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만들기. 존 테일러 게토.p168
Dumbing us down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아이들로서는 실제적인 일에 관한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자기 일거리를 좋아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진짜 선생님과 만나는 것이 그 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효과를 불러 올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분이 그런 강의를 하는 데는 또한 사회활동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사회 안에서 노인과 아이들이 서로 어울려야 한다는 존 개토의 지적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앎과 삶이 일치하는 교육환경)
아무런 목표도 없는 수업? 한 의사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치료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기가 환자를 쳐다보고 있지 않을 때라고. 내가 보기에 학습은 교사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도적 편의를 위해 토막내 놓은 조각 시간 안에서,학생들이 살고 있는 실제 세상에서 격리된 교실안에서,진정한 학습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존의 글을 내가 좋아하는 점은 터무니없는 분방함과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데 없는 차가운 지성이 활기차게 어울려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학교를 감옥에, 수용소에, 감방에 비유하고, 심장에 말뚝을 박아야 할 흡혈귀 조직이라고 규정하며, 학교종이 아이들의 마음에 무관심을 주입하는 주사기라고 설파한다. 존의 입장은 독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하다!
존의 말이 맞다. 학교를 개선하겠다고 조물락거려 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바닥에서 다시 출발해 교육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마음의 교육만이 아니라 영혼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전복적 발상의 전환)
***우리가 당연하고 명백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뒤집어 생각해 보도록 이 책은 요구한다(거꾸로 희망이다!)
학원 폭력은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이 짓을 그만두라고 외치는 아우성이다. 미국인의 낮은 대화 수준은 시민들의 상상력이 학교제도의 한심스러운 비효율성에 잡아먹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전체주의 교육의 목적은 신념을 키워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념이라도 만들어 낼 능력을 박멸하는 데 있다.”-한나 아렌트
우리는 통상 ‘가장 좋은‘ 것을 ‘가장 많은‘ 것으로 간주하는 일이 많다. 질에서 양으로의 이 전환은, 사람들 개개인이 온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좋을까를 생각하기보다 반(거의)독점적인 공교육기관에 어떤 자원을 확충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쪽으로 옮겨 가게 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바람직한 전환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 재정을 확충을 위해, 미친 듯한 경쟁,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한 아귀다툼을 보며 자라는 우리의 아이들은 과연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잘못 없이 경쟁에 져서 탈락한 아이들에게 이 미치광이 경쟁은 어떤 생각을 심어줄까? 아이들의 신념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빚어진다고 할 때, 사회질서는 얼마나 크게 손상될 것인가?
바보 만들기? 교사의 양심선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교육문제의 진짜 뿌리? 프러시아에서 빌려온 근대학교교육!
***학교를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아이들이 생기를 잃어버리고 가능성을 매장당한 채 그저 밥벌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어른이 되는 현실은 근대화 과정을 거친 국가들이라면 겪는 비극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답을 찾는 지름길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다(질문이 답이다!)
맹목적 줄 세우기, 동년배 모아놓기, 혼자 있지 못하게 하기, 끊임없는 감시 같은 학교제도의 모든 일반적인 요소들이 마치 누군가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꾸며낸 것 같다? 국가 독점 교육제도의 사회학적 특성
제가 가르쳐 온 것? 계급제도에 근거한 경제체제를 떠받드는 신화를 뒷받침해주는 보이지 않는 교과서였다!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
1)혼란
2)교실에 갇혀 있기
3)무관심
아주 교묘한 방법? 종소리의 진정한 가르침이란 어떤 일도 끝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완전한 경험을 불가능하게)
학교의 시간을 지배하는 감춰진 원리가 바로 종소리입니다.
4)정서적 의존성
아이들에게 각자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목표가 정해진 지휘 체계에 따르도록 가르칩니다
5)지적 의존성
교사가 어떻게 하라고 시카고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착한 학생들입니다
스스로는 뭘 할지 모르기 때문에 남들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바탕으로 하나의 생활양식이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6)조건부 자신감
우리의 세계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경우 버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학교 분위기의 생태학적 원리는 상업경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만을 영속화하는 데 있습니다.
7)숨을 곳이 없다
저는 숙제라는 이름으로 학교 공부가 집안에까지 연장되도록 시킵니다. 감시 자체는 연장되지 못해도 감시의 효과가 연장되는 셈입니다. 아이들에게 남는 시간이 있으면 자기 부모에게서든, 길거리를 다니면서든, 동네에 사는 현명한 할아버지에게서 든, 학교에서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을 배울 위험이 있습니다.
제 가장 뛰어난 동료 교사들 중에도, 그리고 제가 만나본 가장 훌륭한 학부모들 중에도, 교육이 다른 방법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규모 학교에서 국가 독점 의무교육이 거둔 위대한 승리를 보여 줍니다.
스스로 의미를 찾아낼 줄 아는 것,스스로 만족할 만한 목적을 찾아낼 줄 아는 것, 이것이 진짜 교육의 핵심입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명령을 따르는 법 말고는 진짜로 가르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수없이 많은 선량하고 열성적인 사람들이 학교에서 교사로, 직원으로, 보조원으로 일하고들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사람들의 개인적인 노력이 제도 자체의 추상적 논리 속에 파묻혀 버리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아무리 정성을 쏟고 열심히 일해도 제도 자체가 미치광이입니다. 양심이 없는 제도죠.
한참 시를 짓고 있던 젊은이도 종이 울리면 바로 공책을 덮고 다른 교실로 달려가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외울 준비를 하게 하는 그런 제도니까요.
사실 읽고 쓰고 셈하는 기술을 익히는 데는 백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배우는 사람이 의욕만 있다면요. 가르쳐 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배우려는 마음이 식기 전에 가르쳐 주는 것이 요령입니다.
‘기본 기술’의 습득을 주장하는 끊임없는 아우성은 하나의 연막일 뿐입니다.
중앙통제 강화의 결과? 우리의 삶이 비인간화되고 개인과 가정, 지역사회의 의미가 퇴화되는 것입니다. 대규모 교육기관이 이런 성질을 갖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학교는 우리 아이들을 데려다가 지역사회의 생활 속에서 아무런 능동적인 역할도 맡을 수 없게 붙잡아 놓습니다. 사실 아이들의 교육을 자격증 가진 전문가들의 손에만 맡겨 놓는다는 것이 바로 지역사회를 파괴하는 짓입니다. 그렇게 해소 우리 아이들이 완전한 인간성을 가지고 자리나지 못하게 합니다. 사회생활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제대로 맡지 않으면서 건전한 인격체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학교인 특정한 사회공학 모델을 지탱하는 긴요한 부속품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모델은 사람들로 하여금 통제력의 뾰족한 정점을 떠받드는 피라미드 안에서 여기저기 자리를 지키는 돌멩이 노릇을 하게 합니다. 학교는 이런 피라미드 모양의 사회 구조가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책략의 본산입니다. 이것은 미국 독립혁명에 대한 근본적인 배신입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공화국 시대까지 이곳에는 학교라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어 보십시오. 학교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던 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학교는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것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썩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착한 이집트인이 되어 피라미드 속에 제 자리를 잡는 법을.
근대교육과 ‘학교’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학교교육의 일곱가지 내용? 혼란, 교실에서의 구속, 무관심, 정서적 의존성, 지적 의존성, 조건부 자신감,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은 항구적으로 예속된 계급, 자신이 원래 무엇을 타고났는지 알아낼 길을 영원히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입니다!
교육 직업화의 폐단? 건강한 사회에서라면 모든 사람이 발휘할 교육의 기능을 봉쇄하는 것이 교육의 직업화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그들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잔인합니다. 물질주의에 빠져 있고 의존적이며 수동적입니다. 난폭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일 앞에서는 겁쟁이가 되고, 의미 없는 일에 몰두합니다.
제도화한 학교교육의 가장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 그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지독하게 반교육적인 것입니다!
학교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고할 경우 그 비용이 지금 쓰고 있는 것보다 너무나 적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이해관계가 얽힌 세력들이 놓아둘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취로사업 대상자인 셈입니다.
#학교의 악몽
우리는 아이들을 기르는 데 너무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 모든 돈과 우리가 아이들의 삶에서, 스스로 탐구하는 시간에서 빼앗은 모든 것들이 그리고 가족과 이웃에서 아이들을 억지로 떼어낸 이 모든 사실들이 교육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요?
프러시아에서 92퍼센트의 아동을 교육하는 국민학교Volksschule의 목표는 지성의 발달이 아니라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였습니다.
프러시아식 교육법은 지성도 마비시키지만 도덕 의식까지 마비시킵니다.
민주 사회에서 마지막 판단은 전문가의 몫이 아니라 민중의 몫입니다
#미치광이 학교
올해의 교사상? 정말 훌륭한 교사들은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어린이와 노인을 배제한 사회란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는 사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사회가 아니라 조직입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이 고독감에 빠져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 비극 속에서 학교가 하나의 큰 배역을 맡고 있습니다.
교사들이 아무리 정성을 쏟고 열심히 일해도 제도 자체가 미치광이 입니다.
같은 사회계층에 속한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끼리 묶어서 감금 상태에 두는 체제에 속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반생명적인 일입니다. 이 체제는 아이들을 삶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 서로 다른 요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온갖 상생 상극 관계로부터 절연시켜 놓습니다. 아이들을 과거와 미래로부터 단절시켜 영속적인 현재 속에 묶어 놓는 것은 텔레비전이 하는 것과 똑같은 짓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삶을 통제하는 두 가지 제도? 텔레비전과 학교, 이 두 가지는 진짜 세계, 곧 지혜와 용기, 자제와 정의의 세계를 뭉그러뜨려 쉴 새 없고 끝없는 추상의 세계로 만들어 놓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수천 년간의 인류의 경험에 반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가능하며 거기에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병든 제도에 인력과 자금을 퍼 넣기만 해서는 병세가 더 심해지기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교육의 근본 명제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유럽 지배층의 엘리트 교육제도의 밑바탕? 스스로 알게 하는 것이 모든 진정한 앎의 근본이 된다는 믿음!
지금 우리는 아이들에게서도 스스로의 앎울 키워나갈 시간을 몽땅 빼앗고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 아이들에게 독립된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스스로의 앎을 얻게 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라 아이들을 진짜 세상과 접할 수 있게 해서 그들의 독립된 시간을 추상화된 관념이 아닌 진짜 일에 쓸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위기 상황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조치가 필요합니다.(자유학교)
‘학교’의 개념을 열어젖혀 가정을 교육위 주된 동력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정이라는 교육과정’은 모든 훌륭한 삶의 알맹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대 우리는 이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전문가’ 의견? 교육의 전문가들은 옳은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이란 비용은 많이 들고 자기네들에게만 유리한 것이며 예외 없이 중앙집중의 강화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이제 돌아갈 때가 욌습니다. 민주주의로, 개인의 세계로, 가정으로.
#초록색 마을 모농가헬라
강이 어떻게 저를 교사로 만들어 주었냐고요? 그곳이 제 연구실이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사물은 아무리 보더라도 싫증날 수가 없는 거니까요.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 흥미진진한 배와 최근 몇십 년 동안 발달해 온 재미 하나 없는 비행기, 어린 아이가 이해할 만한 의미를 아무 것도 갖지 않은 날아다니는 깡통 사이의 차이를? 흥미를 느끼는 시늉도 정말 하기 힘듭니다.
그 강가 마을 모농가헬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저의 교사였습니다.
모농가헬라에는 일종의 자연스러운 예법이 있었습니다. 법칙을 글로 적어 놓는 일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시간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자라나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배우며 자라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가르칠 줄 알게 된 곳, 어린아이 때부터 제 몫의 의무를 책임지는 습관을 통해 일하는 법을 가르칠 줄 알게 된 곳, 그 강과 그 강가에 사는 사람들을 비롯한 일상적인 환경에서 스스로 모험을 빚어내고 찾아낼 줄 알게 되었던 곳.
이 일을 26년 동안 해 온 오늘날까지 제가 지내 본 어느 교무실에서도 아이들에 대해서나 교육이론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아이들에게 타자를 가르치면 안 됩니다. 자격증이 없으니까요. 알어들으셨죠?”
“선생님 같은 선생님은 찾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의 제자 밀라그로스 드림.”
이 한 줄의 글이 한 사람의 일생을 교사직에 붙들어 놓은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받은 의미 있는 칭찬으로는 첫 번째였습니다…저는 그 말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교육을 삶 속으로 되돌려 놓자
다른 면에서는 건강한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학교교육에 대해서만은 이상한 생각들을 합니다. 가정이 무너지는 문제에 대한 돈 적게 드는 해결책으로 학교의 시간 수나 학기를 늘리는 방법 따위로 정규 학교교육 체계를 확장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사람들이 사회community와 조직network의 진정한 차이, 심지어는 가정과 조직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지 않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진정한 사회란 말할 것도 없이 이와 같은 참여적인 태도를 가진 진정한 가정들이 모여서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조직은 전인격적인 인간을 필요로 하기보다 인간을 분해를 조각들을 필요로 합니다. 조직 안에서 기능하는 사람들은 조직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을 억누르도록 요구받습니다. 아주 부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길들여질 수는 있습니다.
탈학교! 학교교육은 더 확대되어서는 안 되고, 축소되어야 합니다.
“교육기간 언제나 그랬던 것 아닌가?” 교육이란 늘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학교, 대기업, 기숙사, 군대, 병원, 정부기관 같은 제도적 집단의 사회적 성격을 고찰할 때 그런 집단들이 원래 사회가 아니고 조직일 뿐이라는 사실을 흔히 간과하고 지나갑니다. 조직과 사회와 다른 점은 아주 좁은 범위에서만 관계를 갖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합리성? 인간성이 제대로 발휘될 때, 그 존재는 합리성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이 ‘학교사업’은 조직의 가치 기준이 전통적인 지역사회의 가치기준과 상치되는 예룰 보여 줍니다. 지난 150년간 제도교육은 경제적 성공을 위한 준비를 주된 목적으로 내걸어 왔습니다. 좋은 교육이란 좋은 일자리를 얻어 돈을 잘 벌고 많은 물건을 갖게 되는 살이라는 것입니다.
성적=돈의 공식을 모든 분야로 확장하려는 것
우리 행성의 흙과 공기, 물을 위협하는 무절제한 소비를 더더욱 조장하는 하나의 길로 교육의 역할을 생각할 때 과연 무엇이 얻어지는지를 자문해 본다면 교육을 하나의 경제상품으로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은 일인지 자명해집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스스로 의미를 찾아낼 줄 아는 것, 스스로 만족할 만한 목적을 찾아낼 줄 아는 것, 이것이 진짜 교육의 핵심입니다. 아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가둬놓은 채로 어떻게 이것을 이룰 방법이 있을지,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회에는 자연스러운 한계가 있다는 것이 조직과 다른 중요한 차이의 하나입니다.
진정한 사회와 달리 거짓된 사회와, 학교를 비롯한 포괄적 조직들은 무한히 팽창합니다. 당장 탈만 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더 많은’ 것이 꼭 ‘더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직 활동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것이 언제나 더 수지가 맞습니다…확장을 계속한다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조직의 힘의 원천은 경쟁에 있으며, 성과를 수치로 나타내는 방법이 정밀한 비교를 위해 쓰입니다.
그러나 교사인 제가 보기에 학교는 이미 사회를 취약하게 만들고 가정을 취약하게 만드는 주범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든 그것은 독창적인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지, 틀에 맞춘 인간형을 찍어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중요한 일들이 어떤 것들이고, 사람이 살고 죽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교사 노릇을 해 오면서 제가 배운 사실은 대량교육의 원리와 구조 양쪽에 다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제도가 이 나라의 국가적 이념인 민주주의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까닭은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나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량교육이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까닭은 그 일상적인 일이 엉터리 경쟁과 억압, 그리고 강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효과를 이끌어내는 경험이나 교육의 과정을 진행시키는 자기 인식은 돈 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교육에서 단돈 천 원도 옆에서 뽑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학교제도는 갈수록 푸짐해지는 좋은 봉이죠.
금세기 최고의 수학자이자 최고의 철학자의 한 사람인 버트런드 러셀이 65년 전에 지적한 바 있습니다. 미국의 대량교육은 비민주적 의도를 함축한 것으로서 인간의 다양성을 제거하고 그 다양성의 원천인 가정을 억압함으로써 국가적 통일성을 조작해 내는 수단이라고 말입니다. 대량교육은 뚜렷하게 ‘미국적인’ 학생들을 만들어낸다고 러셀경은 말했습니다. 반지성적이고 그릇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감 없는 젊은이, 그리고 러셀이 말하는 ‘내면적인 자유’를 다른 어느 나라 젊은이들보다 적게 가진 젊은이가 미국 젊은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돈밖에 목표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고급스러운 동기가 된 적이 없습니다.
제도적 학교를 해체합시다. 교사자격제를 없애시다.
‘바보 만들기’와 마주친 인연으로 홈스쿨링 결정? “이 책이 제 인생에 어떤 충격을 가져왔는지! 이제 저는 딸들이 가정의 편안한 환경 속에서 쑥쑥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며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잃은 것 중 가장 큰 것이 아마 자기 자신을 아는 능력, 그리고 충만한 사랑을 하는 능력일 것입니다.
제 연설의 알맹이능 언제나 이것이었습니다. 강요된 제도교육은 잘못된 방향으로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개혁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 제도교육은 설계자들이 원래 의도한 바를 놀랄만큼 정밀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총체적 관리에 순응하도록 가르치는 데,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이 평생 미숙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과학적 관리를 쉽게 만드는 데 학교란 대단히 훌륭한 도구입니다. 관리란 그 대상이 불완전한 인간일 때 효율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근대적 관리체제가 피관리자들에게 요구하는 집단적 복종을 유사과학적 방법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목적입니다.
전문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자유의 모든 측면을 침해해 온 면허받은 도둑놈들에게 맞서 온 하나의 사례로서 나 자신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근래 저는 뉴욕 주 북부에 있는 128에이커 땅에 휴양농장 겸 도서관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혼자의 집’이라고 부르려 합니다.
“바보 만들기 | 학교의 진실”에 대한 1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