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p302
존경받고 사랑방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과거도 착취당한다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모자 쓴 사람은 누구인가
웃기는 답안지.
“이 그림에서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 요구하는 답은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으로 “이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 그러나 아이는 매우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모자 쓴 사람의 이름을 알겠어요?”
이렇게 반문하는 아이의 생각은 질문자들의 요구 수준을 훨신 넘어선 것이지만, 방문교사는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높이 평가하려하지 않는다…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소금과 죽음
가장 좋은 천일염은 맨흙에서 얻어내는 ‘토판염’이지만, 소금에 흙빛이 남아 있어 시장에서 팔리지 않았다.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 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고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
용산 참사, 『이것은 사람의 말』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이 높고 활달한 감수성의 인간들이 용산에서 그 열정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진한 슬픔과 가장 깊은 상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과 상처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자신의 슬픔이고 상처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오는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 아파트들의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영어 강의도 사회문제다
먼저 염려해야 할 것은 학문 활동과 우리말의 관계다. 누구나 알다시피 인간의 지식과 생각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결국은 말로 정리되고, 말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말은 정리와 전달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생각과 지식을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발판이기도 하기에, 결국 지식과 생각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생각이 발전하고 지식이 쌓이면 말도 발전한다.
#기억과 장소
모든 시간은 같은 시간은 아니며, 모든 땅은 같은 땅은 아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같은 길이로 쪼개서 달력을 만들지만 어떤 날은 다른 날과 다르고 어떤 시간은 다른 시간과 다르다.
개발? 땅이 그 기억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사람이 이 땅에서 반만년을 살았다 한들, 한 사람이 이 땅에서 백년을 산다 한들, 단 한순간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이제는 다른 세상 사람이 된 소설가 홍성원 선생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선생은 개항 무렵의 강상들에 관한 소설을 쓰려고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강나루를 답사한 적이 있다. 마지막 강상들과 함께 일했던 사공들이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그러나 사공들에게서 기대하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강에 댐을 쌓고 하안 공사를 하고 난 후 나루터가 없어지고 나지 거기서 일하던 기억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늙은 사공들은 대답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던가. 선생은 대답 대신 한탄을 들었다.
#체벌 없는 교실
우리가 오랫동안 ‘우리는 안 돼’라는 식의 패배주의를 안고 살아온 것은 사실이다.
체벌 없는 교실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체벌에 의지하는 교육을 문제삼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난폭한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야 할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학생들에게 언제까지나 폭력은 폭력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다거나, 맞지 않고서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남들이 벌써 하는 일을 우리만 불가능하다고 처음부터 패배주의에 젖어 있을 이유는 없다. 우리 사회의 지성을 총동원하여 체벌 없는 교실을 상상해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두 국사 선생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 나라의 역사가 어떤 역사이건 이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때에도 할 수 있었다.
#「고향의 봄」 앞에서
베트남 작가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들이 승리한 전쟁인데 새삼스럽게 사과는 무슨 사과냐고 묻는 듯한 기색이었다…분단된 민족이 우애를 되찾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더욱 높게 받들어져, 사회의 민주적 토대가 굳건해지면, 어떤 나쁜 기억도 우리를 뒤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우리가 벌써 튼튼하다면 과거의 상처가 우리를 어찌 얽매겠는가. 숙제는 우리 앞에 있다.
#김기덕 감독의 한
우리 시대의 한 사람이 저 자신의 야만성을 끄집어내어 우리가 눈감은 채 떠받들고 있는 이 삶의 밑바닥을 휘저어 고발하려 하는데, 그 처절한 분투를 모른 체하며 최소한의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범죄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잔인함이 아니라 그것을 생각해내고 설득력 있는 영상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상상력의 튼튼함일 것이다.
#맥락과 폭력
맥락을 따진다는 것은 사람과 그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맥락 뒤에는 또다른 맥락이 있다. 이렇듯 삶의 깊이가 거기에 있기에 맥락을 따지는 일은 쉽지 않다.
#폭력에 대한 관심
…고속도로를 160킬로미터로 달리는 것도 폭력이고,…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는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교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낙원의 악마
공부하는 일에서 독창적인 사고는 어떤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갈 때에 자주 얻어지며, 그렇게 얻어진 사고는 이전의 사고체계와 크게건 작게건 단절된다. 천동설의 세상에 지동설은 거대한 사고의 단절을 불러온다…그런데 이런 사고가 한 사람을 사회에서 단절시키기도 한다.
대학에는 가끔 학교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신의 학문 세계와 일치하지 않을 때 견디지 못하는 교수들이 있다…그런 교수와 학교 생활을 같이하며 학과를 같이 운영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도 성찰하지 않는 관행이 그렇게도 많고, 좋은 것이 좋다는 것이 어디에나 통하는 진리여서 좋은 것이 너무나 많은 이 사회에서 좋다는 것을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교수는 낙원의 악마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시대의 비천함
CEO 총장. 교육도 학문도 경제적 뒷바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 학교 경영을 잘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경영이 교육과 학문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이루어 지지 않고, 거꾸로 교육과 학문이 학교 경영을 위한 수단이 될 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학교 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기초 학문 분야의 학과들을 폐지하고 있는 대학들…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저술 활동은 그만두고 학교 평가에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논문을 양산하라고 교수들을 다그치는 대학도 벌써 여럿이다.
#전원일기
봄날의 농촌 풍경이고, 흔한 풍경이다. 그러나 사진이 주는 고통과 충격은 가볍지 않다…무엇보다 이런 풍경 사진에서 기대했던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처럼 아마추어 축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의 손에 누가 카메라를 쥐여주었다면 애써 피하려 했을 것들로만 사진은 가득 차 있다.
서정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구본창의 시선은 새롭고 용감하다. 구본창의 사실주의는 용감하고 잔인하다. 사실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늘 잔인하다. 사실은 눈에 익을 때까지, 그래서 새로운 시선이 얻어질 때까지 잔인하다.
#겨울의 개
사진. 강운구
#당신의 사소한 사정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
사소하다는 것은 세상의 큰 목소리들과 엄밀한 이론체계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감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 때문에 독창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늘 실패한다? 우리가 배웠던 것, 세상의 큰 목소리들이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들과 우리의 사소한 경험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엇나갈 때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 큰 목소리들 앞에서는 항상 ‘당신의 사정’이다…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의 순간마다 변화한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안고 있는 이 사소한 당신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있다…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설날
섣달이 둘이라도 시원치 않다는 말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신정에 차례를 지내게 하자, 어느 날을 설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정황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고향의 잣대
고향. 내 삶의 모든 표준이 여전히 그 섬에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섬으로 세상을 잰다.
아직까지 나에게 삶의 준거가 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내 나름으로는 고향의 잣대라고 부른다.
나름 출중했던 관리들…그러나 일본 측에서 “구미 제국의 예를 볼작시면”이라는 한마디만 내뱉으면, 우리 관리들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주눅이 들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사용하던 잣대가 달라지니 사태를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