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들어온 권정생. 똘배어린이문학회. p226
동화로 만나는 삶 속의 인문학
똘배어린이문학회? 어린이문학을 공부하는 모임, 어린이도서연구회 회원 모임
권정생 동화를 읽는 세월 속에서 권정생 선생님는 세상을 떠나시고, 부모님들도 한 분 두 분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우리는 몸도 아프고, 더러 마음을 다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권정생을 읽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다시 만나지는 것들, 다시 깨달아지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글을 썼습니다. 우리의 책을 시작으로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권정생을 읽고 거기서 받은 위로와 힘을 서로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똘배’가 걸어온 길
씨앗은 처음에는 아주 단단합니다. 단단하던 것이 풀어져야 새싹이 터져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도 처음에는 아주 단단하기만 했습니다. 이때 모임 글을 보면 참으로 비장합니다…어깨에 힘이 꽉 들어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동화를 좋아할까요? 그것은 동심에 대한 그리움이고 사람의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동화의 단순함은 우리 삶을 분명하게 비춰 주고, 쉽게 읽히는 동화가 오히려 숨겨 놓았던 어려운 이야기를 솔직하고 편하게 꺼내어 줍니다. 그래서 동화를 읽고 싶고 좋은 동화를 만나면 알리고 싶습니다.
2007년은 권정생의 죽음으로 기억되는 해입니다. 권정생 동화에서 죽음은 슬프고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슬픔은 너무나도 컸지만 권정생의 죽음은 그의 동화 속에서 삶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익은 정도가 각자 다르고 색과 맛도 다른 똘배들? ‘다름’은 당연하고 바람직합니다. 다르니까 지루하거나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속에서 하나로 통하는 것도 있습니다. 종교, 어린이, 자연, 가난한 삶, 통일, 전쟁 등 그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바닥에 깔린 것은 권정생 동화에서 얻은 생각과 힘입니다. 함께 동화를 읽고 글을 쓰면서 얻은 힘입니다.
고단한 취미, 그래도 해야 하는 까닭? 이제는 똘배들을 만나서 하는 속풀이 수다에 중독이 되었고 똘배 일이라고 하면서 부엌에서 도망칠 수 있는 자유에 맛이 들렸으며 글로써 나를 표현하는 즐거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선물상자에 멋지게 담기는 비싼 배보다 단단한 껍질 속에 모아 놓았던 한 모금의 단물로 누군가의 마른입을 적셔 주는 똘배가 더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똘배어린이문학회의 발자취?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학을 통해, 권정생을 통해 우리는 소박하게나마 역사와 철학을 통찰하며 인문학 공부에 다가가는 중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우리는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세상을 보는 눈을 다시 틔우고 있습니다.
글쓰기라는 소중한 선물
글을 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들여다보는 용기와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었다…나 자신과 소통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지난 3년은 동화 속에서 똘배와 함께 ‘나’를 찾아다닌 시간이었다. 앞으로의 3년간은 동화 속에서 똘배와 같이 이웃과 세상을 찾아보고 싶다. 안으로만 향해 있는 나의 눈을 밖으로도 돌려 보고 싶다. 똘배는 기꺼이 나의 길잘이가 되어 줄 것이다.
권정생 동화에서 말하고 싶은 ‘평화’ ‘함께하는 삶’을 위해서는 전쟁 아닌 전쟁이 필요하다. 나 자신과의 싸움 말이다. 자신과의 싸움 없이는 진정한 평화는 없다. 나는 권정생 동화를 읽고 ‘똘배’ 모임 사람들과 함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 어떤 것인지 배웠다. 그들의 삶이 바로 나의 거울이었다.
*슬픔과 만나려고 권정생을 읽는다
권정생의 수기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를 읽으면서 나는 너무도 외롭고 슬픈 이십여 년을 살아온 청년 권정생이 흘린 눈물에 푹 절여졌다. 그리고 이어서 읽은 [강아지똥]에서 가슴에 별의 씨앗을 심는 권정생을 보았다. “내가 거름이 되어 별처럼 도운 꽃이 피어난다면, 온몬을 녹여 네 살이 될게”라는 강아지똥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동화로 인문학을 만나다
권정생 동화는 내게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질문하고 답해 준다. 나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그린 권정생 동화를 읽으면서도 정작 우리 아버지가 이산가족이었고 평생 외로움을 안고 사신 분이라는 건 크게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신 적이 없다.
동화 속에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 동화는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왜 아파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다 얘기해 준다.
#내 삶에 들어온 권정생
*우리의 밥이 되신 권정생 선생님
먹고 산다는 것은 다른 목숨을 먹는 일이고 슬픔을 저지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 목숨들의 운명이고 의무입니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슬픔을 줄이며 살고 싶습니다….돌이 토끼처럼 슬픔 하나 저지르지도 못하고 살다 죽어 바람, 물, 흙 되신 권정생 선생님!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 가슴에 품었을 소망은 지금 우리 가슴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살아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권정생 선생님을 어쩔 수 없이 밥으로 먹고 삽니다. 오늘 저는 선생님을 밥으로 먹고 기꺼이 다른 이의 밥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사람이 보이는 동화
*내겐 너무도 어려운 권정생 선생님
선생님은 글로, 삶으로 바르게 살아갈 길을 일러 주셨지만 나는 흉내조차 내기 어렵다. 오히려 아닌 본 척하고픈 마음이다. 나는 자동차가 주는 편리함이 좋고, 온갖 먹을거리 앞에서 즐겁고, 경쟁에서 이기는 쾌감에 익숙하다. 아이들에게 선생님 책을 쥐어 주고 읽으라 하면서도 아이들이 그 글처럼 살게 내버려 두진 않는다…선생님이 콕 집어 나에게 뭐라 하지 않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다. 왠지 그분 앞에 서면 욕심 많다고 야단맞을 것 같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혼쭐이 날 것 같고, 너무 소란스럽다고 쫓겨날 것만 같다.
*다시 잘 보면 다르게 보인다_[밥데기 죽데기]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보는 안목이 깊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시류에 영합하는 눈만 생겼다. 여러 사회구조적인 불합리성을 배제한 채 그 사람이 가진 것, 배운 것, 누리는 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그것이 곧 그사람의 됨됨이라고 여길 때도 많다. 그냥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보는 거다. 게다가 내게는 나와 생각이 비슷하면 괜찮은 사람이고, 나와 조금 다르면 별로인 사람이고, 아주 다르면 이상한 사람으로 몰고 가는 고약함까지도 있다.
동화 속 여인들,탑이 아주머니. 똬리골댁, 용이 할머니 이야기? 여전히 유의미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바보가 더 필요한 세상_[종달이네 아저찌]
“어머니, 밭을 하나 나눠 주고 나니 참 마음이 즐겁지요?”
지금은 내 것을 조건 없이 내어줄 수 있는 바보, 사람 사는 이치대로 살아가는 그런 바보들이 참 많이 필요한 세상이다.
발 한 뙤기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뙤기/ 논 한 뙤기/ 그걸 모두/ ‘내’ 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느님도/ ‘내’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되고
밭 한 뙤기/ 돌맹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옆집에 없다
“하느님, 올해도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고민 끝에 가난한 옆집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 힘도, 기적도 베풀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있었을 뿐이다. 나도 생각해 본다. 하느님이 내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 끔찍하다. 모두의 기도가 이루어진 세상!
*미리 써 놓은 유언장_[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이야기를 다시 읽자니, 선생님에게 동화를 쓰는 일이란 바로 우리에게 종을 울리는 일이었음을 알겠습니다. 종이 울리면 멈춰야 합니다. 옷깃을 여미고 뒤돌아 봐야 합니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뒤돌아서지 않으면 모두 전쟁이라고…그런데 아무도 종소리를 듣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모두들 선생님을 안다고 하지만 선생님이 울리는 종소리는 듣지 않습니다.
내가 닮긴 글을 쓰는 것은 바닷가에서 나와 닮은 조개를 찾아야 하는 숙제처럼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계속 하다 보니 나와 비슷한 조개들을 많이 찾았습니다. 책을 내는 일은 흩어 놓았던 나를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실에 꿰어 나를 보닌 그런대로 정이 갑니다.
생쥐의 몸짓은 죽어가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아저씨의 믿음이고, 아픈 몸 때문에 뛰어나가서 싸우지 못하는 아저씨의 한풀이다. 깨어난 아저씨는 덤빈다. 소비에트 배추 먹은 것만 아니고 레닌 바람도 마시고 마르크스 방귀도 마셧다고 소리친다. 마르크스가 방귀를 뀌고 그 방귀는 바람을 타고 와서 아저씨가 마시고 아저씨가 뀐 방귀는 생쥐가 마시고 이렇게 지구에 있는 건 뭐든지 아무리 막아도 바람을 타고 퍼진다고 한다. 총칼을 들고 있는 똥도둑놈들은 이 바람을 절대 막을 수 없다. 아저씨의 방귀를 막을 수 없다. 착하고 허술한 아저씨는 총칼 앞에서도 자유로운 진짜 센 사람이다.
권정생은 80년대 군부독재 시대에 밖으로 뛰어나가 직접 싸우지 못하는 답답하고 초라한 자신을 비웃고 있다. 잔인한 권력에 대한 분노와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부끄러움을 웃으면서 말하고 있다. 권정생은 역사의 발전적인 진화를 역행하는 미개한 80년대를 보면서 너무 기박히고 답답해서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에서 눈물과 분노를 웃음으로 풀어내는 권정생에게 반했다. 어려운 문제들도 재미있게 시야기해 주니 참 쉽고 편하게 풀렸다.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를 읽는 시간이 내게는 즐거운 반성의 시간이다. 올곧으면서 재미있는 친구를 만나 웃으면서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행복한 시간이다.
*강아지똥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랑랑별
권정생의 마지막 동화, [랑랑별 때떄롱]
나는 권정생의 처음 동화 [강아지똥]이 구너정생의 마지막 동화 [랑랑별 때때롱]에 담겨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랑랑별은 강아지똥이 바라보았던 노란별이다. 강아지똥이 꿈꿨던 아름다운 별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권정생의 소망이 이뤄지는 별이다.
*’거지’ 권정생을 위한 진혼곡_[어느 주검들이 한 이야기]
*종지기 아저씨
권정생이 맨손으로 한번 한번 종줄을 잡아당겨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려고 정성을 들이는 것은 “깨끗한 하늘에 수없이 빛나는 별들과 종소리라 한데 어울려 더없이 성스럽게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지는 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또 그가 바라는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전쟁 때문에 분단 때문에 주림 때문에 슬프고 괴로운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새벽마다 종을 치며 기도를 드리는 일, 그리고 글을 쓰는 일뿐이었다.
“한 마리 벌레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것은 결국 조물주가 만든 이 우주의 한 식구라는 생각”, 고마운 동물 친구들, 생쥐, 토끼, 참새, 개구리들인데 그중에 생쥐는 둘도 없는 동무였다.
[다람쥐 동산]에서 아기 다람쥐들은 울타리에 구멍을 내어 통일하였고, [바닷가 아이들]에서는 남북아이들은 감자를 먹으며 통일하였다. 이 간단한 걸 못해서 우리는 60년이 훨씬 넘도록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권정생은 “복잡한 것은 모두가 가짜”라고 했다. 복잡하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모두 다 가짜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종지기 아저씨’ 답은 언제나 간단명료하다.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모두 다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바닷가의 아이들] 쓰고 나서 10년이 지난 1988년에야 발표? 소년 영웅 이승복 군의 반공 이야기가 교과서에서부터 잡지, 만화책에까지 많은 사람드의 손으로 작품화되어 아이들에게 읽히고 있던 때여서 ‘바닷가의 아이들’은 한층 위험스러운 작품이었을지도 모릅니다…돌이켜 보면 지난 사십 년 동안 이 반공이라는 지휘봉 하나로 모두가 하나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었습니다. 교육자도, 성직이라 하는 종교지도자도, 예술인도, 문학이도, 그 지휘봉에 따라 똑같이 지옥으로 치달았던 것입니다.-머릿말, [바닷가의 아이들] 1988
*[슬픈 양파 농사]를 읽고
한살림. 유해식품을 안 먹겠다고 동네 가게에 발길을 끊고 한살림에서 무공해 식품을 잔뜩 사다 놓고는 밤새 괴로워하고 화도 났던 것이다
진짜 한살림은 이웃끼리 마을사람끼리 서로 사고 팔고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 되는데 가까운 이웃은 다 버리고 먼 데서 깨끗한 음식만 먹겠다고 한 것이 정말 잘한 것일까? 먹는 것만 깨끗하게 먹는다고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일까? 정말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무공해는 먼저 사람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정말 요즘 세상에 무해한 것이 있을까 싶다. 그것을 고른다는 것조차 어리석은 게 아닐까?
…차라리 죽을 때 죽더라도 이웃집에서, 가까운 장터에서 쌀도 사고 밀가루도 사고 국수도 사는 게 옳지 않을까?
마음 편한 게 위장 편한 것보다 더 소중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권정생 문학기행
*여전히 그곳에 있는 몽실 언니들_안동 조탑리를 다녀와서
*[초가집이 있던 마을] 문학기행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시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