과거을 성찰하고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희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앎은 실천으로 구현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기에 스승은 다시 제자를 예로 간추려주었다. 예는 실천을 전제로 한 규범이고 의식이며 문화다…스승은 제자의 앎을 넓혀주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그것을 실천의 차원으로 이어지도록 인도했다. 앎과 삶이 만났을 때 그의 삶은 실질적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것을 따뜻히 하고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면 스승이 될만하다.”-『논어』, ‘위정’
옛이란 지나간 시간을 살던 앞사람들이 남긴 지혜와 경험의 온축이다. 따라서 좋아할 만한 옛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지혜와 경험을 통해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도 되는 지점에서 오늘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오늘이 어떤 문제들로 힘들 때 옛은 우리들에게 어떤 것들을 경계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조언해주거나 지시해주는 소중한 보고다. 공자는 스승을 갖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옛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길러낸 것이다.
퇴계의 가르침과 배움
“삶과 죽음의 즈음이니 보지 않을 수 없다”…”평소 그릇된 식견으로 제군들과 강론을 하였는데 이 또한 쉽지만은 않는 일이었네.”-『간재집』, ‘계산기선록’
퇴계는 지인들이나 제자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회고하며 이야기할 때면 항상 ‘자신을 이끌어준 스승과 벗이 없던 데다 젊어서는 병마저 들어 귀중한 시간을 허송했다’는 점을 빠뜨리지 않는다.
“내가 어려서부터 비록 배움에 뜻을 두었으나 나를 계발시켜 줄 스승과 벗이 없어서, 수십 년 동안 방향을 잃은 채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지 어디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마음과 생각을 쓸모없이 낭비하였네…만일 스승과 벗에게서 희미한 길 위에서 또렷한 제시를 받았더라면 마음의 힘을 잘못 기울여 이렇게 늙도록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학봉집』, ‘퇴계선생언행록’
자기를 수양하려면 먼저 자기를 이겨야 하는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 즉 수기에 앞서 극기가 필요하다. 이겨야 할 대상으로서의 자기는 다름 아닌 ‘사사로움(私)’이라고 퇴계는 파악했다. 그래서 퇴계는 나와 사람들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사사로움’을 지적하면서, 성인이 되려는 주요한 이유는 이 사사로움을 극복하는 데 있음을 역설한다.
스승이란 나보다 먼저 도을 듣고 내게 그 도를 전해주는 분이다. 그리고 그 도는 스승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전대의 스승들에게 듣고 배워 얻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도를 전해줄 스승이 없던 퇴계로서는 경전 속의 성현들을 스승으로 삼아 스스로 그 도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통해 얻으신 것은 공허한 말에만 붙여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몸소 실행하려고 하셨다…그리하여 내면에 보존된 것은 순수하고 단단하면서도 깊고 두터웠으며, 바깥으로 발현되는 것은 따뜻하고 넉넉하면서도 빛나고 아름다웠다.-『문봉집』, ‘퇴계선생언행통술’
‘서당’을 통해 본 전통 교학의 실례
서당의 시간과 공간.”…그 시간표를 받아든 순간부터 나는 그 시간들이 지시하는 바에서 한 치도 어긋날 수 없었다. 나중에 대학에서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을 읽고서 알게 되었지만, 서당에서 배우고 자란 내게 시간표란 커다란 압박이자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서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자기 자신의 학습에 결정적인 영햑을 주는 경우는 계절이라는 큰 틀 안이다. 계절의 순환은 사람들로 하여금 옷만 바꿔 입도록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의 듣고 보는 것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느끼고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게 만든다…따라서 우리의 삶은 이러한 계절의 순환과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다.
자연은 명사가 아닌 동사나 형용사? 자연 속에서 자연을 느끼고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으면서 또 하나의 자연을 이루어가는 공부는 어쩌면 삶의 가장 본질적인 공부인지도 모르겠다.
전통은 문화재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실체로서 시대의 산물로 정형화된 것을 문화재라 한다면, 문화는 쉼 없이 사람들의 사유와 호흡하면서 변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 내지는 동사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문화를 이룩한 당대인들의 사유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전통을 문화재라고 하며 골동품 취급을 하고 심지어 폐기해야 할 낡은 것으로 치부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읽을 수 있는 눈마저 점점 잃게 되었고, 더는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 서려 있는 우리의 사유를 읽어내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문제 상황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는 우리의 자산을 스스로 유실한 슬픈 꼴이 되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대안적 교사대학 모형 탐색
머리, 가슴, 손의 조화
풀무학교의 ‘일소공도’? 일만 하면 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 ‘일도 하고 공부도 해서 인간이 되자’
풀무학교의 직업 십계
–준비는 길수록 좋다. 예수는 3년의 공적 생활을 위해 30년을 준비했다.
-학교는 직업 선택과 준비 기간으로 알되, 직업을 통해 일생 배우고 향상할 수 있어야 한다
-수입이나 명예보다 이웃사랑의 실천도를 기준으로 하라
-편한 곳보다 되도록 힘든 곳을 택하라. 그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
-인생을 어떻게 살까 큰 틀을 생각하고 직업문제를 채우도록 하라
-남이 닦아놓은 길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라
작은 학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다양한 소질과 능력이 피어나 스스로 배울 수 있게 돕고, 그들이 창조적 힘을 발휘하며 생활 속에서 인격적 만남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교 규모는 작아야 한다.
머리도, 꼬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