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대전. 최제우(최천식 풀어씀). p221
보통 사람의 양심에서 찾은 개벽의 길
진실을 밝히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진실을 포기하든 목숨을 포기하든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최제우 역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포기했다.
현대에도 몇 가지 오해가 있어 『동경대전』의 사상 체계인 동학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오해들은 최제우가 그 당시 민중들의 열망을 어떻게 담아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데서 기인. 동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최제우의 능력이 아니라 그 시대 민중들의 아픔과 갈망이다.
최제우의 남다른 미덕은 민중의 한사람으로서 살고자 했던 진솔함이요, 동학의 특별한 매력은 민중의 열망을 묶어 낸 단순함이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양심이 바로 하늘임을 내세워 신분 제도의 허구를 폭로. 민중의 열망을 담아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러한 진솔함과 단순함이다.
#포덕문_새로운 사상을 세상에 내놓는 까닭은?
최제우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하던 성리학이 구심력을 잃으면서 사회·문화 질서가 무너져 내리던 때였다. 성리학은 관료들의 학문이었기 때문에 관료들이 평민의 신뢰를 잃지 않을 때만이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관료들은 온갖 해괴한 방식으로 평민들을 수탈.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원망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성리학이 구심력을 잃고 사회·문화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마한다.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최제우의 고민이었다. 아편전쟁. 사회·질서가 무너져 가는 때에 서양 세력은 엄습해 오고 조선 사회는 서양의 침략에 대해 전혀 방비가 없었다는 것, 이것이 최제우의 또 다른 고민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서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만 채울 뿐 더 이상 천리(天理)에 따르지 않고 천명(天命)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태를 늘 두려워하면서도 어찌 살아야 할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최제우가 동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사상을 내놓게 된 데에는 이처럼 성리학이 이제 더 이상 삶의 지표가 될 수 없다는 자각과 우리나라도 서양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진단이 담겨 있다.
동학에서 천주를 상제로 이해한 것은 천주를 ‘자연의 섭리’로 이해한 것이다. 동학에서도 천주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아류라는 오해를 받았지만, 동학에서 말하는 천(天)은 ‘야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의미하고, 주(主)는 ‘부모님’, ‘선생님’ 할 때의 ‘님’과 같은 뜻이다. 예로부터 하늘을 가장 존귀한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하늘’을 뜻하는 천(天)자 뒤에 ‘님’을 뜻하는 주(主)자를 붙여 천주라고 한 것이다.
자신의 존엄성을 스스로 깨닫고 자신에게 잠재된 도덕성을 발휘하는 것이 성(誠)이라면, 그러기 위해서 늘 조심하는 것이 경(敬)이다.
#논학문_동학과 서학
동학과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점.
첫째, 신분에 차별이 없다도 말라는 것은 상민도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의미지만 동학에서는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말을 허황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지금 이 세상에서의 평등을 주장한다.
둘째, 기독교에서는 개인 단위로 천당에 가거나 지옥에 가는 것이지만 동학에서는 개인의 운명이 공동체의 운명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세째. 기독교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천주를 받아들이는 데 역점을 두지만 동학에서는 내 양심이 곧 하늘이라고 보기 때문에 양심 밖 하늘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도덕성이나 종교성을 실현하려는 태도와 자신의 양심에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도덕성이나 종교성을 실현하려는 태도 사이에는 커다란 철학적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하늘님의 은택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없는 말이요, 창조해 놓았다는 것 또한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런 말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김없이 질서정연하게 되풀이 되는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양 사람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네 학문을 서도(西道)라 부르고 천주를 섬긴다 말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이라 말하지만, 이것은 하늘의 때를 알고 하늘의 명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하면서 말로는 천주를 섬긴다고 하니, 행동과 말이 이처럼 상반되는 경우가 하나 둘이 아니다. 그 때문에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양심이 하늘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의 이치에 순응할 수 있는 방법을 지니고 태어났으니 그것이 곧 양심이다. 양심이 바로 도이고,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양심을 인정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절대 존재 앞에서 마음을 텅 비울 것을 요구하는 서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최제우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하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하늘님을 섬기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무위이화(無僞而化). 하늘을 섬기는 것은 억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자신의 양심에 따를 때 저절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양심에 충실한 것이 무위(無僞)고 그 결과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 화(化)다.
최제우의 사상은 “양심이 하늘이다”는 한마디로 압축된다. 동학과 서학의 차이도 이 말 한마디에 담겨 있고 동학과 성리학의 차이도 이 말 한마디에 담겨 있다.
#통유문_벗들, 나를 찾지 마시오
#수덕문_동학과 성리학
성인과 보통 사람의 거리는 종이 한 장 차이. 성리학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지만 동학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이 된다.
동학의 민중성은 ‘민중의 도덕성’과 ‘평등 사회’를 필수 요건으로 한다. 이 두 요소를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동학을 크게 오해하게 된다. 동학에서는 민중의 도덕성을 신분제 폐지에 앞서는 전제 요건으로 삼았다.
#통문_질병 치유를 내세우지 마시오
상주 우산 서원 통문. 도남 서원 통문.
#탄도유심급_새 세상은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결실은 훗날 이루어지리니, 지금은 좋은 바탕 마련할 때!
마음은 본래 보이지 않는 것인지라, 하는 일에 흔적이 없다. 마음을 닦아야 덕을 알고 덕이 밝혀져야 길이 열린다. ….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듯 명확하고 멀리 있는 것 같지만 멀리 있지 않다.
#불연기연_어찌 사람에게 앎이 없다 하는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그래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을 기연이라 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그래서 확신할 수 없는 것을 불연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흔히 눈에 보이는 것, 확실한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미묘한 것, 신비한 것을 더 심오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뭔가 심오한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이러한 태도를 최제우는 경계한다.
지식의 추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해야지 확신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해서는 안 된다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서, 유학자들만이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이 있는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불연기연」에서 조차 뭔가 심오한 이치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최제우의 사상을 크게 오해하게 된다.
성인들은 자연 현상을 이해함으로써 자연의 질서를 이해한 것이지 자연의 원리를 먼저 깨닫고 나서 그것을 통해 자연 현상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상민들을 도덕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로 여겼다.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고문 속에서 심문.
최제우는 양반 관료들의 모함과 왜곡에 굴복하지 않았고 정부의 고문과 조작에 죽음으로 맞섰다. 동학을 창도한 것은 최제우지만 어두운 밤일수록 별이 빛나는 것처럼 동학을 빛나게 한 것은 양반 관료들의 모함과 왜곡, 정부의 고문과 조작이었다.
“나를 믿지 말고 그대들의 양심을 믿으라”
#시_’등불이 물 위에 빛나고 있으니’
최제우가 참수된 일로부터 시작해서 최시형이 참수된 일로 막을 내린 것이 동학의 역사다.
최제우는 ‘양심이 곧 하늘’임을 천명함으로써 지극히 까다로운 성리학의 수양 이론을 단순화했다. 양반에게만 도덕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도 똑같은 도덕성이 있음을 선포함으로써 민중의 도덕성에 의해 건립되는 평등 사회의 가능성을 열었다.
‘법이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주는 측면도 있지만 사회적 강자를 정당화시켜 주는 측면도 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행위를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바른 시각이 아니다. 개인의 만행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법에 의해 보장 받은 행위였다.
프랑스 혁명이나 동학 농민 혁명을 통해 법 제도를 바꾼 것이지 입법 절차를 통해 법을 바꾼 것이 아니다. 혁명은 법이 사회적 약자를 핍박하는 도구로 쓰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최제우를 통한 하나님의 의지를 이만치 쉽고 환하게 전달하신 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