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 강신주. p323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우선 주변에 보이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야 한다. 힘들고 괴롭지만 이 일을 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볼 수 있기 때문에,…얼핏 보면 쓸모없는 것 같지만 철학은 내가 나중에 알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힘이 있다. 하지만 잊지 말자. 내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여정이 보인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산에서 내려와 신발 끈을 묶고 다시 여정을 시작해야만 한다. 높은 봉우리에서 자신의 길을 조명했던 사람은 다른 이들의 여정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의 걸음은 지혜로울 것이며, 동시에 확고할 것이기에.”
삶은 남의 제스처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오늘 바로 이 순간 우리가 깊이 되새겨야 할 가르침은 바로 이겁니다.
집중과 깊이! 집중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깊이의 비밀? 그는 자신의 내면을 깊게 파고드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세계의 무엇인가로 열려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었던 겁니다.
꽃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여러분은 그 꽃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응시와 집중만이 사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가능하게 만드는 법이니까요. 나아가 사물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시적 감수성도 기적처럼 솟구쳐 오르게 될 겁니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의 글은 읽기가 힘들다? 너무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감정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구체적이고 개성적이기 때문에, 바꾸어 말한다며 내가 그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글을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위대한 시나 철학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그들은 바로 자기 자신의 삶으로 하강해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 겁니다.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와 지성과 거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권력이나 자본 혹은 습관이 강요하는 공통된 색안경을 끼고 자기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만의 제스처가 아니라 남의 제스처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삶이 우울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지요. 자기 옷이 아닌 남의 옷을 입고 사니까 말입니다.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고유명사’의 학문입니다…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유사성은 있지만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모든 시인과 철학자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누구도 흉내 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영위하고 그것을 표현하라!”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모든 사람이 각자의 삶에서 자유와 기쁨을 얻도록 돕는 것!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김수영
팽이가 돈다! 팽이는 오직 돌 때에만 팽이일 수 있다. 팽이는 돌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스스로 채찍질해야만 한다고 각오를 다집니다. 그렇지만 팽이는 다른 팽이가 돌도록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스스로 돌면서 아름다운 궤적을 만들어가야만 합니다…시인의 말처럼 “생각하면 서러운” 일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유로운 인간의 숙명인 것을 말입니다.
공통된 제스처가 아니라 자기만의 제스처로 돈다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랑이란 험난한 길, 히스테리와 강박증은 넘어_이성복과 라캉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 수평적 구조에 한 발을 내딛지 않으면, 우리는 수직적 구조를 성찰할 수 있는 거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때에만, 기존 관계를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법과 억압된 욕망은 동일한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프로이트가 발견했던 것이다”-라캉,[에크리]
타자를 이해한다? 그것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
다수가 따르면 정상, 소수가 따르면 비정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 결국 사람은 대부분 신경증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그것을 정상이라고 믿으면 살고 있습니다.
#돈으로 매개되는 세속 도시의 냉담한 삶_최승호와 짐멜
대도시의 삶을 차갑게 응시한 시인
(거리두기? 낯설게 하기?)시골을 발견하는 것은 도시인일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고슴도치의 마을? 서로 닿지 않으려고 몸을 움추리는 고슴도치들, 사람들로 가득 찬 만원버스나 지하철 풍경. 서로 상처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외로운 도시 생활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습관이란 이미 내적인 정서로 자리 잡은 겁니다? 습관을 제대로 성찰하려면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듯한 냉철한 이성이 불가피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본주의 혹은 완성된 종교? 십자가에서 나무 이상의 것을 느끼는 사람이 기독교일 것이고, 목불에서 나무 이상의 것을 보는 사람은 불교도일 겁니다…지폐에서 종이 이상의 것을 본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자본을 신으로 받드는 신도가 아닐까요?
내세의 행복을 약속하는 종교? 결국 종교의 약속은 현실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라는 종교가 약속하는 행복은 완전히 다릅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그만큼 현실에서도 행복할 것이라고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인간이 만든 종교 가운데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을 팔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개별적인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짐멜은 돈의 전능한 힘이 “우리를 개별적이고 비천한 것으로 바꾸어버리기도 한다”고 지적했던 겁니다.
돈을 경배할수록 사물의 차이 혹은 사물의 다양성에 에 둔감해진다
둔감함의 본질은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 증세이다…돈은 사물의 핵심과 고유성, 특별한 가치, 비교불가능성을 가차 없이 없애버린다.-[짐멜의 문화론],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를 위한 돈의 본질)
이런 조건에서 타인과 사물에 대한 섬세한 반응을 기대하는 것을 어불성성일 겁니다.
흥미롭게도 최승호 시인도 짐멜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비밀을 종교성에서 찾습니다. “황금교회”, “돈의 권능”, “십자가를 세운 자동판매기” 등등의 단어는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결국 시인은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돈을 경배하는 거대한 종교 사회에 포획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지요.
#차이의 포용 혹은 여성성의 문화_문정희와 이리가레이
여성의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자
#그리스도의 정신 혹은 해방신학적 전망_고정희와 시몬 베유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 낳았지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사랑을 낳는다데
모든 여자가 생명을 낳네/ 모든 생명은 자유를 낳네/ 모든 자유는 해방을 낳네/ 모든 해방은 평화를 낳네/ 모든 평화는 살림을 낳네/ 모든 살림은 평화를 낳네/ 모든 평등은 행복을 낳는다네/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이 된다네
고정희 시인은 우리가 예수의 사랑이 하나의 “허풍”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통탄합니다.
진짜 돈, 진짜 밥, 진짜 사랑을 위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가진 자가 상품을 가진 자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돈은 무한한 교환 가능성을 갖지만, 상품은 유한한 사용 가능성만 갖기 때문입니다.(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우선인 사회)
자본주의 사회란 노동이 돈보다 열등한 지위에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유는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나 사회주의 국가 러시아도 모두 ‘생산신앙’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생산 신앙’이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에 의한 생산물, 인간이 아닌 물건을 진짜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폭로했던 겁니다. 어쩌면 베유의 생각은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통찰을 일정 정도 계승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당연히 육체노동은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게 하고,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베유도 강조했던 겁니다. “육체노동이 최고의 가치인 것은 생산하는 물건과의 관계가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허튼 돈, 허튼 밥, 허튼 사랑이 누군가를 속이고 억압해서 얻은 것이라면 진짜 돈, 진짜 밥, 진짜 사랑은 누군가와 함께 땀 흘릴 때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고정희 시인이 지리산에서 들려주는 마지막 산상수훈인 셈입니다.
#그저 덮을 수밖에 없는 타자_김행숙과 바흐친
서정주처럼..외적인 저항을 우회하면서 세계에 파스텔 톤을 부여하는 서정적인 길을 가거나, 아니면 김수영처럼 외적인 저항에 맞서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상처에 신음하는 자유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의 유일성과 대체 불가능성을 가르쳐주는 타자
카페이 앉아 있는 이 순간, 친구가 나를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나도 친구가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남을 속속들이 알려고 하기보다는 알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관계의 방식이자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미디어가 매개하는 우리의 사랑_채호기와 맥루한
“그러나 문제는/ 전화는 늘 휴대하는 걸 확인할 수 있지만/ 사랑은 확인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의 길_신동엽과 클라스트르
불가능한 꿈을 통해 삶을 직시한 시인? 모든 살아 있는 문학은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꿈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현실을 직시하기! 이것이 바로 김수영입니다.
구름 한 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본 사람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내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그걸 하늘로 알고/일생을 살아갔다.//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클라스트르..신동엽처럼 그도 “구름 한 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문명사회가 바로 야만사회이고, 문명사회가 조롱하는 야만사회야말로 사실은 문명사회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쇠꼬챙이, 날카로운 칼로 문신을 새기는 잔혹한 통과의례? 그렇지만 클라스트르는 인디언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그런 통과의례를 거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동물들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합니다. 그래서 동물과 다른 존재라면, 혹은 다른 존재일 수 있다면, 인간은 약육강식의 법칙을 초월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이제 분명해지셨나요? 인간의 사랑은 생리를 거스를 때에만 그 빛을 발하는 법이지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아이러니? 야만의 상징일 수밖에 없는 거대문명? 누구도 자유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몇몇 철없는 사람들이 자랑하는 거대문명은 가능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모든 문물에는 억압과 지배라는 동물적 야만성이 숨어 있습니다.
인디언 공동체의 약속?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겠다는 자유인의 약속, 거대한 건물을 만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겁니다!
마침내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야만사회보다 진보했다고 생각하는 문명사회야말로 약육강식의 동물성이 활짝 개화한 세계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인류에게는 오직 두 가지의 역사만 존재한다? ‘국가에 대항했던 역사’와 ‘국가에 굴복했던 역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소외는 경제적인 소외이기 이전에 정치적 소외이다. 권력은 노동에 선행하며, 경제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의 파생물이고 국가의 생성이 계급의 출현을 규정한다.-[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진정한 문명? “자유로운 공동체”,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란 경제적 구조나 정치적 구조를 변혁시켜서 달성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을 지배하거나 남에게 복종하려는 야만적 동물성을 원천적으로 극복할 때에만 가능하다
#사랑이란 내밀한 세계_한용운과 바르트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방법_김정환과 마르크스
역사는 흐르는 강물이 아니다? 불행히도 대다수 사람들은 현실이 인간의 활동을 통해 변할 수 있다는 것, 즉 인간에게 역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현실에 순응하는 데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혼자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체념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풀이 죽어 있는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져야 하는 인간의 숙명,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인간에게 저항을 극복하려는 자유정신이 없다면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자신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
#너무도 풍요로운 감각의 세계_백석과 나카무라 유지로
#글쓰기와 존재의 관계_김종삼과 블랑쇼
#대중문화의 유혹을 거부하며_함민복과 기 드보르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스펙타클의 사회? 스펙타클에 포획된 우리의 삶
구경거리가 넘쳐나는 사회? 구경거리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집어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앓고 있는 우울증의 기원은 가상세계에서 욕망이 쉽게 충족되는 데 비해 현실세계에서는 그리 쉽게 충족되기 어렵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스펙타클은 대화와 대립한다”? 대화없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온가족!
인간으로부터 대화와 소통, 그리고 연대의 계기를 박탈하는 것, 이것이 스펙타클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펙타클의 가장 큰 목적? 타자와 연대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
스펙타클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리는 점점 수동적인 존재로 변해간다
스펙타클? 정치가, 예술가 혹은 대중 스타. 한마디로 유명인사들이지요.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를 비판하는 근본 취지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구경꾼이나 모방자의 수동성이 아니라 실천하고 창조하는 능동성을 되찾아주고 싶었던 겁니다
채찍질로 타인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겁니다…자발적 복종은 부자유로 의식되지도 않기에 저항하기조차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는 셈입니다.
#저주받고 배척되는 삶을 긍정하기_황병승과 보드리야르
교환성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본주의는 교환되는 두 가지 항에서 동일성 혹은 일반성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화폐입니다. 사과나 생수에 동일한 가격이 매겨진다면, 구태여 생수를 직접 들고 가서 사과와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나아가 사과 이외에도 천 원의 가격이 매겨진 다른 것을 구입할 수 있고요. 바로 이 점이 교환의 논리에서 화폐가 가진 필요성입니다…’단독적인’ 것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교환불가능한’ 것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특수한’ 것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교환가능한’ 것으로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본주의는 화폐가 상품보다 우월하지 않으면 작동할 수 없는 체제입니다.
‘불가능한 교환’? 선물? 그것은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교환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가능한 교환을 불가능한 교환으로 바꾸면 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들을 선물로 주고받으면 된다는 것이지요.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자본이란 중심은 아주 손쉽게 해체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단독적인 것?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영위하는 단독적인 존재들
인간을 초월한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가치들은 교환 가능성이란 환상이 없다면 지금처럼 강력한 지배력을 결코 행사할 수 없을 겁니다.
저주받은 채로 혹은 배척된 채로
자본이나 권력으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순간, 우리는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래서 반복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 우리는 ‘배척된 채로’ 삶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단독적인 삶은 교환 불가능한 것이고, 당연히 자본이나 권력으로부터 ‘저주받고’ ‘배척되는’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시인은 확신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배척과 저주를 감당해야만 한다고 말이지요.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본과 권력이란 중심을 해체하고 스스로 설 수 있을 겁니다.
#자유와 한계의 변증법_허연과 카뮈
반항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구조를 발견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시험해본 사람이 한계에 직면했을 때, 그는 자신을 옥죄고 있는 구조를 발견할 수 있는 법입니다…구조나 한계에 직면한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고, 자유로운 사람만이 구조나 한계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한계에 직면하는 순간, 드디어 우리의 자유는 진정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시험의 순간 누군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올 수 있을 만큼 왔으니, 이제 한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반면에 누군가는 “바로 이 한계에 직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만큼 온 것이다. 이제 이 한계를 뛰어넘도록 하자. 그것이 바로 자유니까”라고 말입니다.
“오직 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을 따라 흘러간다”? 산물고기처럼 인간도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타자에 맞서 저항할 수 있습니다. 카뮈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타자에게 ‘아니오’리고 외치면서 반항하는 순간, 나는 자신의 가치와 내가 옳다는 신념에 대해 ‘예’라고 긍정하게 됩니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인간은 반항 속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는 카뮈의 통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반항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느낀 것, 욕망하는 것, 혹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인간의 연대성은 반항 운동에 근거를 두고 있고, 반항 운동은 역으로 이 공범 관계 속에서만 정당성을 발견한다-카뮈, [반항하는 인간]
카뮈의 통찰에는 억압이 보편적이고 구조적으로 일어난다는 그의 속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부조리? 부조리를 경험할 때 발생하는 고통은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반항을 통해서 개인적인 고통은 집단적인 고통이라는 사실이 부각됩니다. 우리는 부조리에 대한 사적인 경험에 머물러 좌절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조리는 사실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세상일과 씨름하는 다른 학문들과 달리,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 삶을 내려다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포기하면서 물속에서 보았던 지리산의 푸른 하늘과 지리산 밤하늘의 은하수? 누구나 삶을 결정하게 된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좋은 글이 많아서 너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