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신영복,김종철,최장집,박원순,백낙청이 말하고 프레시안이 엮다. p235
다섯 지식인이 말하는 소통과 공존의 해법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
#우리 시대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제언
프레시안 창간 5주년 기념, 2006년 9월부터 11월까지 신영복, 김종철, 박원순, 최장집, 백낙청 등 이 시대의 대표적 지식인 다섯 분을 모시고 진행한 연속 기획 강연
우리는 「프레시안」이라는 새 언론을 굳이 만들어야 했던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세상은 크게 변하고 있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 눈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위기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저널리즘’이란 본디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하는 것을 본령으로 한다. 그러나 그날그날의 변화가 쌓이다 보면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기가 열리는 때가 있다. 바로 전환기다. 그럴 때 언론이 그날그날의 자그마한 변화에만 매달린다면 좀 더 중요하고 큰 변화를 놓칠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좀 더 깊이, 좀 더 넓게, 좀 더 멀리 보는 언론이 되고자 했다.
다루어진 주제 역시 우리 시대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이다.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_신영복
진정한 소통은 사라지고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과 대립만 남아 있는 곳.
“그런데 저는 어떻게든 목포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 즉 속도와 효율만을 중시하는 논리를 ‘도로의 논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철학을 ‘길의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도로의 논리’에 의해 빚어졌습니다. 이제 그것을 대체하는 ‘길의 철학’이 필요한 때가 됐습니다.”
이해관계만 놓고 대립하는 사회에서 인문학은 설 곳이 없다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센 사회다”를 먼저 수긍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난 세월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온 사회.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제를 진,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과 닯았지요. 이렇게 나이 든 사회라서 우리사회는 고집이 무척 셉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도 좋은가?” “인문학이 이토록 주변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이 지속 가능할까?”
손님을 초대해 놓고 그저 비싼 음식을 내놓기만 하면 대접을 잘했다라는 생각,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3만 달러로 오르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리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그리고 이런 인문학적 사고가 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화폐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는 가치입니다.
화폐 가치가 전면화되면 인간의 정체성도 사라진다
모든 노동에 대해 ‘얼마짜리’인지 묻는 사회
우리는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지만 사실 시장은 비시장적인 부분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게 화폐 가치로만 환산돼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질은 사라지고 양만 남습니다.
“이게 얼마짜리냐”라는 기준만 남게 되는 셈이죠.
우리는 목표의 올바름은 선(善)이라 부릅니다. 또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고 합니다. 그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를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의 달성으로 모든 수단이 합리화되는 사회에서는 ‘게임의 룰’이 사라집니다.
경영학과에서 경제학과로 전과한 이유? “경영학 수업 첫 시간에 ‘부채도 자산’이라는 말을 하더라. 그런 말을 들으니 ‘아니 이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제 경우에는 경제학 수업 첫 시간에 들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데 경제학의 원칙이다”라는 말이 두고두고 고민을 안겨 줬습니다.
도로의 논리와 길의 철학
‘도로의 논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쿠데타를 해서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이상한 논리를 오랫동안 받아들여 왔습니다.
일단 이기고 보자는 ‘도로의 논리’ 속에서 소통은 요원하다
“세상에 나쁜 놈이 이기는 경우도 있구나” “이기는 게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구나. 한쪽에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쪽에 어린 시절 강가에서 코피를 씻던 나처럼 좌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길의 철학. 길 위를 걷는 것 자체가 삶. 삶을 희생하여 추구하는 목적이란 정말 중요한 것이과 그렇지 않은 것, 진정한 목적과 수단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겠지요….도로의 논리, 그러니까 과정은 무시한 채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는 논리, 그것은 자본의 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자본은 회전 속도가 빠를수록 더 많은 이윤을 얻습니다.
결국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는 ‘도로의 논리’를 넘어서 과정 그 자체를 존중하는 ‘길의 철학’을 사회화하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합니다.
근대 사회는 자본의 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증식을 거듭해야 하는 자본의 원리는 속도와 효율의 논리를 사회화한 것이거든요….”자본주의 사회가 정말 진보된 사회다” 혹은 “사회의 근대화는 진보의 과정이었다”라는 이야기는 이제 다시 검토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근대화의 결과물. 근대성의 존재론 논리가 대화와 소통의 문화를 배제해 왔습니다.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의 전환이 진정한 소통의 전제 조건입니다.
거울에 비친 시대, 사람에 비친 시대.
묵자의 불경어수(不鏡於水) 경어인(鏡於人). 물을 거울로 삼지 말라, 물이 아니라 사람에 비추어 보라.(무감어수 경어인)
천하통일? 한 개의 국가만 승리자로 남기고 모두를 몰락시켰습니다. 우리는 소수의 승전국에 주목할 게 아니라 다수의 패전국을 봐야 합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전쟁을 일삼는 패권적 질서의 외양은 잠시 화려해보일지 모릅니다. 거울(물)에 비춰보면 이런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나타나겠지요. 하지만 거울(물)이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 비춰보면 다른 모습이 나타나겠지요. 승리의 혜택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압도적으로 많을 테니까요. 아마도 사람에 비추어본다면 전쟁의 그늘에서 피폐해진 삶이 드러나겠죠.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거울에 비친 모습 대신 사람들의 삶에서 드러난 모습을 통해 시대를 파악하라는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큰 울림을 남깁니다.
산업자본주의는 어쨌거나 가치를 창출하기는 합니다. 물건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지요. 비록 그 과정에서 투입된 노동력과 자연에 대해 제대로 갚아주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금융자본주의는 가치 창출과는 아예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거대 자본이 적은 자본을 흡수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서도(붓글씨)의 관계론
조화와 균형의 예술, 붓글씨에서 관계론적 원리를 찾다
언론은 진실과 비판을 본령으로 합니다.
진실은 사실의 창조적 구성이며 이런 창조는 당대 사회의 과제를 중심에 둔 비판적 기능으로 이루어집니다.
바닷물을 그릇에 뜨면 그 그릇에 담긴 것이 바닷물인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다라는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못합니다.
언론의 역할은 ‘사실 보도’가 아니라 ‘진실의 창조’입니다.
아래로 손을 내미는 하방연대, 사회 통합은 강물처럼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가장 잘 들여다보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난파 직전의 배에서 내리는 것을 두려워 마라_김종철
성장주의 패러다임의 극복은 불가능한가?
한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은 대외 의존을 심화시키는 성장 방식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져 왔습니다. 만약 이러한 경제 성장 패턴을 계속 확대하는 것 외에 어떤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고랴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정당이 집권을 한다고 해도 결국 언젠가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한미 FTA를 추진하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시점에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가장 근본적인 문제. 그것은 ‘경제중심주의와 에콜로지(생태주의)의 갈등’이라는 문제로 환원시켜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세계화란 결국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세계 지배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식민주의의 또 다른 형태임이 분명합니다. 직접적인 군사력에 의핸 지배라는 형태가 아니라, 개발이니 성장이니 하는 이름으로, 좀 더 세련된 형태의 경제적 지배를 통해서 자본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구도입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개념을 하나로 묶은 것. 이 말에서 방점은 ‘지속 가능성’에 있지 않고, ‘개발’ 혹은 ‘성장’에 있다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졌습니다.
대통령 직속 기관, 지속가능발전위원회? 거기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이것은 새로운 환경 정책을 도입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경제 정책의 기본 노선을 바꾸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죠. 내 생각엔 이 기본 노선은 조금도 변화지 않았습니다.
딜레마에 빠진 우리, 어디로 가나?
‘압축적’인 근대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농업 몰락 현상을 불러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굉장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누구나 지구 환경이 위태롭다는 점을 잘 알고 있죠.
그러나 당장 자신의 생활로 돌아오면 너나 할 것 없이 하루하루의 생계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결국 지구는 더욱더 파국적 위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지금처럼 성장만을 최우선의 가치로 신봉하는 사회에서는 어지간한 사람의 심성은 다 나빠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당장 아이가 학교가 다니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착한 심성을 내던져야 사다리의 꼭대기에 성공적으로 갈 수 있는 게 한국 사회의 현실입니다.
리영희 선생의 지적 활동 마감 선언. “내가 산 시대가 지금 시대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사상가 이반 일리치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거창한 구조물을 건축하거나 뛰어난 문화재를 남기거나 하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이 자신의 이웃과 함께 일하고, 서로 돕고 보살피는 가운데서 생을 즐기는 데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민중의 평화로운 삶’이었습니다.
서구 선진국은 결코 우리가 모방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중국의 농업 문제 전문가, 윈 티에쥔이라는 지식인. 그는 동아시아 국가들-중국, 한국, 일본은 근본적으로 소농에 기반을 둔 농업 중심 국가로 가야만 장기적으로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서구 국가들이 이른바 선진국이 된 것은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지배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윈 티에쥔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미국, 유럽의 길을 좇아가자는 얘기는 결국 대외적으로 다른 민족에 대한 억압, 대내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을 구조화하자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농업을 살리고, 농민과 농촌을 보호하라
농업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는 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사태를 근본적으로 볼 수 있는 상상력을 가져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태를 근본적으로, 장기적으로 볼 수 있는 상상력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상력은 사심 없이 양심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에게만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동안의 경제 개발을 통해서 한국 사회는 전체적으로 물질적 자본은 크게 부유해졌는지 모르지만, 이른바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은 거의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인간적으로 빈곤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겁먹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서로 연대하고 행동하라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건 장구한 인류사에서 ‘찰나’에 불과합니다.
이반 일리치의 칠레 아옌데 대통령에 대한 충고?
“당신의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장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칠레 도시의 주된 교통 수단이 되게 하라. 자동차로는 절대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없다.” 이 충고는 철학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자동차는 배타적인 기술이지만, 자전거는 공생의 도구라는 얘기죠.
Peak Oil. 타이타닉 호에서 뛰어내릴 준비 하자
어차피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실존적 한계 때문에 철저히 ‘지역적 행동들’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Think Globally, Act Locally)
#시민운동은 블루오션이다_박원순
“얘야, 세 사람 이상 모인 데는 가지 마라. 위험하니까” “공공의 영역에는 일절 개입하지 말고, 네 몸 하나만 보존하는 데에 신경 쓰라”는 의미. 제 어머님 말고도 우리 모든 부모님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시민운동? 다양성을 가지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한 운동. 그러나 어떤 시대든지 그 시대의 과제가 있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지식인과 시민들의 운동이 있었다
남들이 다 가는 데로 따라가면 차별성을 갖기 힘듭니다. 남들이 안 가는 곳 찾아가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공공 영역은 빈틈이 너무 많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다 보면 나중에 분명히 자기가 먹고사는 길이 됩니다. 저는 우리가 이 거대한 블루오션을 내버려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운동이라도 창의성과 재미를 갖추어야 합니다. 사람들한테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다가가야 하는데 과연 그런 역할을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육 문제도 거창하지만 작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집회도 축제처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방법을 많이 개발해서 길 가다가도 ‘참여해보자’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민운동, 사회운동은 그 시대의 과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그것은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시민운동은 자기 성장의 기회
#시민이 참여하는 ‘한반도식 통일’의 해법_백낙청
미국에 대해서도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라
국민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창의적 협력사업 개발이 필요하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협력입니다. 기존의 사업을 지속함은 물론 남북 서로에 이득이 되고 국민의 상상력에 호소할 수 있는 창의적 협력사업을 계속해서 개발해야 합니다. 처음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을 때 얼마나 국민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습니까.
핵무기의 비윤리성을 지적해야 한다
한반도 핵 위기의 주범은 미국
“여럿이 함께 |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에 대한 1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