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p641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이제 자각을 해야한다.
빨간약을 선택해야 한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편안함은 허구다.
[거대한 전환]은 1944년 칼 폴라니의 나이는 이미 57세, 첫 저술이자 대표작.
폴라니는 그보다 시장경제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거기에 담겨 있는 인간,자연,화폐가 상품에 불과하다는 상품 허구는 단지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고 착각하는 일종의 상상이요 메트릭스일 뿐이라고 갈파한다…폴라니는 어느 편지에서 자신의 작업은 다음 세대의 아시아,아프리카 등 비서구인들의 해방을 위한 것이라는 뜻을 쓴 바 있다.
#21세기 신자유주의 경제의 위기에 직면하여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칼 폴라니
그는 시장경제란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라고 주장한다. 인간.자연.화폐를 상품으로 보고 ‘시장’에 맡겨둔다면, 결국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비극만 낳고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로버트 오언의 사상을 빌려 폴라니가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제 우리가 ‘사회’라는 실체를 발견했다는 것이며, 국가도 시장도 이 사회라는 실체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사회=공동체?)
1938년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열린 노동자교육협회 여름학교
당시 폴라니는 고전적인 시장 자본주의의 나라 영국의 노동자들과 사귀면서 시장 자본주의가 인간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경제적 착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단순히 시장에서 상품 취급을 받는 ‘인간’에 대한 분노였다.
#로버트 매키버의 발문
그는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역사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두운 구석에다 촛불을 들이대려는 것이 아니며, 그의 개인적 신조를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만인이 떠받드는 경전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하려는 일은 깊은 혜안과 풍부한 지식으로 이렇게 전례 없는 변화의 시대 전체의 과정과 혁명을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폴라니의 직접적인 목적은 19세기에 어른으로 성장했던 시장경제라는 독특한 경제 체제가 사회에 대해 어떠한 함의를 갖고 있는가를 풀어내는 것이며, 이 과제를 실로 괄목할 만한 통찰력으로 해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 있지만 우리는 어떤 사물의 본성을 오직 그것이 무르익어 터진 순간-혹은 그것을 지난 후에-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역사 속에 나타난 숱한 사건들과 과정들, 숱한 이론들과 여러 행동들, 이들은 모두 이 책 속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시장경제의 충동질로 인하여 인간을 노동으로 자연을 토지로 환원시켜버린 결과 사회는 쇠사슬에 묶여버렸고, 현대사는 그 쇠사슬에 묶인 주인공이 마침내 사슬을 끊고 포효하는 극도의 긴장감을 가진 드라마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폴라니는 도대체 역사의 의미를 얼마나 깊게 파고들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사회를 발견해야만 했다? 비록 그들의 비인간성은 기록에 차고 넘치지만, 그것을 촉발시킨 것은 통제되지 않는 체제, 즉 시장경제가 가져온 사회의 황폐화였다. 사람들은 사회의 단결과 유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다. 인간의 삶속에소 마음속 깊숙이 영혼이 깃들어 있던 소중한 신전은 이제 파괴되고 더럽혀졌다.
이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지혜는 아직도 태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지금도 여전히?)..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적 삶에 본질적으로 필요한 가치들을 그 객관적 상황 속에서, 또 스스로의 욕구 차원에서 다시 한 번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사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 그러면서 과거로부터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교훈이란 교훈과 경고란 경고는 모두 배워야만 한다…역사에는 항상 우리 스스로가 믿는 가치 하나만을 붙잡고 행동에 나서야 할 시점이 있는 법이며, 그렇게 하여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이 긴박하게 밀어대고 있는 여러 힘들을 새로운 목표와 방향으로 풀어놓을 줄 알아야만 한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현 단계에서 사회의 교육이 제시하는 바를 뛰어넘는 사고를 전개할 각오가 되어 있는 모든 지적인 이들,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또 그것이 방금 통과해온 위기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우리 앞에 이제 다가오고 있는 여러 위기들이 무엇인지 알아나갈 각오가 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이러한 모든 것들에 불만족을 느껴온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그것들을 넘어서 시야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라 우리 시대에 닥쳐온 이 황당한 난문들과 모순들을 극복해 나가는 작업은 오로지 사회, 즉 인간이 서로서로 의존하는 포용력 있고 연대심 넘치는 통일체가 무엇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만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공동체 회복이야말로 절실한 시대적 과제?)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발문
이 책은 유럽 문명이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로부터 산업화의 시대로 넘어가는 거대한 전환,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여러 사상과 이념, 사회적/경제적 정책들의 변화를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유럽 문명이 겪은 바 있는 전환이 오늘날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전환과 유사하기 때문에, 종종 폴라니가 마치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해 직접 발언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경제학적 내용에서는 오늘날 약간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을지 몰라도 폴라니가 제기하는 문제들과 관념들은 여전히 두드러진 힘을 잃지 않고 있다.(자기조정 시장을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정부의 개입은 필연적인 것이다)
근대의 역사적 경험을 뒤져보면 풍부한 증거로서 뒷받침되는 사실이 있으니, 경제 성장이 빈곤의 증가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오직 이윤 추구만이 목적인 시장경제의 피할 수 없는 결과?)
분명해지는 사실 하나? 실업이란 허깨비가 아니며, 현대 사회는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필요로 하며, 자기조정 시장경제는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고, 적어도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노동의 소멸과 잉여 존재-[경제적 공포])
자본 시장을 자유화해야 한다는 교리는 결국 과두 권력자들로 하여금 뒤가 구린 방식으로 축적한 그들의 부를 나라 밖으로 빼돌리라는 공개 초청장만 제공한 셈이었다!
각종 규제는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 가운데에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증대시킨다. 어떤 나라에 마음대로 자본을 넣었다가 뺄 수 있는 자유는 어떤 이들이 실천에 옮기고 있는 자유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엄청난 비용을 가져오게 된다.(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
만약 폴라니가 오늘날 이 책을 다시 쓴다면,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늘날 지구 공동체는 과연 이러한 불균형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도전에 응해야 한다고-너무 늦기 전에!
#프레드 블록의 해제
“세상에는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책들이 있다”
출간된 지 반세기도 넘은 [거대한 전환]은 오히려 수많은 면에서 생생함을 유지하고 있다…이 책은 21세기 초의 시점에서 지구적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를 이해하는 데 실로 필수불가결한 저서이다.
사회에서 경제를 뽑아내는 일은 어째서 성공할 수 없는가?
토지,노동,화폐는 모두 허구 상품이다…이런 것들을 상품이라고 우기는 허구의 눈속임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경제학의 이론화라는 것이 거짓말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 거짓말로 인해 인간 사회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허구 상품이라는 개념은 사회에서 경제를 뽑아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불가능한 것을 고집하면 어떤 결과들이 나오는가
사회에서 경제를 뽑아내려는 자유시장 이론가들의 노력은 실패가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 하지만 시장 자유주의는 결코 죽지 않고 계속 되살아나는 힘을 보여준바, 그 놀라운 지적 회생력의 원천은 오히려 그것이 가지는 유토피아주의에 있다.
#루이 뒤몽의 프랑스어판 서문
‘거대한 전환’이란 1930~40년대의 거대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가로질러 근대 세계에 일어난 것이었으며, 폴라니는 바로 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죽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폴라니의 독창성의 원천은, 바로 근대 사회 또는 이른바 자유 경제를 비근대 사회에 비추어 그리고 대립시켜서 고찰했다는 점에 있다.
#백년 평화
19세기 문명은 무너졌다. 이 책은 이 사건의 정치적/경제적 여러 기원들 그리고 그것이 불러들인 거대한 전환을 다룬다.
19세기 문명을 떠받쳤던 네 개의 제도? 전재을 방지한 세력균형체제/ 국제금본위제/자기조정시장/ 자유주의적 국가
이 제도들 가운데에 금본위제가 결정적인 것임이 밝혀졌다. 금본위제란 국내 시장경제체제를 국제적 영역으로 확장하기 위한 노력에 불과한 것이다.
#보수적인 1920년대, 혁명적인 1930년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경제는 해체되었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 문명 전체가 전환을 겪게 된바, 이 둘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고리는 바로 금본위제의 붕괴였다.
우리가 살고 있었던 국제 체제의 진정한 성격은 그것이 무너지기 전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국가들은 영구적 무장 해체를 감수해야 한다는 저 어처구니 없는 장치로 인해 세력 균형의 제건을 위한 어떤 건설적인 해법도 나올 수 없었다.
급작스런 변화. 이 위기의 근본 원인은 국제 경제 체제의 붕괴라는 위협적인 사태였다.’ 자본의 해외 도피’라는 새로운 현상도 나타났다.
금본위제에 대한 믿음은 그 시대의 신앙이었다.
전 세계를 묶어놓은 황금줄이 끊어졌다는 것은 곧 모종의 세계 혁명이 시작될 것이라는 신호였다(세계를 묶어주던 황금줄이 끊어졌다)
그 거대한 전환의 과정 속에 전대미문의 거대한 전쟁이 수반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의 전개와 사회의 변화 과정은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 제도적 변형과 여러 나라의 운명은 후자가 전자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가에 따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이익이라는 동기를 한 문명 전체의 기초로서 작동하게끔 만든 메커니즘은 그 효과 면에서 실로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므로, 아마도 순식간에 지구의 일부를 뒤엎어버린 가장 거친 종교적 열광의 폭발 정도만이 그에 비견될 것이다.
(자본주의 혹은 완성된 종교!!-[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
그 문명을 초토화시켜버린 장기적 요인들을 연구하려면 역시 산업혁명의 고향,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사탄의 맷돌
#삶의 터전이냐 경제 개발이냐
18세기 산업혁명에서 핵심이 되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생산 도구의 개선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은 망가지고 뒤죽박죽되는 파국이 함께 나타난 바 있다
인간들을 통째로 갈아서 무차별의 떼거리로 만들어버린 그 ‘사탄의 멧돌’은 무엇이었는가?
변화라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야말로 자유주의 철학의 실패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산업혁명을 그릇되게 이해한다? 사회적인 사건들을 경제라는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우겨대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궁극적으로는 혜택을 가져왔을지 몰라도 당장은 황폐화를 가져왔다
종획운동(enclosures)은 가난한 자들에게 맞서 부자들이 일으킨 혁명이라고 불려왔으며, 이는 적절한 표현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역사가들이 공감한 것은 종획운동을 지지하는 의회 세력쪽이었다
이렇게 인간 역사의 모든 사회가 시장경제였다는 식의 가정은 시장 경제 체제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우리에게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전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시장경제라는 제도 구조는 우리 시대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으며 심지어 우리 시대에서조차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나타났던 것이다.
산업혁명 시기에도 영국에서 벌어진 사건 전개는 대단히 독특했다. 온 나라에 충격을 준 운동의 원천이 이번에도 해외무역이었고, 또 엄청난 규모의 경제 개발로 인해 평민들의 생활 터전에 유례없는 파멸이 덮치게 되었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었으니, 그러한 황폐화가 벌어진 장소들이 이번에는 농촌이 아니라 이른바 산업도시들이었다는 점이다.(피라미드를 해체하라)
산업혁명은 시작일뿐, 그 후 더 극단적이고 더 급진적인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 혁명에 뛰어든 자들이 신봉하던 교리는 완전히 물질주의적인 것으로, 무한정의 물질 상품들만 있다면 인간의 문제는 모두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혁명 자체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가장 기본적 변화는 바로 시장경제의 확립이며 이러한 모든 변화들은 그저 이것에 부수적으로 생겨난 것들에 불과하다.
정교한 기계들은 가격이 높기 때문에, 그것으로 많은 양의 재화를 생산하지 않는다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이러한 사회전환 과정…사람들 마음속에서 단순한 생계 유지라는 동기는 사라지고 이익 추구하는 동기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가 구매하는 것은 각종 자재들과 노동인데, 이는 다름 아닌 자연과 인간이다. 기계에 의한 생산이 상업 사회에서 일어나면, 현실에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적/자연적 내용물이 상품의 형상을 뒤집어쓰게 된다는 실로 엄청난 변화가 벌어진다…이로 인해 인간의 상호 관계가 마디마디 끊어질 수밖에 없으며, 인간이 삶을 영위할 자연환경도 반드시 쑥대밭이 될 수밖에 없음이 명명백백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위험이 급박하게 닥쳐오고 있었다.
#사회와 경제 체제의 다양성
시장경제의 지배법칙 논의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일? 19세기의 시장경제 체제라는 것의 근간을 이루는 논리적 전제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철저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19세기 내내 학문의 이름으로 지겹게 울려퍼졌던 주문(呪文)의 염불과는 달리, 교환을 통해 이익과 이윤을 얻는다는 동기가 인간의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경제생활에서 시장이 부수적인 역할 이상을 차지한 적은 결코 없다.
#1795년, 스피넘랜드
18세기의 사회는 자신을 시장이라는 몸체에 붙어 있는 부속물로 전락시켜버리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 그 의미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노동시장이 들어 있지 않은 시장경제란 생각조차 할 수 없지만, 그 시장을 특히 영국의 농촌 사회에서 건설한다는 것에는 사회의 전통적인 구조를 깡그리 파괴해버린다는 엄청난 일을 함축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노동 시장에서의 임금 체제가 작동하려면 스피넘랜드에서 내걸고 있는 ‘생존의 권리’라는 것을 철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실로 명명백백한 진리로 보인 것이다.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동물들로 구성되는 체제에서 만약 빈둥거리고 놀아도 생활비를 얻을 수 있다면 아무도 일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전 사회에 걸져 인기가 폭발했던 정책도 없었다? 노동자에겐 생활비 보장, 자본자에겐 임금 보조금으로 변질!
장기적으로 그 결과는 소름 끼칠 만한 것이었다? 임금 보조금으로 임금 수준이 바닥 모르게 처박힐 수밖에 없고, 결구 원하든 원치 않든 빈민 구호세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단 한번 구호를 받게 되면 영원히 구호로 먹고 살게 된다”
이는 결구 무수한 사람들의 인생을 거덜내고 말았다
스피넘랜드법 폐지? 하지만 이제는 알아서들 온갖 난관을 뚫고 스스로를 돌보라고 내팽개쳐진 것이다!
스피넘랜드 법의 재발견? 하몬드 부부의 저술, 경제사가 아닌 사회사의 일부로 보았다!
#스피넘랜드 법 이전의 것들, 스피넘랜드 법의 결과들
스피넘랜드 체제는 본래 일종의 임시방편 조치였다. 하지만 이것만큼 한 문명 전체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모양지어버린 것도 없을 것이며, 새로운 시대를 맞기 위해 반드시 철폐해야 할 만큼 핵심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도 없을 것이다!
스피넘랜드 법 당시의 세대는 자기들이 무슨 길로 들어서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당시가 역사상 최대의 산업혁명이 벌어지려던 전야였지만, 앞으로 다가올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징조나 전조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도둑처럼 임했던 것이다! 누구도 기계제 산업이 나타날 것을 예견하지 못했고, 그것은 완전히 충격으로서 나타났다.
농촌 노동자들이 모조리 도시로 빠져나가버리는 것을 막고, 농업 경영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농촌의 임금을 올릴 수 있는 무언가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서 고안된 것이 바로 스피넘랜드 법이었다!(임금 보조금!)
스피넘랜드 법은 사회적 파국을 재촉했다? “농업 경영자들은 자기 땅을 경작하기 위해 자기 돈으로 적절한 수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대신 그 두 배의 머릿수를 고용하도록 압력을 받았고 대신 이들의 임금은 부분적으로 빈민 구호 지방세에서 지급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고용된 이들은 강제로 그 농업 경영자에게 떠맡겨진 격이므로 전혀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내키는 대로 일을 했으며, 오히려 토양의 지력만 떨어뜨렸고,…스스로의 몸으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더 나은 노동자들을 농장 경영자들이 고용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시장 메커니즘이 이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스스로를 온전한 것으로 완성시켜달라 아우성치고 있었으니, 즉 이제는 인간의 노동도 상품으로 만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동적인 온정주의가 이러한 필요에 저항해보려했지만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스피넘랜드 법의 온갖 공포에 시달린 사람들은 이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유토피아의 은신처를 향해 미친 듯이 달음질치게 되었던 것이다.
스피넘랜드 법과 휘트브레드 법안의 차이? 최저 임금이냐 임금 부조냐 양단 간의 것!
#구호 대상자 극빈자 문제와 유토피아
빈곤 문제는 두 개의 밀접한 주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으니, 그것은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와 정치경제학이다…이 두가지는 불가분의 전체를 구성하는 단일 주제의 두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단일 주제란 바로 사회의 발견이다!
‘비정상적’ 현상의 급류? 무역과 생산의 엄청난 증가와 함께 인간생활의 비참상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일이 동시에 벌어진 기묘한 시기에 자신들 학문의 이론적 체계를 창시하게 된 경제학자들은 정말로 운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멜서스,리카도,제임스 밀 등의 경제 이론 체계의 원리들은 이렇게 외견상 모순되어 보이는 ‘비정상적’ 상태의 여러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퀘이커 교도들은 근대적 존재가 취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지칠 줄 모르고 탐구한 개척자들로서, 비자발적 실업이라는 현상이 무언가 노동 조직의 결함으로 인해 생겨난 결과임이 틀림없다고 처음으로 인식했다
“시혜를 베푸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스피넘랜드 법이 만들어지던 시점에서는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의 진정한 성격이 아직 사람들의 마음속에 명확히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정치경제학과 사회의 발견
빈곤이라는 것의 의미를 사람들이 깨닫게 되자, 19세기를 위한 무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자유방임의 방향이란 단순히 최소의 비용과 노력으로 법과 질서를 보장한다는 원칙일 뿐이다. 빈민들은 시장이 알아서 챙기도록 하라. 그러면 만사가 스스로 해결되리다?
빈곤이라는 고통스러운 문제는 이제 그 진정한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경제적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들은 인간의 법칙이 아니다.
기독교가 인간 성격의 형성의 책임을 오로지 그 개인 자신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개인화’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개인화되어버린 인간은 기독교의 진정 소중한 모든 가르침들과 너무나 분리되어 있기에 영원에 이르도록 다시 통일될 가능성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오언이 기독교를 극복하고 그것을 넘어선 자리에 자신의 위치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는 자신이 부르짖고 있는 사회의 자기 보호가 경제체제의 작동 체제와 모순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은 예견하지 못했다
##사회의 자기보호
#인간, 자연, 생산조직
1세기 동안 이중적 운동이 현재 사회의 흐름을 지배했다. 시장은 계속 팽창했지만 그 팽창 운동이 특정한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반대 운동이 일어나 여기에 맞섰다. 이런 반대 운동이 사회를 보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최종적으로 분석해볼 때, 이 운동은 시장의 자기조정 체제와 양립할 수 없었고, 따라서 시장 체제 자체와도 양립할 수 없었다.
1914년 무렵 발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떄 시장체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포함한 전 인류, 자연인은 물론 법인이라 불리는 거대한 허구적 인격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모든 부분을 품고 있었다
생산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이다.
시장 체제의 제도한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은 노동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은 토지라는 이름 아래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으로 변했다. 노동력의 사용은 임금이라고 불리는 가격으로 어디서나 사고팔 수 있게 되었고, 토지의 사용은 지대라고 불리는 가격으로 흥정할 수 있었다…사람들은 노동과 토지가 판패을 위해 생산된 것이라는 허구를 일관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생상은 이런 식으로 조직할수 있을지 몰라도, 토양과 인간의 운명을 시장에 내맡기는 것은 곧 그것들을 파멸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그 상품 허구는 무시했다. 따라서 반대 운동의 핵심은 생산요소인 토지와 노동에 관한 시장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개입주의의 주요한 기능이었다.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
경제적 자유주의가 일종의 세속 종교로 변질되었다는 점도,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유방임이란 전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간만사를 그야말로 제 갈 길 가도록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결코 자유시장이란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시장과 인간
노동은 인간의 다른 활동으로부터 떼어내어 시장 법칙에 종속시키면 인간들 사이의 모든 유기적 존재 형태는 소멸되고 그 자리에는 대신 전혀 다른 형태의 조직, 즉 원자적 개인주의의 사회 조직이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파괴 공작을 실행에 옮기는 최상의 방책은 자유계약의 원리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여러 제도들은 반드시 파괴되어야만 하면, 또 다시 형성되는 일이 없도록 막아야만 한다? 원시사회의 개인들이란 본래 공동체 전체가 함께 궁핍에 처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굶주림의 위협을 받는 일이 었기 때문이다
#시장과 자연
우리가 토지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여러 제도와 뗴어낼 수 없도록 엮여 있는 자연의 한 요소이다…전통적으로 토지와 노동을 분리되지 않았다. 노동은 인간의 삶의 부분을 형성하며, 토지는 자연의 일부인 채 남아 있고, 삶과 자연은 함께 뭉쳐 유기적 전체를 구성한다.
반면 ‘단일한 거대 시장’이라는 경제생활 장치에는 여러 생산 요소 시장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생산요소 시장들은 인간 사회의 제도들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즉 인간 및 자연과 구별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시장과 생산조직
#자기 조정 기능, 망가지다
자기조정이 망가진 것은 보호주의의 결과이다
자기조정 시장 체제의 의미? 그것은 생산의 기본 요소인 토지,노농,화폐에 대해서도 시장이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나 것들에 대해서마저 시장들이 실제로 작동하게 되면 사회는 파괴의 위협을 당하므로 공동체 스스로 자기 보호 행동이 시작된다.
실제 세계에서 벌어진 일은 달랐다. 군대를 동원하여 협작하지 않으면 채무지불도 점점 성사되기 힘들어졌고, 함대의 도움 없이는 식민지 지역과 무역을 유지하지도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서 갈수록 무역로의 확장이 정부의 이런저런 필요에 따라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서양 각국의 침략의 깃발을 졸졸 따라가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세계 시장의 균형응 유지하기 위해서도 정치적 개입을 항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또한 갈수록 더욱 명명백백해졌다.
#체제 붕괴의 긴장들
앞에서 보았듯 각국의 제도적 장치의 근저에는 이와같은 획일성이 존재했기에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흥미로울 만큼 유사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1987~1929년의 반세기 동안 어마어마한 공간적 규모로 확산되었다.
##진행 중인 전환
#인민 정부와 시장경제
#사회 변혁과 역사가 맞물려 진행되다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
19세기 문명은 외부 혹은 내부의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파괴된 것이 아니었다…그것이 해체된 것은 전햐 다른 종류의 원인이었으니, 그것은 자기조정 시장의 활동으로 사회가 절멸당하지 않기 위해 취해진 여러 조치들이었다.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이다.
“거대한 전환 | 폴라니가 건네 주는 빨간약”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