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독 벗어나기. 강수돌. p237
‘범생이 콤플렉스’를 벗어나 ‘반쪽의 범생이와 반쪽의 문제아‘가 되라!
중독이란 원래 질병의 일종이다
노동종속성? 일과의 일종의 강제 관계!(내면화된 자기 강제)
일중독자와 열심히 일하는 건강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미루어버릴 수 있는가 여부”-페터 베르거, 독일 신경정신과 의사
성실한 사람, 모범적인 사람? 중독은 사회적으로 조장되거나 은폐되는 특수성이 있다!(노동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노동에 대한 ‘사회적 강제’가 작동하고 있어 노동 없는 삶의 대안을 생각하기는 더욱 어렵다)
***“모든 중독증의 뿌리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불충분한 성취의 두려움(프리랜서형)/ 몰락의 두려움(블루칼라형)/ 무능의 탄로에 대한 두려움(햄릿형)
자신의 내면에서 느끼는 각종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적극 관통해 정면으로 넘어가고자 하기보다는 그것을 은폐, 추방, 억압, 축출하는 등의 방법으로 회피한다. 그 회피의 한 방편으로 일중독이 나타난다. 즉 일중독이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2 일중독에 관한 이론
중독? 뇌의 활동 왜곡되어 환각이나 강력한 각성 효과, 진통 효과 등이 발생한다!
일중독? 일 자체나 성과가 일종의 마약 역할!
정치경제학적 접근에서 일중독은 자본의 산물이자 자본의 토대다. 나아가 자본 자체가 중독 체제이다(하이데)
자본주의는 일중독뿐만 아니라 소비중독을 먹고 산다.
자본관계의 변화 없이 일중독의 치유는 불가능하다!
공동체적 유대감과 생동하는 모든 존재와의 연대를 고양할 때 비로소 일중독도 극복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일중독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의 체계적 경험과 내면적 자율성의 결핍에 따라 생기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방어’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
#3 일중독의 역사적 근원
땅과 사람의 분리, 내면과 외면의 분리
중세 종교 비판하면서 등장한 신교(프로테스탄트)
탈영성화란 인간이 보다 큰 우주의 일부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 주인 또는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이다.
일중독의 역사적 과정이란 자본주의 형성, 발전 과정에서 인간이 진정한 자아(내면)와 분리되는 탈영성화가 일어나는 것이 핵심이다.
***진정한 자아와 분리, 외적 정체성을 추구하게 된 원인? ‘공격자와 동일시‘ 개념-정신적 충격(트라우마) 때문이다
물질적 보상, 외적 성취에 몰입-자신을 공격하는 시스템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공격자와 동일시)
어른들은 아이들과 ‘조건없는 사랑’으로 기쁨을 나누기보다 “이 아이가 나중에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아야 성공할 것인가?”란 관점에서 교육시켜 노동시장으로 내보낸다.
“땅 파기 싫으면 공부해라”
바로 이런 가치관이야말로 땅과 사람의 분리, 내면과 외면의 분리를 부채질하며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일이 아닌가? 도대체 이런 가치관의 역사적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한반도의 근현대사: ‘강자와의 동일시’의 역사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서양 제국주의 및 일본 제국주의와의 폭력적 관계 속에서 전통적인 삶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강자와의 동일시’라는 집단의식이 급부상했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제국주의적인 백인의 행태를 비판하기보다는 멸종해가는 인디언들이 “대대로 게으르고 학습 능력이 없으며 야만적”이라며 나무란다.
친일 논리나 독립 논리를 가리지 않고 뿌리를 뻗어간 개화기 사상? 부국강병의 논리!!
‘놀지 말자, 흥사단의 ‘무실역행’ 사상, “우리가 할 일이 많은 줄 압니다. 물산 장려도 해야 되고, 문화 운동도 해야 하고, 발명도 힘써야 하고, 할 일이 많지요…”
요컨대, 이 모든 생각들의 바탕에는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깔려 있다!
해방 직후 미군? 유일한 목적은 미국과 미국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것을 박멸하고 미국 자본주의 확산의 토대를 닦는 일이 었더. 그 이후 전국노돌조합평의회(전평) 등 온갖 진보세력들을 물리적으로 탄압했아며 마침내 한국전쟁과정을 통해 최소한 남한에서나마 저항세력을 일소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은 남한 사회에 심층적 상흔을 남기는 데 충분했으며 그 결과 일종의 생존전략으로 ‘강자와 동일시’를 강화하게 된다. 그 한 결과가 반공 히스테리, 즉 레드 컴플렉스로 나타났다(하이데)
새마을운동, 경제개발(산업화)?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을 자본주의 산업화(국익)에 동원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자본주의 산업화 체제야말로 ‘강자’가 되는 지름길이자 ‘강자’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외국 학자들이 서양에서 수백 년 동안에 가능했던 놀라운 경제성장을 단 30년 만에 가능하게 만든 1960~1980년대의 한국 노동자들을 보고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한다’라는 뜻의 ‘산업전사’라고 했겠는가?
근면한 노동이 곧 애국, 게으름은 매국 철저한 배역의 대상!
우리가 이런 일련의 역사적 과정들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느릿느릿’을 강조하던 조선 시대 양반의 풍경이 오늘날의 ‘빨리빨리’로 변해 한국 사람을 상징하는 국제어로 통용되는 배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4 일중독의 사회적 배경
삶의 중요한 공간들? 가정, 학교, 군대, 직장
*가정-아이들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건전한 인격체로 자라난다
일중독에 빠진 부모들은 아이들의 욕구를 솔직히 있는 그대로 충족시켜주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한과 소망을 대신 해결하려 하거나 아이들 자체에 무관심해 그 욕구를 무시한다.
칭찬의 역효과? 성과와 포상이 연결되어 있음을 반복 체험하면서 성과주의를 굳게 ‘내면화’한다.
*학교는 앞으로 노동시장에 팔려 나갈 노동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곳이다. 한마디로 ‘쓸모’ 있는 노동력을 만드는 공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0년간의 교육 기간 동안 다양한 잠재력과 고유한 꿈과 소망을 가진 한 인격체가 아니라 오로지 일개 ‘생산요소’로 축소당하는 경험을 한다. 시험과 점수가 그 강력한 통제 수단이다.
일개 ‘생산요소’로 전락? 이것은 ‘환경파괴’보다 더 무서운 ‘인간 파괴’다!
‘야간자율학습’은 그 강제성과 타율성의 측면을 은폐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이지만 일종의 ‘사회적 DNA’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밤늦게까지 학습 습관? 나중에 직장에 가서도 똑같은 관성을 발휘한다!
군대? 특히 한국 사회에서 군대라는 조직과 문화는 내적 자율성의 박탈과 강자와의 동일시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군필자 우대? 노동능력과 노동자세를 잘 갖춘 노동력을 원하는 자본이 이러한 군대 조직과 문화를 체계적으로 체득하는 사람들(군필자)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직장? 돈벌이 경제의 패러다임이나 ‘자원은 유한한데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는 엉터리 가설들, ‘경쟁력만이 살길이며 생산성 향상만이 모두 잘 사는 길’이라는 식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내면화하고 또 몸으로 직접 보여주어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반복적 경험 속에서 자신의 깊은 내면nature과 자아ego가 진정으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지 못할 때, 내면적 안정감과 자율성을 상실했을 때,…사람들은 모종의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그러한 두려움이 어떤 형태로는 외적인 것에의 종속성과 면역성, 금단 현상을 특징으로 하는 중독증을 불러오는데, 특히 성과주의적 삶의 원리의 내면화가 일중독을 촉진하게 된다.
#5 일중독의 현실
사람들은 자기정체성을 잃은 상태에서 체제가 강제하는 논리를 내면화하고 동원의 대상이 되면서 그 틀 안에서 작은 성공만을 위해 일생동안 몸과 마음을 바치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하이데)
“요즘은 오히려 한가해지면 뭐할지 모르겠다”
퇴직 인생? 자신의 존재 이유인 ‘일’이 없어진다!
일중독 경영자? 모든 일을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믿는 완벽주의 경향, 다른 사람 불신, 조직 사기 저하!
중독조직, 중독사회
틈새증후군? 하루 4시간 수면 대기업 청수? 빈 스케쥴에 안절부절 못한다!
#일중독과 소비중독을 동시에 권하는 사회
일중독을 부채질하는 사회, 중독은 일종의 질병이다. 영원한 불만족 상태, 결과 중시하기에 통제만능주의에 빠지고 거짓말이나 조작도 잘 한다.(황우석 교수 사태)
#건설 마피아와 집단적 성장중독증
개발development? 정책적 개념 정립한 트루먼 대통령
‘저개발’ 지역 ‘개발’한다는 아이디어, 개발의 이미지는 긍정적이고 역동적 이미지로, 저개발은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고정된다
후진국? 돈벌이를 위한 제국주의의 산물
평화? 세계 원주민들의 경우는 “그냥 내버려두어지는 것”을 평화라고 보는데도(이반 일리치) 마치 대부분의 우리들은 전쟁이 없는 상태 또는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모두 잘 살게 한답시고 개발을 서두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개발주의는 어떤 면에서도 보아도 ‘위로부터의’ 프로젝트다.
[일본, 허울뿐인 풍요] 저자 개번 매코맥의 말대로 ‘토건 마피아’
#7 일중독 벗어나기
가장 먼저 중독증 환자 스스로 자신의 병을 ‘인정’해야 하며 동시에 주변 사람들(가족,동료)도 이 병의 진단과 인정, 치유에 동참해야 한다
조직적 차원의 질병은 결코 개인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조직적 노력이 필요하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삶의 건강성과 자율성을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조화로운 삶의 공식? 4-4-4!, 보리출판사 6시간 노동제)
자본주의 자체가 중독을 먹고 산다! 일중독은 자본의 산물이자 토대이기도 하다.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에 끌려 다니는 질병인 일중독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갈수록 대중화 또는 보편화하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 경제 원리의 근본적 변동없이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가치관 변화와 구조적 변화가 함께 상승 작용을 하며 대안의 실현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일-여가-놀이의 통일을 추구하는 야마기시 공동체, 자본주의 문명을 거부하며 손노동과 검소함을 중시하며 살아가는 아미쉬 공동체 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니어링&스코트 부부의 조화로운 삶의 지혜? 4-4-4 시간제,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vity
오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폴 라파르그의 [여유로울 권리]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나라 노동자계급은 한 가지 중독증에 걸려 있다. 이 중독증은 다름 아닌 노동을 사랑하는 것이다(일중독)
노동할 권리를 혁명의 원칙으로 선언한 프랑스 혁명? 프랑스 프롤레타리아의 수치다!
모든 시도의 출발점은 일중독의 존재 자체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자발성과 생동하는 연대에 기초한 모임, 각자 모두가 중심이고 주인. 자립성과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
사회적 병리를 치유하고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데도 중요한 통찰력을 주고 있다. 특히 대안 사회를 꿈꾸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꿈꾸는 개인과 조직들에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일중독 벗어나기 | 일중독 환자 대한민국?”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