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나타베 이타루. p235
원제: 시골빵집이 발견한 ‘부패하는 경제
시골동네아저씨(?) 같은 도서관 서서분이 추천해준 책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부패와 순환이 일어나지 않는 돈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낳았다.”
“혁명은 변두리에서 시작된다.”
‘가쓰야마’라는 작은 마을, 이름조차 생소한 변방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고 있는 혁명에 나는 ‘부패하는 경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 가계의 경영이념은 이윤을 남기지 않기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빵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그런 희한한 빵집이 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 균들이 들려주는 목소리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의 인물인 마르크스의 목소리와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썩는다’ ‘부패한다’라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따라서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반한 현상이다. 그런데도 절대 부패하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 돈이다. 돈의 그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작아도 진짜인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이런 진리를 깨달은 우리 부부도 돈도 ‘부패’하게 하고, 경제도 ‘부패’하게 하면서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중이다. 이런 움직임은 소리 없이 확산되고 있다. 언젠가는 지역사회를, 국가를, 나아가 세계를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15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일본의 변두리 작은 시골마을에서 소리없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부패하지 않는 경제
자연계에서는 균의 활약을 통해 모든 물질이 흙으로 돌아가고, 살아 있는 온갖 것들의 균형은 이 ‘순환’ 속에서 유지된다. 자연의 균형 속에서는 누군가가 독점하는 일 없어도 누군가가 혹사당하지 않고도 생물이 각자의 생을 다한다.
부패가 생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자연의 섭리를 경제활동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각자의 생을 다하기 위한 배경에 부패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면 부패하는 경제는 우리 각자의 삶을 온화하고 즐겁게 만들어주고, 인생을 빛나게 해주지 않을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나의 샐러리맨 시절,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
서른, 불합리한 세상의 세례를 맛다
말로만 듣던 원산지 위조….
세상이 교과서 속 이야기처럼 선하게만 굴러가지는 않는다고, 검은 것을 희다고 하는 불합리함도 수긍할 줄 알아야 어른이라고 사람들은 말할지 모른다. 내가 그 회사에서 경험한 내용은 많든 적든 누구나가 일상 업무 속에서 경험하고, ‘어른’이라면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세상의 잿빛 단면일 수도 있다.
작아도 진짜인 일을 하고 싶다
언제가는 지금 있는 세계의 밖으로 나가 자아도 진짜인 일을 하고 싶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고, 그것을 생활의 양식으로 삼아 살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몰랐다. 그래서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와의 만남-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
말이 좋아 글로벌 경제지, 국경을 초월한 이윤창출을 노리고 대규모 자본을 들이붓는 투기세력은 서민의 일자리를, 나아가 서민의 삶을 망치고 있었다. 그 문제는 내가 먹거리 세계에서 겪고 있는 모순과도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는 마르크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과 업적까지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어렵사리 내 가게를 열고 바깥 세상으로 탈출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눈앞에는 자본의 세계시장이라는 더 큰 시스템이 버티고 있는 현실에 맞닥뜨렸다. 재료 구입 가격의 엄청난 변동에 농락당하는 나날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 세계에, 과연 시스템의 바깥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 점은 따져보지 않고서는 독립해서 빵집을 열었다고 한들 예전과 다름없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야 했다. 내 가게를 가지고도 예전의 그 회사처럼 어느새 시스템에 말려들 게 뻔했다.
#마르크스와 노동력 이야기
빵집 잔혹사(19세기, 런던). 두 종류의 빵집? 조합의 흐름을 이어가는 ‘정상가 판매업자(full-priced)’와 자본가가 배후에 숨은 ‘저가 판매업자(underseller)’. 저가 판매업자들은 오로지 종업원을 장시간 부리는 방법으로 엄청난 저가를 실현했다.
150년 전과 꼭 닮은 현실
혹독한 조건하에서 노동자를 부리는 블랙기업들
노동력이 관건. 노동자가 혹사당하는 이유는 자본가(경영자) 탓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며, 자본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구조에 편입되어 노동자를 학대한다
노동력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자본가가 좋아하는 이윤이 생기니 노동자는 혹사당할 수밖에 업는 것이다.
상품이란 무엇인가? 상품의 조건 1) ‘사용가치’가 있을 것/ 2)’노동’에 의해 만들어질 것/ 3)’교환’될 것
상품의 ‘가격’에 숨은 비밀
교환 가치의 기준? 답은 노동의 크기, 즉 노동시간이다.
대부분은 학교에서 상품의 가격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고 배웠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놀랐는데, 마르크스의 생각에 따르면 가격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교환가치에 있고, 수요와 공급은 가격을 변동시키는 2차적 요소라고 한다.
이윤의 탄생 과정. 노동자를 오래 일하게 하는 것처럼 자본가가 많은 이윤을 손쉽게 얻는 방법은 없다. 노동시간을 길게 해서 이윤을 늘리는 방법은 자본가의 상투적 수법이다.
내가 빵집에서 죽어라 일만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의 노동력을 산 빵집 사장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고 노동시간을 철저하게 늘린 결과였던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노동력을 뗴어 팔기 싫다면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면 된다. 그 점을 깨달은 나는 제빵 기술을 익혀 내 가게를 열고, 생산수단인 믹서와 오븐 등의 기계를 갖추었다. 또 가급적 근처 농가에서 재료를 구입하여 불안정한 시장에 좌우되지 않고 재료를 구하는 방법을 실천했다. 그렇게 조금씩 희한한 빵집의 스타일을 완성해갔다.
#균과 기술혁신 이야기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탄생한 빵. 누군가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빵이 탄생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정설이니 인류의 역사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발효라는 신비한 작용
효모에도 개성이 있다
음식을 ‘부패시키지 않는’ 슈퍼효모
“요컨대 이스트를 쓰면 누구나 쉽게 빵을 발효시킬 수 있다는 말이죠. 발효 도중에 잘못해서 부패하거나 실패하는 일도 없고요. ‘이스트는 과학의 산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다’라고 전문학교 선생님들이 열변을 토하시던데요.”
이스트는 빵집의 경영과 노동 형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제빵이라는 작업에서 기술과 숙련도가 필요 없어졌고, 스승에서 제자로 기술을 전수하는 도제제도가 무너졌으며, 대신 자본가(경영자)와 노동자라는 자본주의적 고용관계가 빵집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기술혁신’은 이윤을 늘린다
1시간 노동을 통해 20개 빵을.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았는데 이윤이 2,000엔에서 1만 엔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자본가가 군침을 흘리기에 틀림없는 상황 아닌가?
누구를 위한 기술혁신인가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이 향상되면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고도 자본가는 많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150년 전, 아니 지난 20년 전과 비교해보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엄청난 기술혁신을 이루 지금도 제빵 기술자건 직장인건 휴식을 얻기는커녕 변함없이 몸이 으스러져라 일만 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혁신은 결코 노동자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보단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경쟁사회다. 자본가들끼리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새로운 기술을 획득한 자본가는 더 많은 이득을 얻으려고 가격을 조금 낮춰서 시장을 공략할 수도 있다…필사적으로 달려들어 기술 수준을 따라잡았다고 해도 상대는 반격하기 위해 빵 가격을 50엔으로 더 낮출지도 모른다.
그 결과 상품은 드디어 교환가치대로 팔리게 되고 이윤은 기술혁신 전의 수준으로 돌아간다!
*마지막에 웃는 자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다.
노동이 단순해짐으로써 노동자에게는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단순한 노동은 ‘누구나 가능한’ 일로 전락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게 된다. 이 부분을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노동자는 기계 부속물로 전락하고, 부속물로서의 그에게는 오직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기술만이 요구된다.”(『공산당 선언』)
직원들이 하나, 둘 그만두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그 속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의 불안한 기술 수준은 노동이 단순해졌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싸구려 일, 싸구려 음식
음식은 싸면 쌀수록 좋다는 풍조가 있지만 마르크스의 말대로라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일(노동력)을 값싸게 만들기 위해 음식(상품) 값을 내린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밝혀낸 자본주의의 구조다.
“곡물 및 모든 식료품의 가격이 싸야 산업은 이익을 얻는다. 왜냐하면 가격을 끌어올리는 요소가 무엇이건 간에 가격이 비싸지면 그로 인해 틀림없이 노동력도 비싸지기 때문이다…식료품 가격은 반드시 노동의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싸지면 노동의 가격은 계속 떨어질 것인다.”(『자본론』 1권4편10장)
#부패하지 않는 빵과 부패하지 않는 돈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시간과 함께 모습을 바꾸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발효’와 ‘부패’를 통해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현상은 균의 작용에 의해 일어난다.
원래 천연균은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재료를 부패시킬지 발효시킬지, 그것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재료가 사람의 생명을 키우는 힘을 갖추고 있으면, 균은 빵이나 와인처럼 인간을 즐겁게 하는 음식으로 그것을 변화시킨다. 한편 생명을 키우는 힘이 없는 재료라면, 균은 그것을 안 먹는 게 좋다는 신호를 사람에게 보낸다. 말하자면 재료를 무참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때는 사람이 먹으면 해가 되는데, ‘부패’ 작용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에 의한 변화의 섭리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돈이다.
돈은 시간이 지나도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원히 ‘부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패는커녕 오히려 투자를 통해 얻는 이윤과 대금업을 통해 발생하는 이자로 인해 끝없이 불어나는 성질마저 있다. 곰곰이 따져보면 참 이상하지 않은가?
바로 이 부패하지 않는 돈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낳았다는 내용이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의 절반을 차지한다.
미하엘 엔데는 나에게 ‘부패하지 않는 돈’이라는 생각을 가르쳐 준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엔데의 유언-모모의 작가 엔데, 삶의 근원에서 돈을 묻는다』라는 책이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신용창조’? 빌린 돈을 통해 돈을 창조해내는 기능은 은행만이 가진 특수 기능이다
돈은 ‘부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 이윤을 낳고 금융을 매개로 하여 신용창조와 이자의 힘으로 점점 불어난다. 형태가 있는 물질은 언젠가 스러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계의 거스르기 어려운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돈은 애초에 그 법칙에서 벗어나 한없이 몸집을 불리는 특수한 성질을 가진다. 그런 부자연스러움이 사회에 다양한 문제를 초래한다고 엔데는 생각했다.
부패하지 않는 경제
어처구니없는 일들. 이런 사태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 통화량 늘리기다. 재정정책(적자국채 발행)과 금융정책(제로금리·양적완화)을 통해 돈을 마구 풀어서 시중에 돈이 넘쳐나게 만드는 것이다.
거품 경제. 리먼쇼크도 단순한 ‘통화술책’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부패하지 않는’ 돈이 자본주의 모순을 낳는 주범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돈과 경제를 ‘부패하게’ 만들어버리면 어떨까? 이것이야말로 발효의 힘을 빌려 발효와 부패 사이에서 빵을 만드는 나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발상이었다.
경제를 부패하게 하자
번화한 도심지의 빵집과 동네 빵집을 거치면서 나는 부패하지 않는 돈을 탄생시킨 자본주의의 모순을, 뼛속 깊이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속속들이 눈으로 보는 사이에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 선명해졌다.
이 사람들이 하는 것과 정반대로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시골빵집을 내기 위한 크나큰 양식이 된 것이다.
비효율적일지언정 더 많은 정성으로, 이윤과 결별하기. 그것이 부패하지 않는 돈을 탄생시킨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상을 현실로.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균을 만났다.
자연계에서는 균의 활약을 통해 모든 물질이 흙으로 돌아가고, 살아 있는 온갖 것들의 균형은 이 ‘순환’ 속에서 유지된다. 부패가 생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찾아낸 자본주의의 모순을 풀 열쇠는 균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바로 그것이 발효와 부패 사이에서 시골빵집이 구워낸 자본론이다.
##부패하는 경제
천연균은 살아가는 힘이 없는 것들을 부패시킨다.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생명의 활동에 잘 따른 음식을 선별해서 자연의 힘으로 억세게 살아가는 것들만 발효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부패는 생명에게 불필요한 것들 또한 불순한 것들을 정화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이윤이 아니라 순환과 발효에 초점을 맞춘 부패하는 경제에 도전 중이다.
#어서 오세요. 여기는 시골빵집입니다
균이 자라고, 아이들이 자라는 마음
장사하기 좋은 환경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곳을 우리 부부가 선택한 이유는 가쓰야마에 숨어 있는 커다란 보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아사히가와 강과 2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일본술 양조장이 바로 그 보석이다.
우리 빵집 이름은 다루마리? 이타루와 아내 마리코의 빵집.
빵의 평균 가격은 400엔. 일주일에 사흘은 가게를 닫고 일 년에 한 달은 장기 휴가를 간다. 매달 매상은 200만 엔.
우리 가게 별명은 ‘희한한 빵집’
시골빵집이 찾아낸 부패하는 경제의 핵심은 크게 4가지다.
1)발효 2)순환 3)이윤 남기지 않기 4)빵과 사람 키우기
#균의 목소리를 들어라-발효
‘균’과 ‘장인’의 한판 승부
작은 균의 위대한 힘
육안으로 볼 수 없으니 균의 존재를 느끼면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미미한 존재다. 그래도 이 작디작은 균들은 틀림없이 살아 있고 자연계에서 실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물질을 흙으로 환원시키는 부패하는 작용이다.
이들 균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혜택을 발효라 한다. 발효란 균이라는 생물의 생명유지 활동인 것이다.
천연균과 순수 배양균의 차이점
그런데 우리 발효를 말하자면, 사람의 사정은 도무지 봐주지 않는다. 균은 균의 사정대로 발효를 일으킬 뿐, 조건이나 재료가 마음에 안 들면 발효는커녕 가차 없이 ‘썩혀’버린다. 사람이 균의 사정에 맞출 수밖에 없다. 천연균으로 빵을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 녀석들과 함께 사는 길을 택한다는 의미다. 그 대신 우리는 균에게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교훈을 얻는다.
‘천연 누룩균’을 아십니까?
나는 한편으로는 그녀의 아우라에 압도당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연 누룩균을 지금껏 몰랐던 나의 무지를 깊이 반성했다…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덥석 그녀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천연 누룩균 빵에 도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은 채로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도움의 손길…”쌀 말인데, 이걸로 한번 써봐. 좋은 거니까 분명 잘될 걸세.” 쌀자루에는 ‘자연재배 쌀’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유기재배 쌀’로 주종을 만들고 있었다.
자연재배와 천연균
“…작물이나 균이 자라기 위한 터를 만든다는 의미에서는 자연재배와 천연균이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자연재배하고 천연균은 분명 궁합이 좋을 거야.”
‘이 땅은 양분이 모자라서 절대 농사는 못 짓는다.’는 결과가 나온 자연재배 채소. 눈앞에서 싱싱한 당근과 무가 자라고 있는데도 그들은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과학의 눈으로만 보면 불가사의한 간극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간극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궁합이 만들어낸 천연 누룩균 빵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시판 누룩으로 주종을 만들었을 때는 보지 못한 광경이엇다. 마치 반죽 자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의 눈에는 천연균과 자연재배 작물이 손을 잡고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둘 다 ‘내면의 생명력’을 꽃피우는 데 뛰어나니 그야말로 최고의 궁합이었다…덧셈을 넘어 곱셈의 결과를 일으킨 덕에 크고 강해진 것 같았다. 그것 말고는 그 압도적인 결과의 차이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천연균과 자연재배는 우리 부부만큼이나 최고의 조합이었다.
발효와 부패의 경계. 그 공정에서 유기재배 쌀과 자연재배 쌀에 큰 차이가 있었다. 유기재배 쌀을 썼을 때는 유산발효가 일어날 때 쌀이 악취를 풍기고 부패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그런데 자연재배 쌀은 그 과정에서 쌀이 부패하지도 않았고, 퇴비냄새를 풍기지도 않았다. 항상 멋들어진 ‘유산발효’로 끝났다. 게다가 새콤달콤한 요쿠르트의 상큼한 향이 났다. 코를 막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천연 유산균은 유기재배 쌀을 부패시키고, 자연재배 쌀을 발효시킨다.
유기재배 쌀과 자연재배 쌀의 이런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균이 그 답을 가르쳐주었다!
균의 보이지 않는 손. 생명력이 강한 것들은 균에 의해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명력을 유지하여 생명을 키우는힘을 그대로 남겨둔다. 그래서 식품으로 적합하다. 반대로 외부에서 비료를 받아 억지로 살이 오른, 생명력이 부족한 것들은 부패로 방향을 잡느다. 생명력이 약한 것들은 균의 분해 과정에서 생명력을 잃는다. 그래서 음식으로서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우리가 들여온 유기재배 쌀은 대량의 동물성 퇴비(단백질)를 먹고 자랐다. 그래서 영양과다 상태, 생명력이 약한 상태였던 것이다. 산과 들에는 대량의 동물성 퇴비 따위는 없다. 따라서 작물에 단백질이 포함되는 비정상적 사태를 천연 누룩균이 감지하면 ‘이상하다, 분해해서 흙으로 되돌리자.’라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자연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천연 누룩균이 단백질을 분해하러 달려들게 되고, 그 탓에 밀에 포함된 단백질(글루텐)까지 모조리 분해되어 빵이 부풀지 못하는 것이다.
천연균은 작물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아본다.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생명의 활동을 잘 따른 음식을 선별해서, 자연의 힘으로 억세게 살아가는 것들만을 발효시킨다. 천연균은 살아가는 힘이 없는 것들을 부패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부패는 생명에게 불필요한 것들 또는 불순한 것들을 정화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 나의 생각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 나오는 ‘후카이’라는 숲의 이미지와도 닮았다.
사람들의 사정은 균과 무관하다. 사람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작물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많이 키우기 위해 비료를 투하하면 겉으로 보이는 수확량은 늘어도 작물의 생명력은 떨어진다. 균은 그런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 작물은 부패시켜서 자연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인간은 균을 속일 수 없다. 균은 토양과 작물의 상태를 숨김없이 드러낸다…균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화려한 방식으로 수확했는지 하는 상표가 아니라 그 작물이 자연의 활동에 따랐는지 여부다.
균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면 답은 자연히 얻어진다. 모든 것은 균의 마음에 달렸다.
“방법은 하나예요. 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죠. 자연환경에 지극히 가깝게 만들어줘봐요. 플라스틱 용기도 쓰지 말고요.”
발상이 크게 전환된 순간이었다. 결국 자연의 힘에 맡기고 공기 중의 균이 내려와 터를 잡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되었다.
균을 중심에 두는 ‘균 본위제’ 빵. 균을 중심에 둔 이 방식을 우리는 ‘금 본위제’가 아니라 ‘균 본위제’라 부른다. 자연의 소리를 듣는 자연 중심의 빵. 균의 마음 그대로 균의 보이지 않는 손에 따르는 방식이기도 하다.
잠재능력을 끌어내는 ‘뺄셈’의 힘. 순수 배양균의 힘을 빌려 쓰지 않겠다는 생각과 통하는 원칙이 또 있다. 우리는 설탕, 버터, 우유, 계란을 배제한 ‘뺄셈’ 방식으로 빵을 만든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잠재능력을 30%밖에 못 쓰지만 북두신권은 나머지 70%까지 쓴다는 데 비밀이 있다.”-『북두의 권』
빵도 마찬가지 아닐까? 기술과 감성을 갈고 닦으면 재료의 잠재능력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균과 재료는 같은 땅과 물과 공기 속에서 자란 것이 좋다. 같은 땅에서 자란 균과 재료는 발효가 워낙 자연스레 이루어져서 맛이 순하고 부드러워진다.
자연발효 치즈. “균을 잘 활용하면 맛은 저절로 난다.”
이런 사고방식은 시골빵집이 찾아낸 부패하는 경제의 핵심 중 하나 인 ‘순환’이라는 주제로도 이어질 것이다.
균이 바라보는 부패하지 않는 경제. 사람들은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투입해 경제를 뒤룩뒤룩 살찌게 한다. 내용물이야 어떻든 이윤만 늘면 된다. GDP만 키우면 된다. 주가가 오르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비만이라는 병에 걸린 경제는 거품을 낳고, 그 거품이 터지면 공황(대불황)이 찾아온다. 거품붕괴는 어떤 의미에서 너무 살쪄서 비정상이 되어버린 경제가 균형을 되찾는 자정작용이다.
그런데 부패하지 않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공황도 거품붕괴도 허용하지 않는다. 적자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재정출동이나 재로 금리정책과 양적완화 같은 금융정책을 통해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살포하는 수법을 써서 한없이 경제를 살찌우려고만 한다.
인위적으로 동원한 균이 부패하지 않는 음식을 탄생시키는 것처럼 인위적으로 동원한 돈은 부패하지 않는 경제를 낳는다. 자연의 활동에서 크게 벗어난 부자연스러운 악순환이다.
#참다운 시골살이는 ‘순환’
균에 이끌러 마침내 도착한 곳. 가쓰야마. 양조의 근대화 및 합리화와 함께 유산발효 과정을 생략하고 이미 만들어진 유산을 첨가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룬 지금 예전 방식을 고수하는 곳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역사가 살아 숨쉬는 가쓰야마. 마을에는 큰 산업이 없고, 이렇게 멋진 고장인데도 매년 인구가 줄고 있는 형편이다.
빵을 변화시킨 물의 힘. 산이 있고 물이 있으니…원천 그대로의 진짜 천연온천. 무료도 있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사치다.
성격과 지나온 시간 모두 대조적인 우리 두 사람은 ‘시골에 가게를 열겠다’는 단 하나의 공통점만 믿고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시골에서 빵을 만드는 의미. 시골은 도시에 비래 경제적으로 가난하다? 수입은 많지만, 나가는 돈도 많다.
그런 월급쟁이의 비애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임금을 현금으로 받으면 공장주에 의한 노동자 착취는 끝난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에게는 또 다른 부르주아 계급이 달려든다. 다름 아닌 집주인, 소매상인, 전당포 등이다.”(『공산당 선언』)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앞으로의 먹거리와 농업에 대해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같은 또래의 친구는 없었다. 그래서 이처럼 큰 뜻을 품고 시골살이를 하는 그들은 우리에게 무척 든든한 존재다.
빵으로 지역 ‘순환’ 만들기.
빵집의 좋은 점은 생산자 및 고객과 모두 소통할 수 있고, 생산자와 고객을 잇는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우리는 빵을 매개로 지역 내 농산물을 순환시킨다. ‘지역생산 지역소비’를 실천함으로써 지역의 먹거리와 환경과 경제를 한꺼번에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엔데의 유언』에 소개된 지역통화. 그 중에서도 내가 강력하게 끌린 부분은 지역 농업을 활성화시켰던 미국의 이타카라는 마을의 통화 ‘이타카 아워(Ithaca Hours)’였다.
지역통화 같은 빵 만들기.
‘마을 조성’, ‘지역활성화’ 사업들. 부패하는 경제와 정반대의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을 여러 차례 지켜보았다.
지역의 바깥에서 보조금을 끌어와 도시에서 유명인을 불러 불꽃놀이 같은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고, 재료를 조달해 지역 특산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지갑을 불리는 사람은 이벤트를 벌인 도시 사람들이고, 판촉과 마케팅에 능한 도시의 자본이다. 사용된 보조금도 도시에서 온 사람들 손으로 흘러들어간다.
결국 바깥에서 비료를 퍼와서 속성 재배해 지역을 억지로 키우려 해본들 지역이 잘 살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비료를 투입하면 할수록 지역을 말라갈 뿐이다.
먹거리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악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외부에서 보태거나 빌려와서는 안 된다. 내부의 힘이 빛을 발하게 해야 한다.
시골빵집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천연균과 자연재배를 만났고 다시 한 번 지역통화라는 발상이 자연의 섭리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통화 같은 빵을 만들고 싶다.
우리는 지역통화라는 발상을 빵집 나름의 모습으로 수정, 발전시켜서 이윤이 아니라 순환과 발효에 초점을 맞춘 부패하는 경제에 도전 중이다.
#착취하지 않는 경영형태-이윤 남기지 않기
시골빵집. 우리가 우리 소유의 ‘생산 수단’을 손에 넣은 시점이었다.
사회를 발효시키는 소상인들의 유래
히라카와 가쓰미의 『소상인이 돼라』
정성과 진심을 담아 열심히 빵을 만들고, 소비자에게 말을 건넨 결과 시골빵집은 지난 5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가 자가 제분을 양보하지 않은 데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소규모 상업을 꾸리는 농가에 힘을 보태줄 수 있고, 의욕적인 농가와 유대관계를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연농을 실천해보니까 대학원에서 연구했던 내용이 홱 뒤집어지는 느낌이에요!”
소상인은 이윤을 노리지 않는다. 우리가 지향하는 소상인의 핵심 가치는 바로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규모만 작다고 해서 소상인이 아니다. 맨 처음 빵을 배웠던 작은 빵집, 가게의 실상은 『자본론』에 등장하는 저가 판매업자. 이윤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패하지 않는 돈은 이윤을 낳는다. 그 이윤을 위해 종업원은 죽어라 일해야 했고 사장은 천연호모 빵이 아닌데도 그렇다고 소비자를 속였다.
이런 구조인데도 가게가 굴러가는 것은 전적으로 임대료가 싼 시골이기 때문이다. 소상인의 입장에서는 일손과 재료가 생명이다. 바로 그 부분에 확실하게 돈을 쓰고 경영하려면 시골은 그야말로 합리적인 장소라고 생각한다.
‘다음번 투자를 위해 이윤은 꼭 필요하다.’ 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결국 생산규모를 키워서 자본을 늘리려는 목적 때문에 나온 말이다. 동일한 규모로 경영을 지속하는 데에는 이윤이 필요치 않다.
농약을 쳐본 사람이 무서운 줄 안다.
재료값을 후려서 싸게 사는 방법도 당치 않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연재배 생산자들은 자연의 힘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생산력을 지키면서 자연을 키우고 작물을 재배하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생명 지킴이’인 그들에게서 재료값을 깍는다는 것은 생명을 키우는 자연을 내 손으로 망가뜨리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다.
결국 우리는 풍요로운 자연을 잃게 되고 스스로 우리의 목을 죄는 결과를 초래한다.
가슴아프게도 먹거리를 생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팔려고 만든 상품은 절대 먹지 않는다’,’내가 먹으려고 재배한 쌀이나 채소에는 농약을 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상식처럼 회자되고 있다. 확실히 농업 분야에서 농약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제일 잘 하는 사람은 실제로 농약을 쳐본 사람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비싸다고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싸게 산 만큼 그 대가는 우리가 치러야 할 몫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감춰진 외부비용)
정당하게 ‘비싼’ 가격에 빵 팔기. 우리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빚어내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다. 그러려면 정반대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상품과 노동력의 교확가치를 높게 유지하는 것이다…그렇게 상품 하나하나들 정성껏 만들고 상품의 교환가치를 높게 유지해야 소상인이 소상인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것에는 정당한 가격을 지불한다.
이윤을 내지 않겠다는 것은 그 누구도 착취하지 않겠다는 의미, 즉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우리는 종업원, 생산자, 자연, 소비자 그 누구도 착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돈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올바르게 쓰고, 상품을 정당하게 ‘비싼’ 가격에 팔 것이다. 착취 없는 경영이야말로 돈이 새끼를 치지 않는 부패하는 경제를 만들 수 있다.
#빵을 키우고 사람을 키우는 또 하나의 도전
내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천연균을 열심히 일했다.
균과 아이들에게 배우다. 균은 손이 많이 가는 자식 같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사랑해주고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뿐이다.
기저기 안 쓰는 육아법? 말 못하는 아기들이 보내는 신호를 엄마가 알아채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균과 아이들, 자연을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매일 배운다.
번개를 ‘벼의 마누라’라 부르는 이유? 번개가 치면 공기 중의 질소가 물속에 몇 톤이나 녹아든다! 그 물이 땅을 비옥하게하고 그 덕에 벼가 여문다.
“옛날 사람들은 과학은 몰랐어도 오감과 경험으로 자연을 속속들이 알았던 거지.”
눈의 중요성은 자연을 상대하는 온갖 직업에 다 해당된다. 자연의 상황과 변화를 알아차리는 감성이 있어야 자연의 힘을 빌려 땅을 다지고 터를 만들 수 있다.
균에 이끌려 다니다보면 가끔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본질 같은 것들을 엿볼 수 있는데 그럴 때는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세계를 나 혼자만 훔쳐보았다는 흥분에 휩싸인다. 이렇게 즐거운 일은 좀처럼 없지만 싶다.
발효와 빵 만들기는 둘 다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끝이 없기 때문에 해도 해도 신선하고, 경험하면 할수록 새로운 길을 보게 된다. 자연을 상대하는 노동이 주는 기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옛사람들은 과학이 없었어도 자연을 보는 눈과 감성을 키워서 자연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았다. 발효의 세계가 그렇다. 과거에 사람들은 현미경 없이도 풍부한 발효음식문화를 만들어왔다. 발효와 부패는 종이 한 장 차이가 나지만 그것을 자신의 눈과 감성으로 구별했다.
기술을 뒷받침하는 눈은 온몸에 달려 있다. 눈은 시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오감)에 존재한다. 숙련공이나 궁목수의 손끝, 제빵사의 콧구멍과 혀에는 기술을 탄생시키는 눈이 달려 있다.
“빵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고, 입으로 들어간 음식은 우리 몸이 된다. 그러니까 빵은 사람의 생명을 기르는 물질인 셈이다.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
기술을 써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여 기술도 존재할 수 있다.
돈만 내면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편리함을 얻은 대신 생활 속의 기술과 지혜는 사라진 것이다. 전통문화와 기술 속에는 삶을 풍성하게 하는 지혜와 사고방식이 적잖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은 회복하고 계승하는 데 도전하려 한다.
지금의 법률은 나무만으로 건축물을 세우는 행위를 허용치 않는다. 이를 놓고 오가와 씨는 “노송나무는 철이나 콘크리트보다 강하다. 콘크리트는 100년도 못 간다.”고 분개한다.
오가와 씨의 책 속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내용이 있다. 목조건물에 쓸 나무가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있는 한 기술은 물려줄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이 있어도 수백녁이라는 세월을 견딜 수 있는 나무가 더 이상 없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자연도 함께 계스으하는 지속 가능한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
삶과 함께 하는 직업. work-life balance, 일과 생활의 조화. “장인은 월급쟁이가 아니니 생활이 삶이고 삶이 직업이다.”
다루마리에 휴일이 많는 이유. 사실 마르크스도 근무시간(노동시간)을 줄여야 자본주의의 미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했다(4-4-4 조화로운 삶의 법칙)
빵을 더 잘 만들기 위해 빵을 안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다? 빵만 보이고 세상이 안 보이게 되면 어떤 빵을 만들어 제공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빵 이외의 것들과 만나는 시간은 기술을 부리는 사람으로서의 감성을 연마하고, 삶의 폭과 깊이를 더하며, 견문을 풍부하게 하고, 사회의 움직임을 느끼는 눈을 기를 수 있게 해준다.
시대가 원하는 빵을 계속 만들기 위해서, 일과 생활이 하나가 된 삶에도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을 키우기 위한 또 하나의 도전.
아이들에게 열심히 사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생활 속에 일이 들어와 있으니 분명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우리 부부는 천연균과 자연재배로 아이들까지 키우는 셈이다.
아직 제대로 사람을 키운 적은 없다? 나의 틀에 맞춰서 키우려는 생각이 강해서였는지 모른다.아이들처럼, 천연균과 자연재배처럼 환경만 만들어두면 사람은 저절로 자라게 되어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스태프와 침식을 같이 하는 도제제도를 시도하려 한다. 물론 시행착오는 필수과정일 것이다.
일의 의미를 몸으로 배워서 자신의 장래를 위해 썼으면 한다. 그것이 시골빵집의 또 하나의 도전이다.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주제넘은 소리다. 다만 우리는 사람이 자랄 수 있는 터를 만드는 일에 도전하려 한다!
돈은 미래를 선택하는 투표권. 매일 돈을 쓰는 법을 바꿔보는 것도 경제를 부패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한다(스팬드 시프트spend shift)
돈에는 미래를 선택하는 투표권으로서의 힘이 있다. 몇 년에 한 번 있는 선거의 한 표보다 매일 쓰는 돈이 현실을 움직이는 데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윤리적 소비)
돈을 쓰는 방식이야말로 사회를 만든다.
자리가 잡히고 균이 자라면 먹거리는 발효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상인과 장인이 크면 경제도 발효할 것이다. 사람과 균과 작물의 생명이 넉넉하게 자라고 잠재능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경제. 그것이 시골빵집이 새롭게 구워낸 자본론이다. 빵을 굽는 우리는 시골 변방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혁명의 태동을 오늘도 느끼는 중이다.
나는 빵집 주인이 되어서 정말이지 행복하다.
빵이 아니었으면 지역경제를 세우겠다는 목표도, 경제를 순환시키고 발효시켜서 부패하는 경제를 만들겠다는 발상도 할 수 없었으리라.
왼쪽에는 생산자, 오른쪽에는 고객, 그 사이에 내가 잇고 우리를 둘러싼듯 균이 있다. 빵을 만나고 마르크스를 만나고 균을 만날 수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져온 것들은 우리는 다시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시골빵집의 도전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