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이반 일리치. p359
이반 일리치의 (1978-1990)12년간의 연설문.
현대의 상식과 진보에 대한 급진적(근본적radical) 도전
현대의 모든 진리를 의심하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에는 뚜렷한 역사적 시작점이 있었고 따라서 그 끝도 있으리라”
현재는 미래의 과거
일리치는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고자 했다. 나는 일리치가 지금의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전에 어떻게 생각할지를 가르쳐주려했다. 생각의 전환은 삶의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해석과 재사유가 가능하면, 변화의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간디의 오두막에서서_1978년 1월
세바그람 아쉬람 프라티시탄 개원사_인도 와르다 세바그람
이 집을 지을 때 수고한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손입니다. 제가 오두막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이곳은 집입니다.
주택과 집은 차이가 있습니다.
주택은 사람이 짐과 가구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사람 자신보다 가구의 안전과 편의에 더 치중하여 만든 곳입니다…우리는 살아가면서 모으는 갖가지 가구나 물건이 결코 내면의 힘을 키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말하자면 장애인의 목발과 같습니다.
그런 편의를 더 많이 가질수록 거기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고 삶이 그만큼 더 제약을 받습니다. 그와는 달리 간디의 오두막에서 보는 종류의 가구는 차원이 달라서 거기에 의존하게 될 까닭이 거의 없습니다. 온갖 편의를 짜 넣은 주택은 우리가 약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갈 힘을 잃을수록 재화에 의존합니다.
사람들의 건강은 병원 의존하고 우리 아이들의 교육은 학교에 의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애석하게도 세상이 그런 편의를 더 많이 지닌 이를 우러러본다는 사실은 참으로 불합리합니다…간디의 오두막에 앉아 이렇게 뒤집힌 현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니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산업 문명을 인간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생각한다면 잘못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경제 개발을 위해 더 크고 더 뛰어난 생산 기계를 만들고 기사와 박사와 교수를 점점 늘리는 것은 말 그대로 과잉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바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간디의 방식? 진짜 이유는 간디의 원칙에서는 거간꾼이나 중앙집중체제가 설 자리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획자나 관리자, 정치가가 소외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진실과 비폭력이라는 단순한 원리가 어떻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뭔가 이권이 있는 사람뿐입니다.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만 사람이 품위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 또 산업화로 나아갈수록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할 것입니다. 이 오두막은 사회와 조화를 이룰 때 얻는 즐거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급자족이 으뜸입니다.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간디는 생산성은 부족함을 메우는 한도 내에서만 유지해야한다고 거듭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생산 방식은 한계를 모르고 끝없이 증가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이제까지 용인해 왔지만, 이제는 사람이 기계에 의존할수록 파멸을 향해 더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진보를 원한다면 그런 방법을 틀렸다는 사실을 문명세계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모든 계획에서 자전거가 제2의 자리로 밀려나고 자동차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통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시하고 높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챙기고 있습니다.
간디의 이 오두막은 보통 사람의 존엄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세상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제학에 가려진 삶의 축복_1988년 3월11일
미국 동부경제확회 협의회: 인간경제를 주제로 한 연차 토론 강연문. 보스턴
생각건대 지금이 이른바 ‘개발’에 거는 희망이 꺼져갈 때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비경제적 은총에 대한 연구를 해주십사 부탁할 시점으로 보입니다.
저는 ‘가치value’라는 낱말을 쓰지 않습니다. 저는 이 경제 용어가 어쩌다 최근 우리의 담론 속에 끼어들어와 ‘선good’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경제학자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역사학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저는 미래에 대한 강박적 억측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으로 역사를 공부합니다.
역사학자에게 현재는 미래의 과거로 나타납니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경제학의 전제. 역설적이게도 경제성장의 반反생산성이 경제적으로 증명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 용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굳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대안 경제학자가 근간으로 삼은 부족, 필요, 가치, 자원이라는 전제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종류가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경제학을 번지르하게 치장하지만 그 기본 전제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개발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의문을 제기한 사람 가운데 코르는 안녕한 상태가 유지되려면 차원 해석으로 드러나는 요소가 충족되어야 하며, 계량적으로 측정되는 어떤 복지로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많은 사람의 스승이 됐습니다.
‘경제학의 시대는 사실상 고용의 시대와 일치했다. 고용이 노동을 조직하는 주된 방식으로 발전한 것은 지난 2백 년 동안에 지나지 않는다…’
필요를 느끼도록 만들어라.
1960년대 이후 필요를 갖는 것이 배움의 목표가 됐습니다. 필요를 갖도록 교육하는 게 갈수록 더 중요한 작업이 됐습니다. 의사는 이제 환자의 필요를 정의하는 일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이제 환자를 교육하는 ‘의무’까지 받아들입니다. 이제 환자는 진단되는 필요를 자기 것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결핍된 존재로 태어나다.
문화를 경제학으로, 선을 가치로 탈바꿈하면 결국에는 개인의 자아가 뿌리를 잃어버리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을 고유한 맥락이 아니라 결핍이라는 추상으로 정의해도 자연스러워 보이게 됩니다.
경제학이 측정 못하는 것. 경제학의 언어로는 4세대가 사는 집에서 가족 구성원이 매일매일 살면서 겪는 고마움이나 부담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경제 지표로는 미국 탬파와 일보 요코하마의 양상을 비교하면서 추상적인 부분만 측정할 수 있을 뿐. 애초에 문화 속에서 있을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 참가자가 희소성을 전제로 실용적 선택을 해서 나타나는 결과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직접성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사랑의 경험에서는 행복한 웃음에서부터 슬프고 쓰라린 눈물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축복이 있습니다(풍요로움의 축복 vs 빈곤을 야기하는 희소성)
사랑이 부정가치가 되다. 제가 문화가 경제로 탈바꿈한다는 말로 설명한 현상은 대개 사회가 갈수록 더 화폐화된다는 점에서 논의됩니다…경제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문화적 은총은 부정가치가 됩니다…할머니를 위한 음식 준비. 원래 할머니에게 당연히 해주어야 하는 대우이지만 그 활동이 할머니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되는 하나의 가치로 해석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부정가치로 바뀝니다. 문화적 맥락이 황폐해지는 그때 그곳에서 경제적 가치가 대두되면서 축복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희소성을 전제로 선택에 형식을 부여하는 개념을 가지고는 탈것이 이동 수단을 철저하게 독점해버려 발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 사람의 경험을 측정할 길이 없습니다…지금의 지리적 환경 때문에 그의 발은 길이 막힙니다. 공간은 탈 것을 위한 기간시설로 변했습니다. 이를 두고 발의 노후화라 부른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화’(마취와 비슷하다 할 수 있는 상태) 됐기 때문에 제가 부정가치라 칭하는 것이 유발하는 손실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축복을 회복하기 위한 조건. 이 담론에서 핵심 쟁점은 경제학을 어떻게 한정할 것인가, 그리고 특히 경제 구조 때문에 문화 영역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어떻게 걷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평화의 사라진 의미_1980년 12월1일
아시아 평화연구학회 제1회 총회 개회사
평화를 번역하는 일은 시를 번역하는 일만큼이나 힘듭니다.
같은 문화에서도 중심부냐 주변부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심부에서는 ‘평화의 유지’를 강조하는 반면, 주변부에서는 ‘평화로이 내버려두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개발 10개년’이 세 번에 걸쳐 이어지는 동안 후자의 의미인 민중의 평화는 사라졌습니다…
즉 전 세계에 걸쳐 ‘개발’이라는 허울 아래 민중의 평화를 상대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개발이 이루어진 지역에서 민중의 평화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는 민중으로부터 우러난 경제 개발 제한이 민중의 평화를 회복하는 제일의 조건이라 믿습니다.
샬롬 vs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는 이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도시에 법과 그 도시의 질서를 선포하는 것. 샬롬과 팍스 로마나는 같은 시대 같은 곳에서 존재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팍스는 ‘피스’가 되어 세상 속으로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팍스는 2천 년 동안 지배 계층이 사용하면서 온갖 것에 가져다 불일 수 있는 말이 됐습니다.
팍스 오이코노미카가 평화를 독점하다. 역사적 연구가 결여된 평화 연구. 하지만 이런 연구 과정에서 희소하지 않는 것을 평화로이 누리는 민중의 평화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 남겨진 채 조명을 받지 못합니다.
희소성이라는 전제는 경제학에서 필수적이며, 형식경제학은 이 전제 한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희소성은 대부분의 역사에 걸쳐 대부분의 사람들 인생살이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희소성이 삶의 모든 측면으로 번진 데에는 뚜렷한 역사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 이후 유럽 문명에서 진행된 일입니다. 희소성이라는 전제가 점점 확장되면서 평화는 유럽 이외에서는 어디에서도 선례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의미를 얻었습니다. 평화는 팍스 오이코노미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팍스 오이코노미카는 형식 ‘경제’ 강국들 사이의 균형입니다.
개발에 반대하는 자, 평화의 적이 되다. 양측 모두 생상은 늘리고 소비 의존도를 높이고자 했습니다. 개발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무엇보다고 중요한 공리가 됐습니다.
평화와 개발이 연계되면서 개발에 도전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이러한 도전이 이제 평화연구의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개발에는 본질적으로 비용 문제가 필연적으로 따릅니다만, ‘누가 무엇을 가져가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묻혀버렸습니다…저는 더 이상의 모든 성장 속에 함축돼 있는 자급에 대한 폭력을, 그리고 팍스 오이코노미카에 가려 있는 폭력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을 근본적 평화연구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습니다.
이론과 실제를 아울러 모든 개발은 자급 중심의 문화를 변형시켜 경제 체제에 통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발은 언제나 자급 중심의 활동을 희생하고 그 대신 형식경제 영역을 확장합니다.
개발 과정에서 환경을 개조하여 물자의 생산과 유통을 위한 자원으로 만드는데, 이때 필연적으로 자급 활동을 위한 조건이 제거됩니다. 개발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모든 형태의 민중의 평화를 희생하고 그 자리에 팍스 오이코노미카를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지켜주던 평화. 평화를 위한다는 팍스는 가난한 사람과 그들의 자급 수단을 전쟁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땅의 평화’는 이처럼 전쟁 당사자 간의 휴전과는 달랐습니다. 근본적으로 자급 지향이던 평화의 의미는 르네상스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왜, 지배자의 평화만 있어야 하는가? 팍스 오이코노미카는 제로섬 게임이 흔들림 없이 진행되도록 보호하고 보장합니다. 모두가 이 게임에 참여하여 호모 오이코노미쿠스의 규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습니다. 지배 모형에 맞춰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평화의 적으로 추방당하거나 순순히 받아들일 때까지 교육을 받습니다.
#빼앗긴 공용, 들판과 고요_1982년 3월21일
‘아사히 신문 학술토론회: 과학과 인간-컴퓨터가 관리하는 사회’ 개회사_일본 도쿄
사람이 전자기기에 묶여 기계 같은 행동을 하면 사람의 안녕과 존엄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길게 볼 때 대부분의 사람은 견디지 못합니다. 프로그램된 환경이 끼치는 병적 효과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그런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은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치 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정치 과정이 무너지고, 결국 관리 받기를 요구합니다.
환경은 자원이 아니라 공용이다
정치생태학의 근본 특징? 환경은 자원으로 보는 견해와 달리 저는 환경을 공용으로 봅니다. 특히 이 부분을 우리가 구별할 능력이 있어야 건전한 이론 생태학뿐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생태 법제를 실질적으로 구성할 수 있습니다….선禪시인 바쇼이 제자였다면…제가 사람의 자급 활동이 뿌리내리는 공용과, 현대의 생존을 좌우하는 상품을 경제적으로 생산하는 자원이 어떻게 다른지 단 17개의 음절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공용commons’은 중세기 영어 낱말. 환경 중에서도 자기 집 대문이 문지발 바깥에, 즉 자기 소유의 바깥에 놓여 있으나, 상품 생산을 위해서가 아니라 집안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할 권한이 인정된 부분을 가리켜 공용이라 불렀습니다…이 관습법은 성문화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성문화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현실을 지켜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용에 관한 법률에는 사람이 다닐 권리, 물고기를 잡고 사냥할 권리, 가축에게 풀을 먹일 권리, 숲에서 땔나무를 모으고 약초를 캘 권리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울타리가 새운 생태학의 질서.(인클로저)
공용에 울타리를 치자 새로운 생태학적 질서가 시작됩니다. 농민이 행사하던 초지 지배권이 물리적으로 영주에게 넘어간 게 다가 아닙니다. 사회가 환경을 바라보는 태도에 철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나타냅니다…그 이전에는 어떠한 사법 체제에서도 환경은 사람이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생계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용으로 간주했습니다.
울타리 이후 환경은 일차적으로 ‘기업’이 마음대로 쓰는 자원으로 변했습니다.
기업은 임금 노동을 조직함으로써, 소비자가 기본적 필요 충족을 위해 의존하는 상품 및 서비스로 자연을 탈바꿈시켰습니다. 이 탈바꿈을 정치경제학은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초지가 아니라 도로를 생각해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멕시코시티. 구시가지에서 길거리는 진정한 공용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길에 의자를 놓고 앉아 커피와 데킬라를 마셨습니다. 아이들을 길가 도랑에서 놀고, 사람들은 여전히 길을 이용하여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길은 사람을 위해 닦은 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여느 공영과 마찬가지로 길거리 자체도 사람들이 거기 살면서 그 공간을 살만한 곳을 가꾼 결과물이었습니다.
멕시코시티의 신시가지에서 길은 더 이상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이제 길은 자동차와 버스와 승용차와 트럭을 위한 곳입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도중이 아니라면 사람은 길에서 거의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이 길거리에서 앉거나 멈추면 차량에 방해가 되고 차량은 사람에게 위험이 됩니다. 길은 공용이었으나 이제는 그저 차량유통을 위한 자원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사람은 더 이상 스스로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차량이 사람의 이동력을 대신합니다. 사람은 띠에 묶여 운반될 때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일어난 근본적 변화. 영주의 초기 사유화에 대해서는 이의가 제기되었으나, 초지나 길이 공용에서 자원으로 바뀌는 더 근본적인 변화는 최근까지도 아무런 비판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소수가 환경을 전유하는 행위는 명백히 용납할 수 없는 남용 행위로 인식됐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사람을 산업 노동력과 소비자의 구성원으로 격하시키는 더욱 중대한 변화는 최근까지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사회의 밑바탕에서 생겨난 새로운 종류의 ‘대중지성’이 이제까지 어떤 일이 벌어져 왔는지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울타리는 모든 역사를 통틀어 생존이라는 도덕경제가 의존하는 바로 그 종류의 환경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울타리를 일단 용납하고 나면 공동체가 재정의됩니다. 울타리는 공동체의 지역 자율을 잠식합니다. 공용에 두른 울타리는 이렇게 자본주의자에게 이익인 만큼 전문가와 정부 관료에게도 이익이 됩니다.
정적은 공용이다. 확성기. 그날부터 마이크를 누가 잡느냐에 따라 누구의 목소리가 확성되는지가 결정됐습니다. 정적은 이제 공용에 포함되지 않게 됐습니다. 확성기를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을 벌이는 자원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로써 지역의 공용물이던 언어 자체가 소통을 위한 국가 자원으로 바뀌었습니다…확성기가 잠식해 들어오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똑같이 제목소리를 부여해 주던 그 정적이 파괴됐습니다. 확성기를 이용할 수 없으면 그 사람은 입막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제 두 가지가 비슷하다는 점이 분명하게 이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공간이라는 공용이 섬세하여 교통이 동력화되면서 파괴되는 것처럼 말이라는 공용 역시 섬세하여 현대적 통신 수단이 잠식해 들어오면 쉽사리 파괴된다는 점입니다.
남아 있는 공용을 방어하라…사람을 흉내내는 기계가 그 정적을 우리이게서 앗아갔습니다. 우리가 이미 기계에 의존하여 이동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것도 점점 더 기계에 의존하기 쉽습니다. 공용이던 환경이 이처럼 생산을 위한 자원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환경 퇴화의 본모습입니다. 이런 퇴화에는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역사가 일치…아직까지 남아 있는 공용을 방어하기 위한 행동을 조직하려면 이런 탈바꿈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방어하는 것이 1980년대 동안 대중의 정치 행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과제는 긴급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정주, 되찾아야 할 삶의 기술_1984년 7월
건축가가 지을 수 없는 집. 주거, 즉 사람이 정주하는 곳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살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용 준비가 끝나는 그날부터 망가지기 시작하는 오늘날의 상품과는 딴판이었습니다…집짓기는 일생에서 일생을 이어지며, 그 특별한 단계에서는 의례 행위가 벌어집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삶.
오늘날 입주 공간의 소비자는 다른 위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입주 공간의 소비자는 정주 능력의 많은 부부을 잃어버렸습니다…정주할 자유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그에게서 삶의 기술은 몰수됐습니다. 그는 아파트를 필요로 하지 때문에 정주 기술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의료의 도움에 의지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분명 생각해본 적조차 없을 것입니다.
입주 공간의 소비자는 만들어진 세계에서 삽니다. 고속도로에서 스스로 길을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안의 벽에 구멍을 낼 수 없습니다.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삶을 거쳐 갑니다. 그가 남기는 자국은 흠집으로, 닳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가 정말로 뭔가를 남기면 찌꺼기이므로 제거됩니다.
환경은 정주를 위한 공용이었으나, 사람과 상품과 자동차를 보관하는 수납창고를 짓는 자원으로 재정의됐습니다.
희소해지는 삶의 공간. 공용이 없는 정주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고속도로는 거리도 아니고 길도 아니며 수송을 위해 예약된 자원이라는 것을 이주민이 인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지금 세계가 살기에 얼마나 부적합한지를 보면 공용이 얼마나 파괴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환경을 살기에 부적합한 곳으로 만듭니다.
더 많은 사람이 정주할 필요가 있는 바로 그때 토착 정주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 그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면서 희소한 공동주책을 찾아나서도록 사람들을 강요합니다…지난 30년 동안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여 지역 공동체의 정주 기술을 강탈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공간이 희소하다는 느낌이 갈수록 더 극심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공동주택이 공용을 강탈하는 행위는 잔인하기가 물에 독을 푸는 것에 못지않습니다.
인간 수납창고에 대한 무기력한 권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정주하는 토착 능력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논의는 희소가치를 다루는 학문인 경제학의 날개 밑에서 빠져 나오기만 하면 생태운동의 방향과 일치합니다. 이런 논의는 기술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분석 한 가지와 일치합니다.
내 손으로 집을 지을 자유.
#부정가치와 엔트로피_1986년 11월9일
‘엔트로피’, 사회적 퇴화를 자연법칙으로 왜곡하는 말
사람들은 상품 및 서비스의 지속가능하지 않는 소비에 자신이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금기화하기 위해 ‘엔트로피’라는 무의미한 말을 낚아채, 사회적 퇴화가 흔히 있는 자연법칙의 하나로 보이게끔 합니다.
학교교육의 결과 멍청해지고, 의료의 결과 더 병들고,
속성과정의 결과 시간을 더 잡아먹는 등 문화가 메말라가는 현상에 대해 논의할 때 사람들은 선이 타락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지 에너지나 정보의 흐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비뚤어진 사회적 목적에서 나타나는 나쁜 결과이지, 물리학에서 엔트로피와 연관하여 생각하는 무정하고 냉혹한 결정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돈이 초국가적으로 흘러가게 하면서 문화의 다양성이 퇴화하는 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탐욕의 결과입니다.
삶의 소멸을 가리키는 말, ‘부정가치’
‘부정가치’는 공용과 문화가 폐기된 결과 전통적 노동이 자급 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저는 경제적 가치는 문화를 먼저 폐기한 결과로서만 축적되는 것이며, 이는 다시 부정가치의 창조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폐기물 생성자가 된 인간. 모든 문화에는…오히려 자급 문화를 더욱 잘 통합하고 보호하는 상징적 규칙입니다. 이른바 ‘개발’은 이러한 보호를 부정가치로 바꾸는 프로그램된 과정입니다.
돈이 흐를수록 사회는 해체된다.
공생을 원시 경제로 격하하고 전통을 혐오하는 행위에 타문화의 진보에 헌신한다는 그럴 듯한 허울을 입히지만, 사실은 과거를 근시안적으로 파괴하도록 부추길 뿐입니다. 전통을 폐기의 영가적 표현으로 보고 과거의 쓰레기와 함께 버려야 하는 대상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경제 성장이 결과? 세계적으로 보면 성장의 결과 경제적 이익이 소수에게 집중됐고, 한편으로 화폐경제를 벗어나면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사람과 장소가 부정가치로 변했습니다. 일찍이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빈곤과 무력한 상태에 빠진 적은 없었습니다
…경제 발달이라는 이념은 돈의 흐름 바깥에서 문화적으로 형성되는 거의 모든 활동에 부정가치라는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사회적 선택의 세 가지 차원_1979년 8월15일
국제개발협회 제16회 총회 기조연설, 스리랑카 콜롬보
개발. 변변한 도구가 없는 사회에 여러 가지 시설을 균형을 고려하여 설치하는 것. 학교와 병원, 고속도로를 더 많이 짓고, 공장을 세우고, 송전선망을 깔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시설을 운영하고 또 필요로 하도록 훈련된 인구를 길러냈습니다.
지금보면 10년 전의 저 도덕적 명령은 순진해보입니다.
오늘날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저런 도구주의자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사상가는 거의 없습니다. 원치 않는 외부효과가 이익을 초과. 세금 부담이 대부분의 경제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를 넘어서고, 고속도로 때문에 생겨나는 유령도시로 도시와 농촌 풍경이 삭막해졌습니다.
개발의 청구서-반생산성과 제도화된 좌절
건강을 의료화하면 현실적이고 유용한 수준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동시에 상식적인 건강 즉 유기적 대처 능력은 떨어지게 됩니다. 혼잡한 시간대에 움직여야 하는 대다수는 수송 때문에 교통의 노예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 자유의사로 선택하는 이동과 상호접근성이 모두 감퇴됩니다.
…애초에 사업을 설계하고 자금을 투입할 때의 명백한 목적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졌습니다.
강제적 소비의 결과물인 이런 제도화된 좌절과 새로이 생겨난 외부 효과가 결합합니다.
#중세의 우주에 갇힌 현대의 교육학
존재하지 않는 천구
#호모 에두칸스의 역사_1984년 7월
모두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라
교육사학자는 교육의 필요를 역사와 무관하게 주어진 조건으로 간주합니다.
희소성의 권력에 지배당한 교육학
제가 살펴본 교육사 교재는 모두 교육의 희소성은 모양과 형태만 다를 뿐 항상 존재해 왔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깔고 교육사를 다루고 있었습니다….경제학자 역시 비슷한 금기에 직면했지만, 교육 이론가들과는 달리 정면으로 해결을 시도했습니다. 18세기 말에 이들은 경제학이 희소성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가치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전통문화는 희소성이 사회관계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는 뜻깊은 통합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희소성의 등장을 미리 막는 행동규범을 시행하여 시기심과 두려움을 꺽어버립니다.
희소성이 권력이 확산되지 않도록 사회 전반에 걸쳐 저항하는 모습
누구도 걷기나 숨쉬기를 배운 적이 없다
여러분 대부분이 교육 관련자이지만, 여러분 중에는 걷기나 숨쉬기를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지금도 알고 있는 분이 많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언어는 언제부터 상품이 되었나?_1978년
언어는 비싸졌습니다. 언어 교습이 하나의 직업이 되면서 언어 교습에 쓰는 돈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마땅히 말해야 하는 대로 말하도록 배웁니다. 가난한 사람은 좀 더 부자처럼, 병든 사람은 좀 더 건강한 사람처럼, 흑인이 좀 더 백인처럼 말하도록 하기 위해 돈을 들입니다. 돈을 들여 아이의 언어와 교사의 언어를 향상시키고 바로 잡고 풍부하게 하고 최신 언어로 바꿔줍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전문 특수용어에는 돈을 더 들이고, 고등학교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10대 아이가 제각기 그런 용어를 찔끔찔끔 익히게 합니다.
부자의 언어, 빈자의 언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대부분이 실은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지만, 귀와 혀를 길들이는 공공사업이 교육만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행정, 연예, 광고, 뉴스 종사자가 거대한 이익 집단을 이루어 제각기 언어라는 파이에서 큰 조각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말에 들어가는 돈의 액수에 비하면 미국이 연료 수입에 들이는 액수는 별것이 아닐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부자 나라의 언어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흡수성이 좋아서 막대한 투자를 빨아들립니다.
태양과 토착 언어로 자급하던 시대. 오늘날에도 가난한 나라에서는 대다수가 돈을 들여 따로 배우지 않고서도 말을 배웁니다.
땅에서 기른 언어.
표준어가 토착어를 식민지로 만들다. 표준어. 방언이 우세해지는 이유는 주로 그 방언을 쓰는 사람의 특권 때문이었습니다.
세계를 현대적으로 만드는 원인. 토착 가치는 대부분 그 가치를 생성하는 사람이 결정합니다. 반면에 상품에 대한 필요는 그 가치를 정의하는 생산자에 의해 결정되고 형성되어 소비자에게 제시됩니다. 세계를 현대적으로 만드는 원인은 토착 가치가 상품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며, 상품은 그 과정에서 일허버리는 부분의 본질적인 가치를 부정해야만 매력이 있어 보입니다.
상품이 되어버린 언어.
교육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자식들 앞에서 이들 부부는 ‘교사의 자격으로’ 임했습니다.따라서 이들 부부의 아이들은 부모 없이 자라야 했습니다. 이두 어른이 아들 둘과 딸 하나에게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이들에게 대화는 시장 거래의 한 형태로서, 취득과 생산, 판매의 형태로 변했습니다. 이들의 대화에는 낱말과 관념과 문장이 있었지만, 더 이상 호소력은 없었습니다.
#물의 신화: 망각의 강과 H2O
현대 문명의 상징, 하수도와 수세 화장실
#정신 공간의 분수령: 구술, 문자, 컴퓨터
『학교 없는 사회』 출간. 저는 교육을 위해 ‘학교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는데 이것이 실수였음을 알아차렸습니다. 학교라는 제도를 폐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은 조건 없이 주어진 여가의 선물이던 교육이 절박한 필요로 되어가는 추세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문자문화 교육에서 전통적으로 핵심이 된 여러가지 개념이 쇠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개발 노력이 최고조에 이른 때. 전 세계적으로 학교를 무대로 경제적 진보라는 감춰진 전제가 연출된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학교 제도는 개발이 필연적으로 다다르게 될 곳이 어딘지 보여주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똑같은 양상을 띠는 계층화, 서비스에 대한 광범위한 의존, 반생산적 전문화, 소수를 위한 다수의 격하 등이 학교 제도에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학교 없는 사회』를 썼을 때 여전히 제 관심의 중심은 교육의 역사적 본질이 아니라 교육의 사회적 효과였습니다.
띄어쓰기의 혁명, 눈으로 읽게 되다
#기억의 틀: 중세의 책과 현대의 책_1990년 6월24일
#컴퓨터, 인공두뇌의 꿈에서 깨어나기_1987년 2월
#신체의 역사, ‘신체 생산자’의 출현_1985년 1월
‘미국의 보건과 치유’에 대한 자문, 미국 펜실베니라 주립대학교
병을 만들도록 재구성되는 신체
첨단 기술에 의한, 첨단 기술을 위한 신체
#생명은 지옥으로!_1989년 3월29일
인간의 생명이 자원으로.
물신이 필요한 시대
과학의 탄생, 자연의 죽음
하나의 재산이 된 생명
생명의 관리자가 된 의사
#생명 윤리학의 가면을 벗겨라_1987년 11월20일
의료 윤리라는 말은 안전한 성, 핵 보호, 군사 정보만큼이나 모순적인 어법입니다.
1970년 이후로 생명 윤이락 역병처럼 번지면서, 본질적으로 비윤리적인 맥락에서 윤리적 선택 비스무레한 것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맥락은 의료를 수태에서 장기 수확까지 확장하면서 그 형태가 잡혔습니다. 이 새로운 활동 영역에서 의료는 이제 더 이상 아픈 사람의 고통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이제 인간의 생명이라 불리는 것이 보살핌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저희가 보기에 생명 윤리는 우리가 아픔과 괴로움, 체념과 죽음을 마주할 때 앞세워야 할 살아 있음과는 무관하다고 봅니다.
#품위 있는 침묵에 대한 권리_1982년 4월 23일
‘민중포럼: 희망’, 일본 도쿄
원자폭탄은 무기가 아니다. 그 목적은 오로지 대량 학살뿐. 다른 어떠한 목적에도, 심지어 살인에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런 대량 학살의 도구, 사람을 집단적으로 파괴하기 위한 발명품
#나 또한 침묵을 지키지로 결심한다_1983년 6월9일
#일리치를 회상하며_더글러스 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어떤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 사상가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한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가난도 발전한다.
가난의 네 가지 종류?
1)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과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절대적 가난
2) 지역과 마을에서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전통적 가난
3) 사회관계로 규정되는 사회적 가난
4) 기술 발전으로 야기되는 기술적 가난
전통적 가난. 안데스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적은 소유로 살아간다. 돈을 많이 쓰지도 않고, 먹는 음식의 종류도 훨씬 적다. 하지만 산업화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을 가난하다고 말한다. 자동차도 없고, 전화기나 세탁기도 없고, 아파트도 없으니 가난하다고 말한다. 안데스 사람은 다른 문화권과 비교될 때 가난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의 독특한 삶의 양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가난. 이 가난은 소유물의 절대적 양이 아니라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복종하는 가난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의 금을 갖고 있으면 아무도 부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기술적 가난. 기술 발전으로 초래되는 가난이다. 근대화의 이상은 기술 발전으로 가난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리치는 기술 발전이 특정 종류의 가난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자동차가 발명되기 전에는 아무도 차를 가지지 않았고, 가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차가 발명되고 나자, 갑자기 특정 계층의 사람 전부가 단지 자동차가 없다는 이유로, 그 물건을 살 수 없다는 이유로 가난해지고 말았다.
이 가난은 기술이 발전하는 한 계속된다.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 존재하게 되면서 이 신종 가난은 끊임없이 출몰한다. 미래에 우리는 우주 여행을 가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난해질지 모른다. 어떤 것이 됐든 구매할 수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일리치의 ‘가난의 근대화’는 ‘절대적 가난’이 소멸되지 않은 채, 전통적 가난이 현대화된 가난으로 변형된 것이다.
쓸모있는 물건이 쓸모없는 사람을 만든다
근대화된 가난은 ‘근원적 독점’과 연관된다. 어떤 물건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그것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근원적 독점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1단계. 새로운 상품, 가격이 비싸서 소수의 부유층만 구매. 2단계. 가격이 떨어지면서 보통 사람들 대다수 구매하는 단계, 이 단계에서 상품을 갖고 잇으면 ‘편리’한 물건이다. 3단계. 그 상품 없이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을 만큼 사회가 재조직되는 단계, 이제 물건은 ‘편의품’에서 ‘필수품’이 된다.
일리치는 ‘근원적 독점’과 함께 ‘반생산성’ 개념으로 현대 기술의 근원적 문제를 지적했다. 반생산성은 기술이 어떤 한계점을 지나면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일리치의 독창적 개념이다. “의료 시설은 건강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그의 진단은 현실이 되었다. 병원은 치료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병을 만들어낸다(의원성 질병). 학교는 학생들에게서 스스로 배울 능력을 빼앗고, 감옥은 죄를 양산하고, 자동차는 교통을 지체시킨다. 반생산성 단계에 이르면 제도로 인해 개인들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고 문제를 푸는 능력을 빼앗기고, 그 대신 전문가의 지식에 의존하도록 내몰린다. 급기야 제도가 인간의 삶을 대신하고,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류가 역사상 가장 무기력한 인간”이 된다.
일리치는 그의 첫 저서 『의식의 축제』에서 마르크스가 리카도르 학파를 비판한 문장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다.
“그들은 ‘쓸모있는 물건’만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쓸모있는 물건을 너무 많이 만들면 쓸모없는 사람도 늘어난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미래란 없다, 희망만이 있을 뿐.
그에게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아니었다. 역사는 오랫동안 변해버려 지금과 완전히 달라져버린 가치,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는 길이었다.
“일리치 씨, 당신은 몽상가군요. 좀 더 현실적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지요? 저는 지금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미래학자)선생께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이야기하는데, 누가 몽상가지요?”
역사는 실제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며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미래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사람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제도에는 미래가 있지만,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로지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마 도쿄에 사는 아이들에게 “장수하늘소는 어디서 살지?”라고 물으면 “백화점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곤충도 상품이 되었다. 역시 지금의 아이들에겐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아이들은 자본주의와 산업사회를 ‘항상 그래왔던 세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 체제가 마치 역사의 모든 시기마다 존재했던 것처럼 글을 쓴다. 자유 시장과 경쟁이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자유시장이 만들어진 것은 불과 2백 년 전이고,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6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일리치의 방식대로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세상이 항상 이런 모습이 아니었고, 어떤 변화를 거쳐 지금의 세계가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태초에 신이 내려준 것도 아니며, 인간 유전자에 새겨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삶의 방식 중 하나를 살고 있는 것이며, 지금의 현실 또한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일리치는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고자 했다.
나는 일리치가 지금의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그는 사람들에세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전에 어떻게 생각할지를 가르쳐주려했다.
생각의 전환은 삶의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해석과 재사유가 가능하면, 변화의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일리치는 마르크스의 선언을 한번 더 전복하면 나아간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뿌리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우리 시대의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무한히 성장하려는 경제와 한정된 자원은 모순이다. 이 대립에는 분명 끝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대립이 끝났을 때 세상이 어떤 모습일까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의 말처럼 낭만적인 생각으로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최악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부정否定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면서, 행동도 하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앞으로 달려가는 질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어떤 범주에도 넣을 수 없는 사상가
‘비타협주의자’, 현대의 모든 우상을 부수는 ‘우상파괴자’…내게 일리치를 규정하라고 한다면, ‘급진적(근본적인)radical’이라는 단어가 그의 사상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라고 말할 것이다. ‘radical’은 ‘뿌리root’에서 온 단어로, ‘뿌리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일리치가 평생 추구한 것은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일리치는 그 어떤 범주로도 넣을 수 없는 사상가다. 그를 규정할 수 있는 범주는 오로지 ‘일리치’라는 그의 이름뿐이다.
이 책을 다 읽은 다음 자기 자신과 우리 시대, 우리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을 얻는다면 그 무엇보다도 큰 수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