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유란 무엇인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460쪽
권리와 통치의 원리에 대한 연구
17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문학적인 영예를 추구한다는 것은 내게는 시대착오로 여겨집니다.
22 이 세상에서 모든 종류의 소유가 너무도 자주 남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남용에서 폐지를 결론짓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모든 질병을 단숨에 없애는 죽음과 너무나 흡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를 침해한다거나 더군다나 파괴하지 않고도 이 질병에 대한 치유책이 여전히 있습니다…우리는 그 법률들을 개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법은 코란이 아닙니다….그러므로 소유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법률을 개정하면 됩니다.
31 만일 내가 “노예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야만 한다면, 그래서 내가 한마디로 “그것은 살인이다”라고 답한다면, 나의 생각은 당장에 이해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도둑질이다”라고 마찬가지로 답할 때마다, 내 답변이 잘 전달되지 못했다는 노파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두 번째 명제는 사실상 첫번째 명제가 모양을 바꾼 것에 불과한 데도 말이다.
소유, 그것은 도둑질이다!
34 나는 어떤 체계도 세우지 않는다. 나는 특권의 종언, 노예제의 폐지, 권리의 평등 그리고 법의 지배를 요구한다.
35 정의, 오로지 정의, 이 논문의 요체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언젠가 “왜 사회에 그토록 고통과 빈곤이 만연해 있는가?”하고 자문한 적이 있다. 인간은 영원히 불행한 존재인가?…나는 스스로 문제를 파헤쳐 보길 원했다. 나는 학문이 대가들을 참조했으며, 철학, 법학, 정치경제학, 역사에 관한 백여 권에 달하는 책들을 독파했다. 이 많은 독서가 불필요한 시대에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36 나는 우선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묘한 결론에 나의 영혼은 전율했다. 나는 나의 이성을 의심했다. 나는 스스로 되묻곤 했다. 눈이 본 적도 귀가 들어본 적도 지력이 꿰뚫어 본 적도 없는 것을 내가 발견했다니!
…따라서 나는 내 판단을 검증해 보기로 마음먹었다…인류가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고 그토록 널리 잘못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인류의 오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가?
37 조건의 평등은 권리의 평등과 같다고. ‘소유’와 ‘도둑질’은 동의어라고, 재능과 봉사의 우월성이라는 구실 아래 얻은, 아니 차라리 빼앗은 사회적 탁월성이란 불의이며 강탈 행위라고 누구나 믿고 있으며 즐겨 말하고 있다. 내가 말하건대, 이러한 진실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내가 할 일이라곤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52 정의에 대해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온 가장 합당한 말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경구 속에 담겨 있다. “남이 네게 해주길 원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라. 남이 네게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행치 말라.”
54 노예는 로마의 부의 가장 비옥한 원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족들을 해방시킨다면, 이는 로마의 권리를 부정하는 일이자 로마의 재정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로마의 권리 주장들은 모든 인습들에 의해 그리고 만민법에 의해 정당화되었다…그 제도를 건드리는 것은 사회의 근저를 흔드는 일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식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혁명의 심연을 여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러한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피와 사치 속에 죽어 갔다.(로마의 멸망!)
‘신의 말씀’과 복음….이 혁명에서 정의 관념은 지금까지 누구도 꿈꿔 보지 못한 그리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영역으로 들어섰다. 정의는 주인에게만 존재했었다. 이제부터 정의는 하인들을 위해서도 존재할 것이었다.
65 마침내 인민은 소유권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신이여,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보라, 지난 50년 동안 인민은 이 가련한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어떻게 자유와 평등을 찾으면서도 저들은 특권과 예속에 다시 빠졌는가? 늘 그렇듯이 옛 제도를 흉내냈기 때문이 아닌가.(프랑스혁명)
66 가혹한 소유 형태들, 부역, 상속불능, 지배권, 공직에서의 배제 따위는 사라졌으면 향유의 형태가 변경되었다. 그러나 근본은 변하지 않고 남았다. 권리의 할당에서 진보가 있었으나, 혁명은 없었던 것이다.
68 정치적 평등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소유를 폐지하시오. 그리하지 않을 것이면 왜 불평하는가?
자연권으로 간주되는 소유에 대하여, 소유의 동인으로서의 선점과 민법에 대하여
88 소유란, 그 어원학적 추론이나 법리상의 정의에 따르자면, 사회의 외부에 있는 권리이다. 왜냐하면 만일 개개인의 재산이 사회적인 것이라면 조건은 분명히 모두에게 평등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유란 인간이 사회적 재산을 절대적인 방식으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89 권리, 그것은 우리처럼 태어나고, 살고, 죽는다. 그러나 소유란 정말로 이와는 다른 것이다. 마치 주체가 없어도 기능은 존재하듯이, 법률에 의해서 소유는 소유자 없이도 존재하는 것이다.
90 #소유의 토대로서 선점에 대하여
소유권의 동인으로서의 노동에 대하여
141 #토지는 전유될 수 없다
경작지는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무상으로 준 것이므로 천부적인 부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157 시효취득? 시간 지속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창출하지도, 바꾸지도, 변형시키지도 못한다.
170 #노동은 소유물의 평등에 귀착된다
185 #사회에서 모든 임금은 평등하다
191 모든 개인적 장점은 자연의 몫이며, 어느 정도까지는 개인의 몫이다.
끝까지 달린 사람은 누구나 결승점에서 대가를 받는다. 그러나 반드시 일등일 필요는 없다.
179 내가 태어난 이 부르주아 도덕성의 시대는 도덕에 대한 감각이 정말 무뎌져 버렸다.
179 수당, 일당 지급했다? 노동자들의 협동과 조화, 그들 노력의 집중과 동시성에서 나오는 이 거대한 힘에 대해 자본가는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았다!
200명의 정예병이 몇 시간만에 룩소르의 오델리스크를 단단한 지반 위에 세웠다.
180 한 사람이 200시간 안에 같을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자본가의 셈법으로는 임금의 액수가 같다는 말인가…그러므로 자본가가 얻은 것과 지불한 것 사이에 수지를 맞추어 보자.
183 분할하고 통치하라. 분할하라, 그러면 당신은 통치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부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이성을 흐리게 하고, 정의를 우롱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을 서로 떼어 놓으면, 각자에게 지불된 일당이 각자가 개인적으로 생산한 가치를 넘을 수도 있다.
184 모든 생산은 필연적으로 집단적인 것이므로,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에 비례해서 생산물과 이익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모든 축적된 자본은 사회적 소유이므로, 누구도 배타적인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
185 생시몽주의자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몫을, 각자의 성취에 따라 각자의 능력을(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 각자의 자본, 각자의 노동, 각자의 재능에 따라 각자의 몫을(푸리에)
188 자본에 의한 생산? 등가의 생산물과 교환
189 자본은 교환될 수 있으나, 소득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191 모든 개인적 장점은 자연의 몫이며 어느 정도까지는 개인의 몫이다.
192 누구에게나 경주 트랙. 지나치게 길지도 지나치게 험난하지도 않다. 끝까지 달린 사람은 누구나 결승점에서 대가를 받는다.
그러나 반드시 일등일 필요는 없다.
197 장자크 루소는 “우리가 매일 보고 지나치는 것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관찰하려면 많은 철학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202 상거래? 동등한 가치의 교환
자유롭다는 것은 이성과 능력을 향유하며 열정에 눈이 멀지 않고 두려움에 강제되거나 방해받지 않으며 허위에 기만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202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경제이고, 정의이며, 자유이다. 자유!
상거래를 말하는 자는 동등한 가치의 교환을 말한다…상거래는 자유로운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
자유롭다는 것은 이성과 능력을 향유하며 열정에 눈이 멀지 않고 두려움에 강제되거나 방해받지 않으며 허위에 기만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218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훈육시키는 일이 영예이듯이,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도 귀중하다.
221 여행객이 자신이 지나가는 대로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사꾼은 자기가 씨를 뿌리는 밭을 자기 것으로 하지 않는다.
한 생산물의 교환가치는 사는 이의 의도와 파는 이의 의도를 척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들어간 시간과 비용을 척도로 하기 때문에 소유는 누구에게나 항상 평등하다
223 각자의 소비는 모든 사람에 의해서 주어진다
정의의 질서 안에서는 노동은 소유를 파괴한다.
224 개개 생산물에 대한 모두의 참여라는 이 논박할 수 없는 엄정한 사실은 모든 개개인의 생산을 공동의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242 독점을 말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정의를 배제한다
249 소유자는 스스로도 자신의 도구에 위해서도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며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으면서 생산물을 취득한다. 따라서 소유자는 기생충이거나 좀도둑이다. 따라서 소유가 권리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면, 소유는 불가능하다.
223 #정의의 질서안에서는 노동은 소유를 파괴한다
소유는 불가능하다
소유는 물리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238 첫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에 대해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262 네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의와 불의의 관념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 그리고 통치와 권리의 원리에 대한 규정
소유는 불가능하다.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유를 혐오하면서도 그것을 원한다. 우리의 사고는 평등에 매달렸으나 그것을 실현할 줄을 모른다.
공유제는 불평등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유가 불평들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그러하다. 소유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착취이다. 그러나 공유제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착취이다.(소유의 다른 한 종류일뿐!)
공유제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능력의 자유로운 행사에, 우리의 가장 고결한 성향에, 우리의 가장 내밀한 감정에 어긋나는 것이다.
공유제는 의식의 자율성과 평등을 침해한다.
제3의 사회 형태의 결정-결론
따라서 소유를 토대로 하는 어떤 통치도, 어떤 공적 경제도, 어떤 행정도 가능하지 않다.
획일성을 규범으로 삼고 평준화를 평등으로 여기는 공유제는 전제적이 되고 또 부당하게 된다. 반면에 소유는 그 전제와 침해에 의해 곧 압제적이고 비사회적으로 변한다.
공유제와 고유는 선을 원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가 각각 낳는 것은 악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 두 가지가 서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며 제각기 사회의 두 요소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공유제는 독립성과 비례균형을 무시하는 반면, 소유는 평등과 법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평등, 법, 독립성, 비례균형이라는 이 네 가지 원리에 토대를 둔 사회를 머릿속에 그려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게 된다.

408 공유제와 소유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이 제3의 사회 형태를 우리는 ‘자유’라고 부를 것이다.
자유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서 우리는 공유제와 소유를 무차별적으로 결합시키지는 않는다.
자유란 권리와 의무를 균형잡는 일이다.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균형을 잡는 것, 즉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수준에 놓는 것이다.

409 자유는 평등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사회 상태 안에서만 존재하는데 평등을 넘어서서는 사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아나키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의지의 통치를 용납하지 않으며 단지 법의 권위, 즉 필연의 권위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무한한 다양성이다.
자유는 비례균형이다
자유는 경쟁을 장려하며 그것을 파괴하지 않는다. 사회적 평등 속에서 경쟁은 대등한 조건들 아래서 이루어져야 할 따름이다. 포상은 경쟁 그 자체에 주어질 뿐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조직화의 원리이다.
413 이것으로 나는 내 스스로 제안했던 일을 끝마쳤다. 소유는 타도 되었다. 소유는 다시 회복되지 못하리라.
소유는 사회의 자살이다. 점유는 권리와 양립할 수 있으나 소유는 권리와 대립한다. 점유를 보존하고 소유를 제거하자. 이와같은 원리의 변경에 의해서만 당신은 법률, 정부, 경제, 제도 들에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 땅에서 악을 내몰 수 있을 것이다.

415 정치학은 자유의 과학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통치는 어떤 이름으로 장식하더라도 압제일 뿐이다.
사회의 가장 완벽한 모습은 질서와 아나키의 결합에서 발견된다.
비록 프루동이 추구한 자유의 왕국이 영원히 도달하기 힘든 이상향으로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이미 150여 년 전에 그가 세상에 던진 문제는 21세기에 접어든 현 사회가 풀어야 할 당면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