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인간. 변현단. p288
알맞게 욕구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자립인간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농사를 지어라.
자유롭고 싶거든 농사를 지어라.
농사를 짓되 시골에서 지어라.
시골에서 짓되 생태적으로 지어라.
생태적으로 농사를 짓되 자급하는 농사를 먼저 지어라.
자급하는 농사를 짓고 나머지는 다른 이들에게 나눠 주어라.
농사를 짓되 야생에서 채취하는 것에 더 많이 의존하라.
보라! 돈과 소비, 그것은 쳇바퀴다.
인생이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하고, 돈은 소비하려고 벌고, 소비하는 것은 기업들이 프로모션 마케팅을 하는 유혹적인 것들일 뿐이다.
더 큰 아파트를 더 많은 세간으로 채우기 위해 돈을 벌고,…
그렇게 달려와 잠시 멈추어 돌아보니,
아, 진정 행복한 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자연과 뛰노는 아이들에게 있는가?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에게 있는가?
책상맡에 앉아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있는가?
당신의 자식이 지금 어떻게 지내기를 원하는가?
##자립의 성찰
삶에 뼛속 깊이 관여하고 결정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시스템에 연결된 고리를 끊을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삶을 회복할 수 있다.
#자유와 소비의 경계에서 머뭇거리다
돈과 소비에 중독된 우리의 생애
“행복하세요?”
그들은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에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혔다. 그리고 지금의 불행을 인고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그들이 말하는 미래에 도달했는데 그 미래에도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돈과 소비, 그 순환의 볼모로 갇힌 우리
행복하게 사는 것은 자립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돈은 자립을 위한 매개체이다.
‘돈=소비’. 소비되지 않는 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소비가 줄어들수록 돈의 필요성을 줄어든다.
소득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것에 덜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곡물 조달이 가능하다면 소수의 식재로도 살아갈 수 있다. 조리과정 또한 단순화시킬 수 있다. 옷 몇 벌과 신발 몇 컬레, 냄비와 숟가락 정도가 담긴 가방 하나면 충분하다. 장기여행을 해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 전부다.
자립이란 무엇인가?
태어나면서 ‘소비’를 배우고 ‘소비’가 전부인 사회에서 ‘도시의 로망’을 익한 어린이들에게 ‘자립’이란 원시적인 일로 비칠 것이다.
진정 자립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자립과 자유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종속적인 사회경제적 구조로부터의 자립. ‘돈’으로 대변되는 현대 산업사회의 편리성과 단속성,…마을 공동체의 삶에 뼛속 깊이 관여하고 결정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시스템에 연결된 고리를 끊을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삶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식주의의 자립’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자유로운 자립의 시작_걱정 덜어내기
은퇴자와 실직자들이 찾는 귀소. 편안한 노후생활에 관심을 가진터라 불편한 생태적 삶보다 농촌에서 텃밭을 일구는 정도에 관심이 머문다. 이들의 농촌 생활은 또 다른 도시형 생활의 이전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젊은이들의 반란, 싱글 여성들의 귀농. 그들은 대부분 생태적 가치나 자립생활에 관심을 갖고, 반문명적·생태적 가치를 목표로 한 삶을 향해 가려는 경향이 크다.
내 기억 속 나는 즐거운 촌 아이였다. 결국 ‘가난하다’고 생각지 않던 사람들에게 ‘가난하다’는 생각을 주입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가난은 우리가 느낀 것이 아니라 정부가 가난하다고, 그리고 가난은 벗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도록 만들었다.(공생적 가난의 시대에서 풍요속 빈곤의 시대로)
농촌은 도시를 위해 존재했다…그리고 이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도시에서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병든 몸으로 가든, 경쟁시장에서 낙오되어 가든, 일자리가 없어서 가든, 은퇴해서 가든, 우리의 신념으로 가든, 분명한 것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는 것을, 도시를 위해 유기되고 버려진 자연과 농촌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문명을 평정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반자본주의와 반문명 농촌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 자연인으로 다시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세상과의 교류, 문화와 교육의 문제
익숙함의 무서움, 만약 인터넷이 없다면….나는 문명에서 멀어지라고 하면서 문명을 이용하는 아이러니를 행하고 있는 셈이다. 중앙집중식 전력과 석유문명의 문제를 말하면서 문명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영화도 노래도…오락이라고 하지만 이런 오락이 없어도 내가 세상을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데는 어떤 하자도 없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은 더 많은 일을 하게 하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기에 몸과 마음을 보살필 기회를 앗아간다. 또한 예측하고 대비하는 능력을 함양할 기회도 앗아간다. 유익한 다큐멘터리를 본다는 그것이 내 삶을 더욱 유익하게 할까?…공통된 화제를 통한 관계 안에서 소외…하지만 그 정도의 소외는 자연과 함께 살면서 보상받는 것에 비하면 옷에 묻은 먼지에 불과하다.
계획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누구의 발상인지,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뮨명이 만들어 낸 교육과 습관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탈문명 설파를 문명을 통해서 하고 있는 이 역설. 결국 탈문명은 선전설파도 없고 혼자만의 삶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소셜네트워크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생활만이 내가 말한 것을 실천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대학은 가지 않는 것이 낫다. 대학교육은 직업교육도 인문교육도 아닌 그저 졸업장을 따기 위해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고 아닌데 재산적 손실은 엄청나기 때문니다….그래서 한국에서는 일찌감치 학교에 가지 않고 대안을 찾는 것이 낫다.
가난은 벗어나야 할 것으로 선전하면서, 가난을 벗어나려면 ‘도시에서 받는 문명 교육’이 필요하다고 계몽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과 교육은 한 궤를 달리면서 자본주의 사상과 문화를 전 세계적 단일 경제시장으로 형성하는 데 주력했다.
산업자본주의 교육의 문제. 산업적 생산양식 자체의 존재 방식이 학교다.
교육과 평등의 기회는 ‘진보한다는 신화’를 조장했고, 기대의 보편화는 노동의 창조성을 박탈했다. 전일제 수업은 경제성장과 소비사회로 들어가게 하는 의식을 전해주었다. 따라서 학교를 탈피하고 사회구조를 벗어날 때, 교육을 벗어날 때, 그때 비로소 아이들은 제대로 양육된다. 즉, 탈학교·탈교육으로 아이들이 그저 자라도록 놓아두는 것이 자립적 아이들 만든다.
지금 한국의 교육 현실은 최고로 암담하다. 학교를 다닌다는 것 자체가 불행한 구조다. 우리나라의 학교는 일제의 잔재로 교실중심주의 학습이다. 선생이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학생은 따라 외우고 문제를 풀어 정답을 맞히는 교육이다. 몸을 움직여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고 놀이라고 규정하면서 몸의 건강을 위한 공부를 체육이라는 시간 안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자식은 저절로 자란다. 아이들은 누군가로부터 교육을 받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체득하게 된다…최근 교실에서 문자로 받는 교육은 그들의 경험의 기회를 송두리째 앗아 간다.
부모들과 사회가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아야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배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아이들의 부모와 사회는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시골에서 문화생활이랍시고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게 되면 대부분 도시의 것들이다. 시골 아이들은 도시의 삶을 좇아가도록 은밀하게 강요받고 있다. 시골에는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자연이 있다.
반면 도시의 아이들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키워진다.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저절로 자라려면 시골에서 살아야 한다…하지만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었다. 예람이로부터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다. 방학 내내 예람이는 컴퓨터 곁에서만 지냈다.
반드시 부모를 닮는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거울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길 원한다면 부모 자신이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관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여기서 일하는 곳은 산이며 밭. 자신의 밭에서 일할 때 먹고살기 위해 상대하는 것은 흙이며 식물이며 동물이다.
신가족, 개인들의 연합 식구.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 ‘필요’에 의한 분배. 똑같은 분배가 아니다.
아무리 가치와 철학이 같더라도 똑같을 수는 없는 일. 각자가 서로 다른데 그것을 ‘일치’시키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모양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걸음도 다른데, 심지어 입맛도 다른데, ‘같아야 한다’는 착각 속에서 생활. 이 지점이 갈등의 시작이다…그러므로 모든 관계는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자족하고 합의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나의 갈등 해결방법은 대체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서로 간섭을 줄이고, 독립을 인정하고 자립적이면 갈등의 폭이 줄어든다. 자립은 갈등으로부터 자유를 주기 때문.
도시노인과 시골노인. 농촌의 노인은 자립적이다. 노인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는 다름 아닌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일이다. 노인의 지혜를 사장시키지 말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과 준비. 죽음의 자립, ‘잘 죽었으면 좋겠다’
병원에서 나서 병원에서 죽고 장례식장에서 주검을 애도. 이 세상을 나올 때부터 병원에서 시작해 귀신이 되어서도 소독약이 풍기는 병원에서 지낸다. ‘병원의 순환’이 아닌가. 돈이 없으면 나오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돈이 들고 죽어서까지 돈이 드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병원은 생명을 돈에 의존하여 연장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잘 죽기 위해 최대한 정신과 육신이 살아 있을 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방법? 단식! 죽음을 준비하며 단식을 선택한 것은 강대인 선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난 뒤.
교통사고. 문명으로부터 멀리하는 생활이라면 갑작스런 죽음의 기회도 줄어든다. 자연 속에서 저연스럽게 죽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다.
장례산업. 꽃으로 환생. 순환의 전설은 더 이상 없으리라. 공동묘지든 납골당이든 죽은 자들의 집합소로 이전. 나무, 토양에 순환되는 것을 차단. 죽음은 자연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지금의 장례는 사람의 영혼을 가두기 위한 것이며 순환을 단절한 산업에 불과하다.
##자립의 실행
자립이란 자연이 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상대방의 성격과 행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맨발로 닿아도 아프지 않은 땅에 서다
생이불유(生而不有) 만들었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애초에 모든 것이 나를 포함한 자연의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내 것이기만 하면 오히려 괴로움이 될 것이다.
소식. 자연식의 옛 사례 ‘구황벽곡의 깨달음’
노동시간도 수확량도 모두 적당하게, 아니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눠 먹고 공생하기 위해서 똥을 적게 싸고 적게 노동하는 법을 배워야 생존할 수 있다.
문명으로부터의 탈출은 음식에서 시작된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음식 문화는 곧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고 질병을 치유하는 문화이다.
식생활의 원칙. 가능한 한 내 손으로 농사짓고 내 손으로 채취한 것으로 먹고살자. 만약 고추를 재배하지 않았으면 고추를 먹지 않는다. 가능한 한 거래를 줄이자는 것이다.
묵은나물도 많이 만들지 말자.
단식과 벽곡방을 가끔 한다. 단식을 해보면 알겠지만 의도된 단식은 배고픔이 10일부터는 사라진다. 감기몸살에 걸린 이는 3일을 단식하면 치유가 된다. 단식 3일째부터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명현 반응이 나오게 된다. 단식으로 몸을 비우게 되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하루 2식. 2식을 하니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밥상 준비하고 먹어 치우는 시간이 족히 1시간을 걸린다.
“쌀이 부족하면 한 끼를 먹으면 되고, 벽곡방을 하면 될 일이야”
간편하고 단순한 음식. 농부의 밥상은 음식쓰레기가 없다. 나는 냉장고에 음식을 저장하는 일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간편한 밥상, 단순한 조리, 간단한 식재에는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음식을 하는 사람들은 농사를 알고 자연의 식물이 자라고 수확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리사들이 식재가 어떻게 재배되는지 어떻게 유통되는지 알지 못하면, 음식이 자연에 적합한지, 인간의 몸에 맞는지도 알 수 없다.
음식물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조리방법이 바뀌어야 한다. 통음식을 먹고 통으로 하는 조리법을 알아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소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립, 먹는 것이 전부다.
인간은 생명유지가 기본, 먹는 것이 우선이다.
조리도구와 에너지의 자립. 음식을 조리하고, 음식을 저장하는 도구도 자립적이어야 한다.
음식이 자립되면 사람의 삶도 자립된다. 따라서 자립적인 삶은 음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시골 사람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국가정부의 선전선동에 기인한 것. 흙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로부터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경철도 국가도 필요 없다. 무엇을 해달라고 갈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두 세계 중 어느 것 선택할 것인가? 흙을 밟고 손수 자기손으로 짓고 먹는 ‘가난한 농부’로 살 것인가? 미련이 아직도 남아 부자가 되는 법을 좇아 살아갈 것인가?
조직과 규율이 없는 농사의 행복
가난은 자유롭다.
“집에 문을 닫지 않으다며?” “가져갈 게 없거든”
감추고 숨길 것이 없기 때문에 ‘가난’은 사실상 자유로움을 준다.
무엇보다 공동체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려는 의지’가 충만하고 혼자 생활해 나갈 수 있을 때, 서로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환의 원칙. 종자의 순환, 땅의 순환, 저장의 순환, 음식의 순환, 몸의 순환
작금의 농업인의 농사 방식은 자립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제초제, 비닐, 화학비료, 살충제를 수시로 살포하는 방식의 농사는 자립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자연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인위적인 과정만이 존재하는 공장과 같은 농장과 공사와 같은 농사가 있을 뿐이다.
#내 손으로 자립의 삶을 짓다_자연이 살찌워 준 자립의 삶
식의 자립
동물들은 보관하지 않는다
농산물은 자연에서 노동을 통해 얻는 것이므로 자신이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나누고 또 나눠야 자연의 몫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
냉장고는 생활필수? 가전회사의 판매 전략에 힘입어 해를 거듭할수록 대형화하고 있다. 대형냉장고는 먹을거리의 과소비를 부추긴다.
냉장고 없이 살기. 흐르는 물을 이용해 음식 보관하기. 건조하기. 염장하기. 재로 저장하기. 효소로 만들어 저장하기
전기없이 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기는 문명의 전환점. 전기가 없으면 자연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된다. 더욱 원시적으로 바뀐다. 건강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기가 없어야 한다.
##자립의 확장
자연이 준 거니까 내게 먹을 양식이 적어지더라도 모두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게 된다. 자연은 분명 나눠 먹으라고 준 것들이니까.
#비자립적 사고의 한계를 넘다_생활의 자립을 넘어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윤리
죽음의 자립. 죽음을 기파하는 윤리의 등장은 삶과 죽음을 대립적 관계로 바라본다.
의료의 자립. 내 몸에 필요한 약초
#온전한 자립은 혼자 서지 않는다_자립의 안정과 확장
자연의 마음으로 본다면 밥이나 똥이나 같고 물이나 오줌이나 다를 바가 없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중간의 어느 곳이나 모두 같으며 흐르는 과정일 뿐이다.
개인은 자립의 최소 단위. 공동체라는 것은 서로 협력해서 서로 자립적인 것을 추구해 나간다고 하지만, ‘집단’이란 최소화할수록 규모에 소요되는 에너지가 작아진다. 따라서 최소한의 규모들이 모여 이러우지는 작은 것들의 연합체가 가장 바람직하다.
농업인이 아닌 자급농부 되기. 자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농업을 지워야 한다. 오히려 농업인이 농사꾼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급농사, 내가 소비하는 모든 것을 직접(백성백작)
잉여물은 어떻게 하는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나의 노동력 말고는 자연이 주는 것이므로 나누게 된다.
패스트푸드 대신 패밀리푸드
직거래와 장터, 장터를 복원해야 하는 이유. 지금은 농민들의 장터가 아닌 상업인들의 장터다. 농부를 위한 장터, 농민장터가 부활되어야 한다(farmer’s market)
농민장터가 되어야 정보와 소통 그리고 물물교환을 통한 소박한 장터가 만들어진다. 직거래 장터는 농민장터를 말한다. 그래서 귀농일들이 인터넷이나 통신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기존 재래 장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귀농인들이 참여하여 흥을 돋우고 과거의 장터 풍습을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른 곳이 무너져도 자급자립이 가능한 지역경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지역장터, 농민장터의 부활뿐이다.
자동차와 통신량 줄이기. 나의 과제다.
지역경제가 아니라 자립경제여야
돈 대신 교환의 활성화
수없이 작은 단위로 나뉘어 살아가는 것. 나는 마을 사람들과 애써 어울리지 않는다. 조거와 밭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
어떤 조직을 가지면 안 된다. 개인 간에는 특정한 사안에 따라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조직은…유지비용이 든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조직은 비대하면 비대할수록 보이지 않는 통제가 이루어지고 계급이 분화되며 갈등이 노골화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흩어져야 한다.
잠시 소용돌이를 만나서 머물고 또다시 흩어져 흐른다. 이것이 거대하고 도도한 삶과 자연의 흐름이다. 자연은 그렇게 끊임없이 작은 개체로 더 작은 개체로 분화하며, 그 흐름의 보이지 않는 원형 속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틀이며, 자연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은 그 안에서 자립을 위한 끈들을 자유하고 있는 것이다.
자립은 자유로운 존재의 처음이자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