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참 좋았다. 원혜영. p264
원경선·원혜영 부자의 풀무원 인생이야기
#농부와 정치인, 그 사이를 흐르는 ‘진정성’_남승우
풀무원 사업. 80년 대 초 대한민국 땅에서 유기농 채소 장사의 가능성을 읽어낸 원혜영의 상상력을 이해하기엔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원혜영 의원은 개인적인 안위가 아닌 자신의 젊음을 불태워서 정치, 사회적인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해왔고, 그런 사람을 지켜보며 생긴 믿음과 존중이 있었기에 풀무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원 의원으로부터 사업을 이어받은 나는 원경선 원장이 유기농으로 실천했던 ‘이웃사랑과 생명존중‘을 브랜드 정신으로 계승하였으며, ‘바른 먹거리‘를 통해 그 정신이 흔들리지 않고 지속되는 데 나의 혼을 쏟아부었다.
‘인간 상록수‘로 불리는 원경선 풀무원 농장 원장, 거창고등학교 이사장
“타협하느니 차라리 학교 문을 닫는 것이 인격적으로 바른 교육이 된다”
분야로만 보면 전혀 비슷하지도 않고 연결고리도 없을 것 같은 그 두 사람에게서 나는 ‘진정성’을 보았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화학비료와 농약 사용을 독려하던 정부의 정책이 ‘인간에게 독약‘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필생의 과업인 유기농에 매달린 원경선 원장님. 원장님의 이상과 실천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풀무원은 없었을 것이다.
인생을 되돌려 보며 이들의 가슴 밑바닥에 흐르는 ‘진정성’을 다시금 느껴보는 것은 참으로 흐뭇하고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은 이어져 간다_전성은
“하나님 기준으로 바르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기준으로 잘 할지는 장담 못하겠지만 사람의 기준으로는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옳은 것이 좋은 것이다.”
원경선 이사장님. 그분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긴 어려우나,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이익을 좇아 살지 말라, 정의와 사랑을 좇아 살아라”
정치인 원혜영. “좋은 것이 좋은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말은 버릴 수 없는 신념이다. 신념과 태도가 일치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일관되게 일치하기는 더 어렵다. 인간으로서는 한 번도 신념에 배반되는 일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일관되다’라는 말은 일생을 걸어온 길을 뜻한다. 한 길을 걸어간다는 말이다. 원혜영은 정치인으로서 일관되게 신념을 지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에게 아버지 원경선과 어머니 지명희라는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관된 삶을 살아온 ‘아버지와 아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의 역사 속에서도 정신은 이어져 간다. 조직된 단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한 인간, 그 인간에 의해서만 이어진다.
인류의 이익은 정의와 사랑. 그 정의와 사랑은 한 인간 원경선이 몸소 살아오고 물려준 정신이다. 그는 한평생 이렇게 외쳤다.
“죄는 곧 이기주의다. 개인이기주의, 가족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가 곧 죄다.”
#자식도 유기농한 아버지
유기농이란 땅의 본성을 살려 그대로 농사짓는 일, 화학비료와 농약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던 시절에 그것을 거스르며 아버지가 따른 농사법이었다. 아버지는 땅을 본성대로 돌려놓는 일을 했다. 그것은 개혁이었다.
개혁이란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대로 돌려놓는 것, 제 모습을 찾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아버지를 통해 배웠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나. 나는 아버지와 다른 삶이 가능했던 것은 원경선이라는 아버지가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찍이 나의 본성을 알고 그것을 살려주었다. 나대로의 길을 가게 두었다. 아버지는 농사만 유기농으로 했던 것이 아니라 아들도 유기농한 분이었다.
타오르지 않았다면 재가 남지 않았을 것이다.
재보다 더 좋은 거름이 어디 있는가. 그동안 아버지의 열정적인 삶이 거름이 되었기에 나는 아버지와 전혀 다른 길을 걷더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대세에 휩쓸리지 않고 대의를 지키는 나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랬고 내가 그랬듯이 세상의 모든 아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아버지가 거름되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보다 진화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는 농부다. 보다 알찬 열매를 위해 스스로 거름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생명 농사꾼이다.
풀무원식품 창업자는 아버지가 아닌 나
도시 생활을 접고 땅으로 돌아가 부부가 함께 자급 농사를 지으며 목적 있는 열정적인 삶을 산다고 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한국의 니어링 부부’라고 비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부모님 역시 자급을 위해 농사를 지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누구를 위한 자급인가 하는 점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부모님은 내 식구의 자급만이 목적이 아니라 (풀무원농장)공동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모든 식구들의 자급을 위해 농사를 지었다.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라는 책을 보면서 아버지를 생각했다. 평생을 농부로 살고자 한 것도,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짓는 것도, 그것을 교육하고 세상에 전파하는 것도, 기아를 예측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찾는 것도, 공동체가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는 것까지 생각과 실천에 있어 아버지와 피에르 라비는 흡사한 점이 너무나 많다.
피에르 라비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다. 쓸모없는 쇳덩어리를 뜨거운 불로 녹여 두들기고 또 두들겨서 이리저리 모양을 낸 다음 찬물에 담금질하고 다시 꺼내서 두드리고 두들기는 풀무질을 통해 쓸모 있는 연장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한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풀무질을 통해 사람을 쓸모 있는 연장으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인간도 풀무질이 필요하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풀무원 이름의 유래!)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필요한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정신이 상처 입었음을 조금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내 주변의 이 모든 ‘정신병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피에르 라비
뜻밖의 행운, 영농자금 특혜와 주일 시찰. 교회에 마음 놓고 갈 수 없다면 농장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일은 더 이상 행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자극한 고교 동기 남승우. ‘4당5락’, 약까지 먹으며 3시간 자고 공부, 열반에서 전교 2등. 지금의 풀무원 사장. 일단 목표가 서면 상식을 초월하는 노력을 쏟는 그가 있어 풀무원이 지금과 같은 눈부신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풀무질을 시작한 아버지
배가 등가죽에 짤 달라붙어 있는데 ‘배가고프다’는 생각을 ‘배고프지 않다’고 아무리 바꿔본들 그 바뀐 생각이 들어올 틈새가 있겠는가. 짝 달라붙은 틈새를 조금이라도 열어놓아야 귀도 열리고 눈도 열릴 것 아닌가. 배고픔이 없어야 성경책도 보이고 말씀도 들린다는 것을 경험했던 아버지로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굶주림부터 해결해주는 것이 순서였다. 함께 일하고 함께 먹으며 서로 나누는 공동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농장의 이름을 ‘풀무원’으로? 농장에 들어온 식구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농사일로 풀무질해서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뜻에서였다.
#’열린 교육’ 거창고 이야기
대부분 설립자가 이사장인 사립학교, 거창고의 경우는 예외였다. 설립자인 전영창 교장선생. 재정적으로 한 푼도 기여할 능력이 없는 아버지가 어찌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이사장이었던 셈이다.
자금난으로 문을 닫게 된 시골 학교 인수. 미국의 교단에 도움 요청했더니 한국의 원경선이라는 사람이 보증을 한다면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 대답을 들은 전영창 선생을 다짜고짜 아버지를 찾아와 꼭 좀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불멸의 교장’ 전영창 선생. 타계한 후에도 선생의 정신이 거창고의 뿌리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진실을 가르치는 것이다
“진실을 가르친다는 것은 허위를 폭로한다는 뜻이다.”
『거창고 이야기』라는 책에서 전성은 선생이 교육에 대해 쓴 글 중 한 구절. 이 한 줄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전영창 교장 시절에도 바른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던 거창고등학교가 전성은 교장이 맡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강건해졌다.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직접 보고 함께해온 전성은 교장은 ‘진실로 가르치면 진실로 배운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열린 교육’으로 유명한 거창고. 서로 배우고 겪려하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성적도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아버지는 영원한 이사장. 3선 개헌, 광주항쟁 때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때마가 학교가 가야 할 길과 신앙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정리해주었다. 학교가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바로 쫓아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주기도 했고 학교의 어른으로서, 정신적 지주로서 학교를 이끌어주었다…전성은 선생은 모든 이사장들이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학교가 성장하고 발전할 터인데 재정적인 일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모두들 이상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영원히 사는 길’을 안 홀트.
“사람들은 죽는 것만 두려워하지 영원히 사는 길을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심장마비로 죽을 고비를 넘긴 홀트, 지금의 삶은 ‘덤으로 사는 인생’. 크리스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의 마지막 줄,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홀트 씨는 잘 알고 있었다.
금식은 내가 먹지 않는 만큼의 절약된 양식으로 배고픈 사람을 먹게 하기 위한 것이지 자기 구원을 위해 배고픔을 참는 것이 아니라고 하던 아버지는 그날부터 일주일간 금식을 했다. 그것은 버림받은 자를 구원하지 못한 참회의 금식이요, 자신 몫의 양식을 내놓음으로써 배고픈 사람을 더 먹이기 위한 금식이었다.
함석헌 선생과 함께. 사상은 배우고 농사는 가르치고
현미의 효능에 대해 무지한 시절. 그 중 아버지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은 감마 오리자놀이다. 이것은 사람의 사색을 돕는다. 머리를 맑게 해주고 뇌를 정상화시켜주기 때문이다.
현미식 예찬론자. 아흔이 넘은 나이에 허리 디스크 수술. 현미식의 효과가 드러났다.
#생명농사, 유기농을 짓다
유기농에 눈뜨게 해준 고다니 선생.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농사는 간접살인‘
1976년 풀무원농장 초청 강연, 고다니 선생의 강연이 끝났는데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누군가 “우리도 일본의 애농회와 같은 유기농 단체를 만들자”고 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유기농 단체인 ‘정농회’가 발족되었고 회장으로 오재길 씨가 뽑혔다.
유기농은 환경운동이다.
흙 1그램 속에 적게는 5천만 마리에서 많게는 1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다. 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바로 유기농이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미생물이 죽지만 그것을 끊는다고 미생물이 당장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미생물도 생물체라 영양분을 먹어야 하는데 그들의 먹이는 퇴비 같은 유기질 비료이다.
살아 있는 농사를 주장하는 피에르 라비는 퇴비를 만드는 데는 별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지만 그 중요성을 말로 다할 수 없다고 말했다. 퇴비 없이는 생명 농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퇴비는 새로운 농업의 열쇠이지 화학비료의 공해를 해결할 수 있는 기적의 산물이라고도 했다. 또한 그는 거름(humus), 인류(humanity), 그리고 겸손함(humility)이라는 단어가 언어학적으로 같은 기원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인간은 또 자신이 농사짓던 땅의 거름으로 되돌아가지 않는가.
아버지는 그들에게 “농약이냐, 성령이냐”는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또 하느님의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이웃의 생명을 죽이는 농약을 칠 수 있겠는가? 농작물의 소비자들은 바로 우리들의 이웃이다.
“유기농은 농약과 화학비료로 인한 간접살인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장미를 껴안는 것과 같습니다. 장미 다발을 껴안으면 가시가 몸을 찔러 아프지요. 그 아픔을 견뎌야 장미 다발은 내 품 안에 있게 되지요.”
‘새로운 가치’를 사업화하다.
일반 농산물 시장에서는 제값을 쳐주지 않던 유기농산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보기에 신통치 않는 농산물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그들이 인정하는 ‘새로운 가치’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찾는 ‘새로운 가치’가 생계 해결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했던 내게도 ‘새로운 가치’로 다가왔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인정하고 선택해주는 소비자층이 초기에는 아주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구축한 풀무원식품의 신뢰는 경제 수준의 향상과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에 힘입어 빠르게 확산될 것이라고 나는 예측했다.
마케팅 전문가인 친구의 조언. ‘일점 집중원칙’?그 상품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특정 소비층을 대상으로 영업을 집중해야 한다.
25년 만에 대학을 졸업. 평소 나중에라도 정치를 그만두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하고 싶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와 정치인들의 식당 ‘하로동선’, 여름의 화로, 겨울의 부채처럼 당장은 필요하지 않지만 때가 되면 긴요하게 쓰인다.
정치하듯이 식당을 운영하면 망하지만 식당 운영하듯이 정치를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조언하던 손님도 있었다. 우리는 정치하듯 식당을 운영해 망했지만 그 식당을 운영한 경험으로 정치를 해서 노무현이라는 대통령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부천시장. 시민과 함께 만든 문화도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
행정은 항상 시민이 우선이다. 부천이 최초인 사업들. 작은도서관, BIS. 1,400억 원을 들인 종합운동장은 시민들이 기껏해야 1년에 한 두 번 이용하는데, 버스 자동안내 시스템은 거의 모든 시민들이 매일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 예산은 50분의 1밖에 안 되지만 효과는 50배, 1백배가 더 되는 사업을 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가 아니겠느냐며 설들에 설득을 거듭했다.
부천이 자랑스러운 사람들.
부천시에서 추진하는 모든 사업의 우선순위는 아이들이었다. 교육 잘 받고 정서적으로 풍부해지면 아이들은 행복하다. 내 아이들이 행복한데 행복하지 않을 부모가 또 어디 있겠는가. 도시 곳곳에 나무와 꽃이 무성하여 어려서부터 자연을 만끽하고 일상 속에서 박물관을 드나들며 자란 아이들. 영화제 같은 국제 행사에서 마을축제까지 크고 작은 축제 속에서 공연과 전시를 즐기면서 성장한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행복한 부천시민이 되어 있었다.
#생명을 수호하는 아버지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의 경제 원칙? 모세와 애굽을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비처럼 내려주시면서 일용한 양식 외에는 쌓아두지 말라 하셨다. 그 말에 순종하지 않고 숨겨 둔 것에서는 어김없이 냄새가 나거나 벌레가 생겼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daily bread’,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이었다.
아버지는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의 경제원칙이라고 했다.
그날 그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는 것이다. 잉여 생산이 생기면 그것을 일용할 양식이 없는 생명에게 나누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 탓에 그 원칙이 깨졌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다. 자신과 가족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더 쌓아두기 시작하자 곳간이 필요했고, 곳간을 짓자 도둑이 생겼으며 도둑으로부터 재산을 지킬 힘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군대가 필요했고 그 군대가 전쟁을 불러왔다는 것이 아버지의 ‘전쟁 기원론’이다. 그 뿌리는 결국 가족이기주의이고, 평화를 염원하셨던 아버지는 공동체 생활을 해온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평화 유지론’을 내놓았다.
1976년, 양주로 공동체를 옮기면서 당신 소유의 재산을 공동체에 기부해 사유재산의 축적을 없앴고 날마다 함께 일하며 먹고살았다. 다 같이 먹으니 빼앗을 필요가 없고, 축적하지 않고 나누니 빼앗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걱정이 없었다. 이것이 평화였다. 아버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주기도문을 말 그대로 실천하면 굶주림과 군대, 전쟁이 없는 인류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 삶의 전부가 ‘일용할 양식’으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 전체가 아버지의 생활을 지배했지만 그중 유독 ‘일용할 양식’에 집중한 것은 그 안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대로 믿어 순종하는 아버지, 그것이 아버지의 생명 사랑법이다.
나누면 반드시 평화가 온다. 아버지에게는 분명한 기아 대책이 있다…15억 명이 기아 상태. 우리가 25퍼센트씩만 더 일해 기부하면 지구상에서 굶주림은 사라진다. 혼자 먹으려고 쌓아두지 말고 나눠주면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종국에 다다르고 싶은 공동체는 이처럼 인류가 함께하는 생명공동체다.
군대를 없애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렇다고 ‘굶주림과 군대와 전쟁이 없는 인류 평화의 길’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아버지의 진정한 아들 전성은과 남승우
전성은. 고3때 아버지로부터 들은 로마서 강의가 그의 일생을 결정했다고 했다…신앙은 역사를 보는 눈이자 세계를 보는 눈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증명하고 있다는 선생은 『기독자의 종국의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아버지의 말씀 모음집을 내기도 했다.
괴산으로 아버지를 모셔간 풀무원의 남승우 사장 역시 나보다 더 아들 노릇을 하고 있다. 정작 장암인 나는 모시지 않고 있는데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부모님의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그것도 고마울 일인데 공동체 식구들까지 함께 일하고 먹으며 나눌 수 있는 터전을 제공했다.
정치에도 순정이 있다는 걸 알려준 노무현
사업과 행정을 해 본 나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인은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노무현에게는 속세의 기준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그건 꿈과 이상을 향한 고독한 질주, 그럼으로써 생명력을 보태는, 단기 업적이 아닌 장기 비전의 제시였다.
그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도구’였다…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이타(利他)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영원한 이상주의자, 노무현. 그의 꿈이 커다랗기에 현실에서는 좌절이 많았다.
사람 사는 세상의 정치가 곧 ‘생활정치’. ‘생활정치연구소’의 문을 열었다.
농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삶을 걸었던 아버지처럼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한국 정치의 틀을 바꿀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을 모색. 정치보다 정책, 이념 투쟁보다 가치 실천에 무게를 두어 활동을 해보자는 취지. 그렇다고 생활정치가 탈이념은 아니다.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가치를 실현하고 정착시키는 일을 하려는 것이었다.
뭔가를 했다는 콘크리트 기념물 중심의 업적은 이제 국민들이 바라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한 물량위주의 토건국가 정치는 7,80년대 산업화 시대의 정치다. 국민들은 생활 속의 구체적인 변화와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동네마다 촘촘히 설치된 저렴한 어린이집, 채소와 고기 같은 먹거리를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검역 및 관리 시스템, 중도 퇴직자들이 채취업이나 창업을 위해 꼭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배울 수 있는 정교한 교육제도 같은 것들이 다리 하나, 도로 하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부유한 부모나 친척을 두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정치와 행정, 이것의 초석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일이 내가 할 정치라고 믿게 된 것이다.
#유기농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 위해
유기농은 무공해로 농작물을 생산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다. 사먹는 사람이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만 농부 역시 농약을 멀리하다보면 자연스레 건강해진다. 밭이 건강해지면 사람이 건강해지고 넓게는 자연과 지구가 건강해지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에서 시작해 생명을 생명답게 살도록 섬기는 것이 유기농업의 궁극적 목표다.
나는 훨씬 부족하다…하지만 아버지만큼의 성취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앞으로 남은 시간을 지금까지 해온 대로 산다면, 그래서 이 사회를 진일보시키는 데 조금이라고 더 기여한다면 스스로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아버지는 유기 농작물을 생산하고 보급하는 데 평생을 바쳤고, 유기농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다. 이제야 그걸 깨닫다니. 공자는 나이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육십에 귀가 순해진다고 했는데 나는 10년 정도 늦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함께 한 60년,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