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p224
1967년 11월 출간!
스펙타클의 비판 이론은 장기간에 걸친 역사의 보편적인 조건들을 처음으로 규명한 이론일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조건들이 소멸되지 않는 한 이 비판 이론이 수정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현재의 발전 국면은 더욱더 이 비판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며 예시하고 있다.독자들이 이 책에서 다시 접하게 될 스펙타클의 이론은 고차원적인 혜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완성된 분리
현대는 확실히…사실보다 이미지를, 원본보다 복사본을, 현실보다 표상을, 본질보다 가상을 선호한다…현대에서 신성한 것은 오직 환상뿐이며 진리는 속된 것이다. 현대인의 눈에는 진리가 감소하고 환상이 증대하는 정도에 따라 신성함이 확장된다. 결국 현대에서 환상의 극치는 신성함의 극치가 된다.-포이어바흐,[기독교의 본질] 제2판 서문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
스펙타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마르크스의 [자본]의 전용? “자본은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 이 사회적 관계는 사물들을 매개로 확립된다.”)
스펙타클을 시각 세계의 악용이나 이미지를 대량으로 확산시키는 기술의 산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스펙타클은 오히려 물질적으로 표현된 하나의 실질적인 세계관이고, 또한 대상화된 하나의 세계관이다.
스펙타클은 반박과 접근이 불가능한 거대한 실증성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오로지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무기력한 수용이다. 스펙타클은 반박을 용인하지 않는 자신의 보이는 방식, 즉 가상의 독점에 의해 그러한 무기력한 수용을 이미 획득하고 있다.
수단들이 곧 목적인 스펙타클? 현대 산업에 기초하는 사회는 우발적이거나 표면적으로 스펙타클적인 사회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스펙타클-지배 경제의 이미지-속에서 목표는 사소한 것이고 발전만이 전부이다. 스펙타클은 자신 이외이 그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스펙타클은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생산물이다
경제가 살아 있는 인간들을 철저하게 예속시킴에 따라서 스펙타클은 이 인간들을 자신에게 예속시킨다. 스펙타클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발전하는 경제이다.
인간의 특권적 감각은 다른 시대에는 촉각이었다. 스펙타클은 그것을 시각으로 대체한다…그것은 대화와는 거리가 멀다
스펙타클은 철학을 현실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철학화한다. 사변적인 세계로 퇴행하는 것은 바로 모든 사람의 구체적 삶이다.
분리는 스펙타클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사회적 분업의 제도화-계급의 성립-는 최초의 신성한 관조, 즉 신화적 질서를 구축해 왔다…신성은 사회가 할 수 없는 것은 설명하고 미화한다. 따라서 모든 분리된 권력은 스펙타클과 함께 존재해 왔다.
노동자와 생산물 사이의 일반화된 분리는 완료된 활동에 대한 단일한 관점과 생산자들 사이의 매개 없는 모든 개인적인 소통을 소멸시킨다.(스펙타클의 적은 대화!)
노동자는 자신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독립적인 지배력을 생산한다. 이 생산의 성공, 즉 과잉 생산은 생산자에게 박탈의 과잉으로서 되돌아온다. 노동자를 둘러싼 세계의 시간과 공간은 소외된 생산물들의 축적으로 인해 그에게 낯선 것이 된다. 스펙타클은 이 새로운 세계의 지도, 즉 노동자의 영토를 완전히 포괄하고 있는 지도이다. 우리로부터 탈주한 힘이 우리에게 강력한 지배력을 드러낸다.
사회 속의 스펙타클은 소외의 실질적 생산과 일치한다. 경제성장이란 주로 이 특별한 산업 생산의 팽창을 의미한다. 자신을 위해 가동되는 경제가 성장시키는 것은 자신의 본래적 실체인 소외뿐이다.
스펙타클은 고도로 축척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다!
#스펙타클로서의 상품
스펙타클의 본질적 운동은 유동 상태의 인간 활동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획하여 그것을 응고 상태, 즉 사물로서 소유하려 한다.
질의 저하가 스펙타클 언어의 모든 층위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상품 형태가 발전시키는 것은 바로 양이며, 그것은 오직 양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
상품 형태를 통한 경제적인 지배력의 끊임없는 확장은 인간 노동을 상품 노동, 즉 임금노동으로 변형시키면서 중첩적으로 풍요에 도달한다.
스펙타클은 상품이 사회생활을 총체적으로 점령하기에 이르는 계기가 된다. 상품과의 관계가 가시화되며, 사람들은 그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보는 세계는 상품 세계이다. 현재 경제의 생산은 상품 독재의 범위와 강도를 확장시키고 있다.
교환가치는 인간의 모든 사용가치를 결집시켜 그것의 충족을 독점함으로써 마침내 사용가치를 지배하게 된다.
#가상 속의 단일성과 분열
#주체와 표상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역사의 주체는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살아 있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 주체는 자신이 임무를 자각하는 존재로서 세계-역사-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된다.
관료주의는 국가자본주의의 유일한 주인인 된다.
혁명 이론은 이제 모든 혁명 이데올로기의 적이다. 혁명 이론은 그것을 알고 있다
#시간과 역사
사람들은 죽음과 생식기능이 시간의 법칙임을 깨닫지 못한다…왜냐하면 이 사회는 시간 속에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 오는 것만을 보기 때문이다.
생산의 불가역적 시간은 본질적으로 상품의 척도이다.
#스펙타클적 시간
“우리가 가진 것은 시간뿐이다. 집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시간을 향유한다.”-발타자르 그라시안,[세상의 지혜]
가장된 순환적 시간은 실제로는 생산의 상품-시간의 소비 가능한 은폐일 뿐이다(연장된 생존을 위한 소비의 시간)
시간의 세계가 시간의 광고로 대체된다
개인적 경험은 소통되지 않는다? 개인적 경험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는 스펙타클적인 가장된 기억을 위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망각된다.
스펙타클은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고 역사를 유기하는 현재의 사회조직이다. 스펙타클은 역사적 시간의 토대 위에 건립되는 시간의 허위의식이다.
세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간의 꿈을 가지고 있다. 세계가 그것을 정녕 경험하려면 이제 시간의 의식을 소유해야 한다.
(“세계는 오래 전부터 사태(사물)의 꿈을 가져왔다. 세계가 그것을 정녕 소유하려면 그것에 대해 자각만 하면 된다.”)
#영토의 구획
자본주의의 생산은 공간을 통일시킨다.
사회는 지리적 거리를 철폐하지만, 스펙타클적 분리로서 내부적 거리를 수용한다.
도시계획은 계급의 권력 수호를 위한 부단한 과업-도시의 생산 조건이 위험하게 집결시킨 노동자들의 원자화 상태의 유지-의 현대적 실현이다.
“앞으로의 일방통행의 세계”? “원거리의 대중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함께 인구의 고립은 아주 효과적인 통제 수단임이 사실로 확인된다”
고립을 향한 보편적 운동-이것이 도시계획의 현실이다.
이미지는 오직 고립 속에서 절대적 힘을 획득한다
“농촌은 바로 반대되는 사실, 즉 고립과 분리를 보여 준다”
#문화 속에서의 부정과 소비
소통의 언어가 자취를 감추었다…진정한 대화 없이 경험된 것을 타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삶의 결핍을 용인한다.
소통 불가능한 것의 소통? 문화 속에서 역사를 망각하게 하는 기능을 갖는 스펙타클이 모더니즘적 수단을 통한 가장된 독창성 속에 자신을 심층적으로 구성하는 전략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상품이 된 문화는 또한 스펙타클 사회를 선도하는 상품이 된다
그는 상품 자체가 법칙을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비판 이론은 고유의 언어로 소통되어야 한다
#물질화된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적 사실들은 결코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의식이다.
스펙타클은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왜냐하면 스펙타클은 모든 이데올로기적 체계의 본질-빈곤화,예속화와 진정한 삶의 부정-을 하나도 남김없이 진열하고 표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폐에 대한 욕구는 정치경제학이 생산하는 진정한 욕구이자 유일한 욕구이다”
스펙타클의 스크린으로 제한된 편평한 세계에 갇힌 관객의 의식은 가공의 대화자들만을 식별할 뿐이다. 이 가공의 대화자들은 자신들의 상품과 상품의 정치로 일방적으로 관객의 의식을 유지시킨다. 스펙타클의 모든 영역은 관객의 “거울 징후”이다.
우리 시대의 자기해방이란 전도된 진리이 물질적인 토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고립된 개인이나 또는 조종되는 원자화된 군중은 “세계 속에 진리를 수립하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
진정한 삶은 존재하는가?…삶의 표상이 삶을 대신하는 곳에 스펙타클이 있다. 21살의 젊은 청년 드보르는 직관적으로 인간 소외를 낳는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 스펙타클의 구조를 인식한다.
드보르의 사회 비판은 언뜻 단순하고 일반적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잘 제기되지 않았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경제는 자신의 법칙에 인간의 삶을 예속시킨다. 인간의 자각적인 통제 없이는 경제 영역 내부의 어떠한 변화도 세계의 변혁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드보르가 이제 주목하는 것은 노동의 영역뿐만 아니라 거짓 가치들로 잠식되어 있는 일상의 영역이다(일상의 혁명)
상황주의자? 시장 체제가 고안해 낸 표상의 방식, 거짓 가치들에 의해 인간의 행동과 삶의 수단이 박탈당한 채 철저하게 수동적 관객으로 전락한 인간들을 주목한다. 그는 이들에게 자각과 저항을 위한 각종 이론과 전술을 제공하면서 “상황의 구축”을 통한 삶의 복원을 외친다.
혁명은 어쩌면 이처럼 저항을 통한 일상의 재창조로부터 시작되는지 모른다(일상의 혁명)
수동성은 분리의 본질적인 조건이다. “원자화된 군중” 속에 “고립된 개인”은 스펙타클을 필요로 하고, 스펙타클은 개인의 고립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악순환은 후기 산업사회 속에서의 개인화 과정, 즉 자본주의 경제의 장치로서 분리의 실행 과정에 필연적인 요소이다.
소비사회의 주체 소비자? 이 주체는 사회,문화 산업(각종 매체, 영화, TV 등)에 의해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찬탈당한 분리된 존재이다. 드보르에 따르면, 스펙타클은 추상화의 최고 단계, 자본주의의 완성된 단계이다.
스펙타클은 미디어의 수단을 통해 전파되는 선전물로서 세상을 현혹시키는 단순한 부속 수단이 아니다. 스펙타클은 현 사회가 허용하는 삶의 유일한 시각을 정당화하는 경제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이 동원된다…스펙타클은 자본의 지배력을 선전하는 수단이자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
이 책이 약 50년 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스펙타클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인간의 행동 역량을 무력화하며서 삶과의 분리를 유지시키려는 조직 양태로서 스펙타클의 위력은 더욱더 공고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