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히. p351. 1970
Deschooling Society. Ivan Illich 박홍규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강제적 학교화가 그들의 학습권을 제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비학교화’ 해야 한다)
학교를 통해서는 보편적 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획일적 교육)
***아이들에게 새로운 교육내용을 ‘주입’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현행 추세를, 그 정반대의 제도 추구, 즉 개개인의 삶의 모든 순간을 공부하고, 나누고, 돕는 순간으로 바꾸도록 고양시키는 교육 ‘망’ 형성으로 바꾸어야 한다.(교육에 대해 거꾸로 생각하는 사람들,대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개념)
학교를 폐지하자는 뜻!
학교는 ‘산업적 생산양식 자체의 존재방식’, 자율적인 공부를 교육으로 생각하는 사회로 전환 필요.
*단순한 학교교육 개혁론이 아니라, 현대 문명 전체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교육은 삶 전체의 문제!!!)
‘학교 없는 사회’?”말도 안 된다”-철저히 학교화-제도화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한국
*학교는 그들이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도록 ‘학교화’한다.-수업이 공부, 학년상승이 교육, 졸업장이 능력의 증거라 혼동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오해하게 된다
**가치의 제도화!!!-비물질적 요구가 물질적 상품의 수요
학교는 패러다임!!! 학교의 ‘숨은 교육과정’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현실 자체가 학교화됐다!
학교와 병원-스스로 공부함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고, 스스로 치료함은 무책임한 짓이며, 행정당국에 의해 비용이 지불되지 않는 주민조직은 공격적이거나 파괴적인 활동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능한 존재가 된다.
현대화된 빈곤-빈곤대책이 더 많은 빈곤을 만든다! 빈곤의 현대화는 세계적 현상으로서 현대 저발전의 근본원인이다
‘학교화된’ 사회의 사회복지분야 만든 오류!
교육적 불이익은 학교교육에 의존해서는 구제될 수 없다!
***현대적 빈곤-즉 시민들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머리로는 풍요하게 사는 것을 배우고 있다(소비의 ‘도약’)
미국 빈민들이 12년 학교교육의 혜택을 받기 때문에 무능화돼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미의 빈민은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없어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뒤쳐져 있다.
평등의무교육은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립대학교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세금에서 나온 재정에 의존한다
강제적인 학교화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양극화한다(국제적인 차별제도로 계급화)
학교의 역설은 분명하다(사회의 계급화)
학교확장은 군비확장과 마찬가지로 파괴적인 것이지만 그만큼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영혼의 구제와 교회의 동일시(교육과 학교)
***공부와 정의는 학교교육에 의해 증진되지 않는다.
학교는 기회의 평등 대신, 기회의 배분을 독점해왔다.(대부분이 사람들은 그 지식의 대부분을 학교 밖에서 얻는다,대부분 공부는 우연히 얻는 것)
공부는 가르침의 결과라는 환상!
현재 학교는 대부분의 교육재정을 독점.
기능교사 부족 이유? 자격증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
*학교가 기능교육에 효과적이지 못한 이유는, 특히 그것이 교육과정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공동체가 축적해 온 기억이 있다)
학교가 우리에게 심어준 공포
***학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안은, 자신이 현재 관심을 갖는 일을 타인과 공유하는 동일 기회를 각자에게 부여한 망이나 서비스일 것이다
정말 간단한 일! 그들이 모이게 하는 동기를 개인에게 맡기는 것이다.
*배우고 가르치는 능력을 행사한다는 모든 사람의 평등한 권리는, 지금 자격증 있는 교사에 의해 점유돼 있다
*비학교화된 사회란 우연적이고 비공식적인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뜻한다!
중세마을, 대부분의 교육은 평생 지속, 계획적이지 않았다(현대사회는 의식적 계획의 결과)
*참된 교육을 하는 사회를 이룩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우리의 상상력이 “완전히 학교화된 것”이다!
지금 학교에서 소멸되고 있는 것은 교육 그 자체다!(기독교신앙의 세속화)
학교는 사람을 연령에 따라 집단화한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들은 학교 밖에서 배운 것들이다
빈민 부모는 자녀들이 배우는 것보다 자녀들이 얻을 자격증이나 수입에 더 관심이 있다!
빈민은 학교를 통해서만 구원이 부여된다는 믿음에 복종하여 그들의 자존심을 잃게 된다(위조된 희망!)
*학교는 학교교사를 위한 직업을 제공한다
세속의 목사인 교사!!!(교황의 삼중관)
방학-규칙적 방생!
대학교 졸업생은 세계의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선택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학교화돼왔다
학위는 언제나 그 소비자의 이력에 불변의 가격표로 남는다
제도화된 가치의 신화-일단 독학자가 불신을 받게 되면, 모든 비전문적 활동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변한다!(성적과 졸업장으로 문서화된 가치)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여’에 의해 가장 잘 공부한다!
‘수업’은 상상력의 지평을 질식시킨다
*학교가 주입한 제도화된 가치란 수량화된 가치다! 인간의 성장이란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무엇이든 측정화해야 한다고 학교화된 사람들은 측정할 수 없는 경험을 놓치게 된다.-측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부수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 돼버린다
학교화된 세계에서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소비자 지표로 포장돼 있다!
***학교는 교육과정을 팔고 있다
토인비는 위대한 문화가 쇠퇴할 때 항상 새로운 종교가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학교는 현대의 쇠퇴해가는 문화에 대한 새로운 세계종교로 매우 적합해 보인다.
학교는 ‘새로운 세계종교’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노동시장이다.(소비자의 공학은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경제영역)
인간을 규칙 바른 소비행동자로 만들고자 하는 거대 기업에 자본과 노동이 더욱더 집중되고 있다
‘새로운 세계종교’는 지식산업
우리는 모두 소비와 생산의 측면에서 학교화에 젖어 있다
학교는 길드, 공장,주식회사를 이은 새로운 기업 중에서 최고의 보기(최대의 고용자이자 가장 익명적인 고용자) 피라미드
학교에서 시작된 인간 조작도 벌써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학교가 경제의 중요한 자원인 진보적 소비자를 형성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의례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 필연적인 사회적 결과, 즉 소수의 특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품과 서비스를 모든 사람이 더욱더 바라게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잘못된 공익사업!! 고속도로의 본질과 참된 공익사업의 본질을 구분해야 한다-고속도로는 사적인 영역이면서도 그 비용은 공공기관에서 슬쩍 지출된다.(자가용의 사치품으로 봉사한다)
주로 학교가 사람을 현대적인 생산자와 소비자로 만든다
**모든 ‘잘못된 공익사업’ 중에서도 가장 교활한 것이 학교다!(언뜻 보기에 평등)
*학교는 완전한 역진세제로, 그 특권을 부여받은 졸업자들이 모든 납세자들의 등에 타고 있다!(학교 탈락자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다)
부조리한 일관성! 농민들은 그런 불가사의한 논리로 그가 가진 가축의 값을 정하는 권리를 갖는 자를 보고, 자신의 무력감에 분명 놀랐을 것이다.
*완벽하게 교육적인 자유로운 언론, 자유로운 집회, 자유로운 보도를 가능하게 하는 현대기술을 이용해야 한다(WEB)
필요한 것은 공중이 쉽게 이용할 수 있고, 공부와 수업에 동등한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네트워크다!(웹/인터넷)
학습에 필요한 네 가지 자원-사물, 모델, 친구, 연장자
“너무나도 장식화된 물건만을” 파는 점에 놀랐다(뉴욕 방문 멕시코 부인)
교사는 그가 전문적 도구라고 간주하는 교과서를 잃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한다
놀이는 자유교육의 특별 형태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학교가 갖는 위험은 경찰, 소방서, 오락산업에서 도제제도가 갖는 위험보다도 쉽게 과소평가됐다. 학교를 최소한 청소년 보호수단으로 정당화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기능 모델’-기능을 소유하고 그 실행을 기꺼이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기능교환)
교육시장에서 기능을 희소하게 만드는 이유-기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면허증을 통해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면 가르칠 수 없다고 하는 제도적 제약이 있기 때문!
**교사에게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함은, 기술을 희소하게 만드는 또 다른 방법이다!(기능교사는 봉사하도록 장려해야)
동료연결 네트워크의 작동은 단순하다
‘도심지’ 제국주의
비학교화된 사회에서 전문가는 더 이상 그들이 받은 교육에 근거해 그 고객에게 신뢰를 요구할 수 없다(자격증불필요)
네트워크 운영자들이 무엇보다도 자원에 접근하게 하는 길의 건설과 유지에 집중하는 반면, 교육자는 학생이 그의 목표에 가장 빨리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에피메데우스적 인간의 부활!
***희망이 쇠퇴하고 기대가 증대해가는 역사, 희망이란 자연의 선을 신뢰하는 것, 기대란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통제된 결과에 의존하는 것
원시인은 희망의 세계에 살았다. 고대 그리스인은 희망을 기대로 바꾸기 시작했다(프로메테우스의 에피메테우스 형제)
영원한 갈증과 허기! 수요가 끝없이 증대되는 세계는 단지 불행이 아니라 지옥이라고만 말할 수 있다.(욕구의 불만)
현실 그 자체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 만들어져왔다.
** 군사용어로 안전이라고 함은, 지구를 없앨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비군사적인 제도에 가로놓인 모순도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만족을 창출하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필요를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낳는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지구를 소비하고 있다
녹색혁명! 현대 농업은 토양을 악화시키고 고갈시킨다
대기의 산소를 그것이 보충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빨리 소비하게 되리라
그 결과는 세계의 소멸일 뿐이다!
군대제도는 명백히 모순이다. 그러나 비군사적 제도의 모순을 직시하기란 더욱 어렵다. 그것은 냉혹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더욱 무섭다.
오늘날에는 오로지 인간의 계획만이…
***제도의 목표는 제도의 생산물과 계속 부딪친다-빈곤퇴치 계획은 더 많은 빈곤을, 아시아 전쟁은 더 많은 베트공을, 기술원조는 더 많은 저개발을 낳았다. 학교는 더 많은 탈락자를, 한 종류의 오염 억제는 다른 오염 증가를 (광범위한 역기능 현상 증가)
학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와 같은 사회가 필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선전기관이다
(이처럼 만족할줄 모르는 풍조 조장! 이러한 소비자의 풍조야말로 프로메테우스적 오류의 핵심!!!)
전 세계적인 규모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가치의 비제도화에 의존한다!
—옮긴이 해설
일리히는 “이놈의 학교 없어져야지”라고 말했던 것이 정말 옳고, 정말 학교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
잘 준비되고 지원된 극소수의 청소년만이 일류대학에, 나머지는 강요된 수업에 의해 학습 의지를 포기, 평생 낙오자로 살게 만드는 학교는 없애야 한다
*스스로 걷고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자가용이나 병원에 의해 타율화됐듯이 우리의 모든 고유한 능력이 타율화돼 사회 자체를 자율적인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교회나 절에서 신부나 목사나 중을 통해야 신을 믿는 것처럼 생각하게 됐다. 역사로 보면 그런 신앙의 타율화로부터 모든 타율화가 시작됐다. 따라서 서양의 역사란 기독교 제도화 내지 타락의 역사이자 인간의 자율적 공생을 대신한 타율적 제도의 역사다
병원이 건강의 장애물이 되고, 교통수단이 이동의 장애물이 되며, 경찰은 사회정의 실현의 장애물, 정당은 민주정치의 장애물, 언론기관은 의사소통의 장애물이 되어버린 오늘의 현대 문명에서 학교는 제도화되어 그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장애물이 된 대표적 사례다.
공부는 타인에 의해 조작될 필요가 거의 없는 인간 활동으로, 모든 공부는 수업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들은 학교 밖에서 배운 것들이다. 학생은 교사 없이, 가끔은 교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배운다.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학교 밖에서 배운다.
‘학교 없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교 자체에 대해서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는 학교절대화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의 엄청난 교육문제는 아이들의 인권인 교육권의 침해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학교교육이란 20세기 들어와서 일반화된 것에 불과하다!
“미국사람들이란 그렇게도 많은 학교를 필요로 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들뿐인가?” “그렇게도 많은 약을 필요로 하니 모조리 크게 병든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파괴하는 최상의(아니 최악의) 방법이 학교교육!
그들은 교육이란 이미 특권을 지니고 태어난 극소수의 특권을 더욱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본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CIDOC 일리히가 운영한 대학
월급은 커녕 돈을 내고 얘기했다, 일년만에 두세가지 외국어 습득, 일을 통해 배운 것
*나에게 그 감동은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회 전체가 가장 극단적으로, 가장 포괄적으로, 가장 철저히 학교화되고 전문화된 곳이 한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탓이었다
교육중독증!!
일리히는 가장 철저한 학교철폐론자다
한국의 여러 정책도 학교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일제시대, 독재정권)
학교교육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체제의 가장 효율적인 교화수단이었다
한국만큼 학교가 많은 나라도 없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자율적으로 살아오다가 별안간 모든 것이 철저히 제도에 의존하는 세계에 살게 됐다. 바로 일제 이후였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학교교육 때문이었다!
본래적인 자율성 자체를 상실하는 위기!
학교는 군대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학교에 대해, 학교화된 사회에 대해, 학교화된 문명에 대해 속시원히 근본적으로 말해주는 전무후무한 책!!!
[병원이 병을 만든다1987]
[그림자 노동1988]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1990]
학교는 현대의 종교다. 교회는 지상에서 착취받는 자들에게 천국을 약속한다. 학교는 교육을 통한 평등을 약속한다. 교회와 학교는 실제로 극소수에게 이익을 부여하나 평등의 환상을 심어준다.
교육은 경제적 착취를 합리화한다.
학교는 교육의 장애물, 병원은 건강의 장애물, 근대화가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빈곤을 극대화
아파트 주부, 가사는 소비를 조직화하여 사회적 생산의 성장을 재촉한다. 남편은 밖에 나가서 생산하고 아내는 안에서 소비한다!
여성의 가사노동은 그림자 노동의 원형이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라고 하는 것보다 반국가주의나 ‘자율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아나키즘의 핵심은 자유, 국가는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법률을 통하여 개인의 자유를 파괴한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과 자유이다.”-톨스토이
“지식이란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수많은 하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간디
‘수많은 노예를 생산하는 공장’, 노예가 아닌 자립하는 인간을 키우는 것이 교육의 목표여야 한다
“오늘날 교육은 아주 광범한 분야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일+교육’이 아니라 ‘일=교육’이어야 한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전문직’이라고 부른 외부경제에 의해 지역의 학교교육은 지역사회의 경제를 파괴한다. “학교는 정부의 경제와 경제의 정부에 봉사한다.”
***전문직의 경제에 의해 이익을 얻는 극소수의 인간들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역의 지식과 기억을 상실 당한다.
“진보를 위해서, 아직은 값싼 대가다” 무시
*학교교육의 결과 세계는 하나의 단일문화로 획일화되고 있다!(어디서나 영어교육 확대)
일리히가 말했듯이 1950~70년 사이에 “매년 50개의 언어가 없어졌고 1950년 단계에 말해진 언어의 반은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서만 살아남았다.”(학교교육의 결과?!)
일리히는 교육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란 ‘호모 에코노믹스’ 즉 경제인임을 밝혔다.
하고자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행함doing’에 의해 ‘공부한다learning’, 그밖에는 달리 공부하는 방법이 없다
청소년을 학교교육의 공포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우리가 이미 보아온 대로 사회 양극화, 물질적 오염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학교 철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교육의 본질은 삶에 있다!!
“학교 없는 사회 | 참교육”에 대한 15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