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16년 11-12월. 통권 151호
#무위당의 생명사상과 21세기 민주주의_김종철
‘무위당학교’ 강의
독서인(讀書人) 무위당
보통 저널리즘에서는 장 선생님을 교육자, 사회운동가, 서예가 등으로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만약에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독서인’이라는 명칭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책벌레처럼 책에 빠져서 살았다거나 혹은 방대한 책들이 소장된 서재를 소유하고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 짐작이지만, 선생임은 확실히 동서고금의 많은 고전을 섭렵하신 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다독가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지 선생님은 스스로 교육하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소싯적부터 항시 가까이 책을 두고 그것을 음미하는 시간을 즐긴 것으로 생각됩니다.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글이나 책을 쓰기 위해서 분주히 문헌을 뒤적이죠. 선생님도 물론 정보를 얻으려고 책을 읽을 때가 많았겠죠.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선생님은 평생 동안 글을 쓰지도, 책을 저술한 분도 아닙니다. 그리고 특별히 어디에 써먹기 위해서 책을 보신 분도 아닙니다. 장 선생님은 아마도 책을 통해서 지혜롭고 맑은 정신을 지닌 선현들과 만나는 즐거움 때문에 독서를 계속했고, 그런 독서를 통한 깨달음이나 앎을 아무 격식 없이 생활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자유로이 나누는 것을 아주 좋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독서인으로서의 무위당을 생각하면, 제게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공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장 선생님이 번번히 언급하거나 인용한 고대의 사상가는 공자가 아니라 노자였으니까요…왜 노자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을까요? 제멋대로의 생각입니다만, 사람들과의 교류나 사귐이 별로 없었던 탓이 아닐까요. 그런데 공자의 경우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공자는 늘 사람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논어』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공자는 언제나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공자의 삶과 언어는 기본적으로 ‘대화적’입니다. 반면에 노자의 말을 사물의 근본을 꿰뚫고 정곡을 찌르지만, 그 말투가 가파르고 날카롭습니다. 매우 고독하게 지내는 사람 특유의 말투라고 할까 그런 것이 느껴집니다.
텍스트의 포도밭
그런데 한 가지 더 공자와 무위당의 주목할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선현들이 말한 것, 즉 독서를 통해서 얻은 것을 자기 나름으로 풀어서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자는 ‘술이부작(述以不作)’이라는 말로 표현했죠. 내가 지어낸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다 옛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내가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라구요. 그러나 아무리 지어낸 게 없다고 해도, 수많은 옛 언설 중에서 특정한 글귀를 기억하고 그것을 풀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상적 개입이라 할 수 있고, 그 과정을 통해서 또한 자기 나름의 새로운 사상이 형성되는 것이죠.
‘독서인’으로서 공자나 무위당을 생각할 때 특히 주목할 것은 그분들이 일종의 ‘쾌락주의자’였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분들이 선현들이 남긴 기록을 읽을 때 어떤 의무감이 아니라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글귀 하나하나를 깊이 음미하면서 읽었다는 것입니다.
『텍트스의 포도밭』에서 일리치는 12세기에 살았던 어떤 수도사를 가리켜 자신의 둘도 없는 벗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문자로 된 기록을 통해서 접할 수밖에 없지만, 그 기록에서 느껴지는 중세 수도사의 인격과 정신세계에 대해서 어떤 동시대인들보다도 더 친화력을 느끼기 때문이죠.
생각해보면 꼭 살아 있는 사람만이 우리의 친구는 아닙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도 우리는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책을 읽으면서 늘 그런 친구를 만나서 사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기쁨을 느끼며 천천히 읽게 되는 독서라면 말이죠.
함께 어울려 살자
절박하게 생명운동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면서도 무농약농사나 유기농법보다도 더 중요한 게 사람을 아끼는 것이라고 늘 강조했습니다. 모두를 껴안고,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에 철저한 분이었습니다. 함께 어울려 살자. 이게 무위당 생명사상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돈이 없으면 남을 도와줄 수 없다고 미리 체념하기 일쑤인데, 이 일화는 돈 없이도 얼마든지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생님이 사람들을 돕는 방법은 실은 늘 이런 식이었어요. 즉, 처지가 딱한 사람과 함께 있어 주는 것 말입니다.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은 이름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돼지는 살찌면 도살을 당하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유명해진다면, 그것은 돼지가 도살당하듯이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선생님의 좌우명은 ‘겸손’이었습니다…문제는 언제나 잘난 사람들, 소위 엘리트들이죠. 그들은 잘난 척하면서 늘 세상에 분란을 일으키고 결국은 번번히 스스로 몰락해버리고 맙니다. 혼자서 망하면 좋은데, 문제는 그들 때문에 세상이 위험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사람들이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소위 ‘거목’들 중에서 스승을 찾기 때문이라고.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우리 주변에서 말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얼마든지 스승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오히려 유명한 사람은 감출 게 많은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잖아요. 공자님 식으로 말하면, 도(道)가 사라진 시대란 말이에요. 이런 시대에 출세를 하고 성공을 한다는 것은 도리어 부끄러운 일이라고 『논어』에도 적혀 있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상에 사로잡혀 모두가 나르시시즘에 빠져 사는 게 오늘날 우리들의 공통적인 실존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각자는 타자와의 관계가 단절된 불모의 정신적 사막에서 매우 외로운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옥이란 경이를 잃어버린 상태. 친구와의 우정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든지, 환한 햇살 속에 익어가는 옥수수밭을 보면서도 경이의 감정이 솟아오르지 않는 게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인은 그런 경이의 감정이 사라진 상태, 즉 ‘지옥’이란 다른 말로 하면 권력욕망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이로움이 죽을 때, 권력(욕망)이 태어난다.”
선거에 오래도록 익숙해진 사회에서 불쑥 제비뽑기 방식을 채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층 조직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사이비 민주주의를 빨리 청산하고, 평민들이 실질적으로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는 틀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틀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매우 구체적으로 제안돼 있고, 또 세계 여러 곳에서 실행 중입니다. ‘숙의민주주의’라는 게 그것입니다. 즉, 전화번호부 등을 이용하여 제비뽑기로, 즉 무작위로 일정 수의 시민들을 뽑아 소규모 회의체를 구성하여 자유료운 토록과 숙고 끝에 어떤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방식이죠. 저는 이 방식을 본격적으로 정치에 도입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와 같은 선거방식의 근본적 문제도 지적했습니다. 즉 지금 정치하겠다고 선거판에 나서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잘났다고, 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내세우고 타자를 배제하려 한다, 그러니 이런 배타성의 원리로 하는 시스템으로는 절대로 좋은 사회가 만들어질 리 없다, 그런 말씀이었어요. 현실의 정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나이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런 견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급진적(radical)인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급진성’이 아니고는 우리에게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보기에 무위당의 생명사상은 단순한 개인적 윤리의 차원을 넘어 진실로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정치사상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