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책과 역사. 강명관. p537
조선의 서적문화는 실로 다양하고 풍부하지만, 한편으로는 오해와 왜곡이 적지 않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 발명되었음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공부의 길에 들어선 이래로 내게는 이런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일한 금속활자인데도 왜 한국은 출판과 인쇄 그리고 지식의 역사가 서양과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는가? 나는 고려의 금속활자는 ‘최초’란 것 외에는 별반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또 하나의 의문은 이른바 책의 중요성에 대한 판단기준이었다.
성종 때 출간된 『두시언해』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15세기 국어를 연구하는 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한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15세기라는 콘텍스트에서 이 책의 중요성이다. 그 시대에 『두시언해』를 읽었거나 읽을 만한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었을까? 반면 『삼강행실도』는 여러 차례 많은 수량으로 간행된 책이다. 한 번에 3000부 가까이 찍을 때도 있었다. 당대에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기준으로 한다면 『두시언해』보다 『삼강행실도』가 훨씬 중요하다. 『두시언해』는 소수 문인들의 시세계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삼강행실도』는 민중의 머릿속 생각을 바꾸어놓았던 것이다.그렇다면 어느 책이 더 중요한다? 이런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조선시대 책의 인쇄와 유통, 국가와 사회의 축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책들에 대한 책을 쓴다.
책이 말해주는 것, 책이 말해주지 않는것
나의 대뇌 속에 있는 것이 아무리 놀라운 진리일지라도 언어화되지 않는 이상 없은 것이나 진배없다.
하지만 석가는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고 했다.(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다-비트겐슈타인) 염화시중 혹은 불립문자의 고사가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언어와 되지 않은 진리 역시 무의미하다. 석가가 설한 경전도 결국은 언어의 뭉치가 아닌가?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할 때의 그 진리 자체가 이미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언어가 음성에 머무른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성대의 떨림으로 음파는 시간 속에서 소멸한다. 음성은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받는다. 이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 문자가 탄생했다. 문자는 언어를 공간에 고정시킴으로써 음성의 시간적 제약에서 탈출한다. 명확히 한계 지을 수는 없지만, 이 고정물이 일정한 형태를 가지면 그것을 우리는 책이라 부른다.
#왜 책의 역사인가?
책의 역사가 끊임없는 자기변신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사실 이 변화는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른다. 나는 이 변화가 죽간에서 종이로 바뀌었을 때의 변화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디지털화가 책, 곧 지식과 정보의 유통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할지라도, 내가 거기 쓰인 문자를 읽고 해석하는 행위는 어떤 변화도 없기 때분이다.
만약 인류의 역사가 진보를 향한 변화라면, 그 변화의 이면에 아주 복잡한 요인이 있다면, 책 역시 반드시 거기에 끼일 것이다. 사유와 정보의 교환을 전제하지 않고 역사의 변화를 기대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이 복음서로 고정되지 않았다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독일어판 성경을 낳지 않았다면, 마르크스의 저작이 간행되지 않았다며, 인류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책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정도전의 꿈
조선을 건국했던 혁명주체답게 고려와 변별되는 새로운 체제와 문화를 기획했다. 이 기획은 서적문화에도 공히 적용되었다. 그는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는 사대부의 나라를 구상했던 바 그 기획은 오로지 인쇄와 출판으로만 가능했다. 정도전은 금속활자로 서적을 찍어내 그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태종에게 의해 제거되지만 그의 기획은 조선으로 고스란히 이관되어 구체화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의 서적에 관해 간단히 서술하면서 정도전의 기획이 갖는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지식의 전파와 유통에 일대 혁명을 일으켜 서양의 근대를 견인했던 것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나는 조선시개의 금속활자를 민족문화의 화려한 꽃으로 보지 않고 다만 조선이라는 국가 내부의 인쇄·출판이 만들어낸 역사라는 콘텍스트에서 읽어낼 것이다.
#한글, 민중문자의 탄생과 책
말하고자 해도 자기 생각을 펼쳐낼 수단이 없는 백성을 위해 세종은 한글을 만들었다…
과연 한글과 금속활자는 잘 결합되었는가? 아니 목판으로 인쇄된 한글 책이 있었던가? 있었다면 얼마나 있었으며, 어떤 의도로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이었던가?
아무리 중요한 책이 있어도 유통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독자 손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서적의 유통은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정약용의 저작은 참으로 중요하지만 사실 당대 민중에게는 그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지식인 내부에서도 정약용의 방대한 경학 연구물을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주 가까운 극소수 지인들 사이에서만 겨우 읽히는 정도였다면,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 것인가?
‘책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임진왜란은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가장 뚜렷한 분수령이다.
책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자 문화의 역사이다. 책의 역사를 따라가면 인간이 쌓아올린 문화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책과 인쇄·출판, 고려 말 사대부의 기획
안타깝게도 고려의 서적과 출판문화에 대한 자료는 희소하기 짝이 없다.
고려에서 가장 많이 찍힌 책? 불교 서적이다
#정도전과 신흥사대부의 출판
정도전의 『삼봉집』에 아주 희귀한 시 한 편이 있다. 제목은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다. 시 앞에 서문이 있어 아울러 인용한다.
대저 선비가 아무리 학문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서적을 얻지 못한다면 또한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동방은 서적이 적어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독서의 범위가 넓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다…물어보자, 어떤 물건이 사람에게 지식을 더해줄까? 타고난 자질이 좋지 않으면, 문장을 통해 얻는 법. 한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서적이 적어서 열 상자 넘는 책을 읽은 이 한 사람도 없다네.
인쇄·출판문화의 새로운 시작_조선의 금속활자
주자소. 금속활자 제작
금속활자에 대한 오해와 의의
금속활자는 다종소량생산을 위해, 대량인쇄는 목판으로(목판제작 많은 비용과 기간 필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조선 금속활자인쇄술의 차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원래 독점…이후 인쇄술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록 전파. 15세기 말까지 약 50년 동안 출판된 책을 초기 간본, 곧 인규내뷸러incunabula라고 하는데, 이 인큐네블러가 약 4만 종에 달했고 인쇄소는 총 250개 소였다고 한다. 인쇄소가 1000개 소 있었다는 자료도 있다.
조선조 금속활자는 한자활자. 한자 수만큼이나 많은 활자 필요. 중문재사전에 수록된 한자가 약 5만 자. 실제 인쇄에 필요한 한자활자의 수는 이것의 열 배는 될 것이다…이는 어머어마한 작업. 국가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금속활자는 새로운 수요에 신속하게 응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다품종 소량 생산이 조선 금속활자본의 존재 의의였다.
한글인쇄? 언해본! 즉 한문을 먼저 쓰고 난 뒤 직역인 국문을 부기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
금속활자를 국가가 소유했다는 것은 바로 국가가 지식의 공급처이고 지식의 유통주체라는 의미. 금속활자로 어떤 책을 찍을 것인가는 오로지 왕과 관료들이 결정.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냈다.
조선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등치시키는 것은 무의미한 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지식 독점을 해체하고 중세를 붕괴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조선의 금솟활자는 중세의 질서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민중문자의 탄생과 책
한문은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의 차별적 체제를 유지하는 결정적 도구였다…한문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곧 지배자라는 뜻이었고 한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곧 피지배자임을 뜻했다.
#문자의 발명, 한글의 탄생
1446년, 세종에 의해 한글이 창제되었다. 이 간편하고 효율적인 문자 덕분에 민중이 책에 접근할 길이 열렸다.
그러나 역사의 실상을 달랐으니, 한글로 쓴 책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삼강행실도』 이 책은 민중을 교화하기 위해 쓰인 것이었으나 불행하게도 민중은 그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한문으로 쓰인 탓이다. 한문으로 쓰인 책으로 민중을 계몽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오류였다.
이 한권의 책이 500년이라는 기나긴 기간 동안 백성을 유교 이데올로기로 의식화할 줄은 세종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열녀의 탄생』)
언문은 어떤 용도로 쓰였나? 언문의 절대다수 사용처는 편지였다. 흥미로운 것은 연애편지의 용도가 많았던 점이다.
사림은 체제의 위기 국면을 『삼강행실도』로 돌파하고자 한 것이었다.
어버이 혹은 남편을 위해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이 야만적 행위는『삼강행실도』로 인해 전파되었던 것. 이런 윤리의 야만적 실천은 주로 민중에게서, 또는 양반가라면 주로 여성에게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양반 남성에게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백성들에게만, 사회적 약자에게만 강요된 윤리였다…‘충’과 ‘효’의 윤리의 외피를 뒤집어 쓴 새로운 무지가 생겨났던 것이다. (『열녀의 탄생』)
#한글 언해서의 문제
농민에게 가장 필요한 서적은 농서인데도 세종11년 5월16일에 찬술을 명한 『농사직설』은 모두 한문으로 쓰인 것이었다. 따라서 농민은 읽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자상하게 가르쳐 농민 모두가 두루 알게 하라”는 세종의 말처럼 농민의 손에 쥐어진 것이 아니었다. 윤리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탓이다.
#서울의 출판·인쇄 기관_주자소와 교서관
#지방에서 만든 책_관찰사가 독점한 지방의 인쇄·출판
##책을 만든 사람들
책은 저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결로부터 말하자면, 장인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는다.
##책값은 얼마였을까?
『대학』이나 『중용』은 논2~3마지기
종잇값은 왜 비쌌을까? 다양한 용도와 수요
#서점은 왜 실패했을까?
북경 유리창 서점가 같은 거대한 서점시장 출현.
조선,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세 나라 중 조선만 서점이 없었다.
서점의 부재는 아무래도 지식시장의 성립을 막고 지식의 유통을 제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금속활자의 나라’라는 자부심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조선의 도서관
홍문관
##중국에서 수입한 책
##일본으로 수출한 책
전쟁은 책을 어떻게 죽이고 살렸는가?
가장 두려운 것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 분서다. 대개 서적은 전쟁으로 인해 소멸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200년에 걸쳐 쌓아올린 서적문화가 붕괴되었다. 우리는 이로 인해 조선 전기까지 전해지던 거의 모든 책을 잃고 말았다.
그 철저한 파괴와 소멸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는 현재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한국 서적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약탈과 식민지시대 때 약탈의 산물이다…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금속활자 약탈이다. 알다시피 이때까지 일본에는 금속활자가 없었다. 풍신수길은 엄청난 약탈품 중 금속활자를 가장 진귀한 것으로 여겨 일본조정(천황)에 헌상했다고…임진왜란이 조선에는 비극이었으나 일본으로서는 자국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대 행운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