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지식 새로운 지혜.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이(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옛것을 찾아 새로운 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됨직하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책을 읽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책은 그대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앞에 놓여진 고정된 사물로서의 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은 변할 수 있습니다. 책 속의 몇몇 문구가 마음속에 남아있다가 언제고 우리 삶에 싹터오를지 모릅니다. 아주 크게는 인생관이 바뀔 수도 있도 생활습관이나 태도에 변화가 올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이 쓰이게 된 과정은 바로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자녀를 출가시킨 어머니, 직장인, 대학생까지…우선 이렇게 다양한 세대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모아줄 수 있는 책은 고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은 우리 모두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공동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신의 삶의 주인이고자 하는 진지함과 성실함, 고전 텍스트에 대한 존중감 등의 태도를 갖추기만 하면, 학식의 깊이와 분야에 관계없이 누구나 고전으로부터 오늘날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 그것이 인간 자신과 그의 삶의 근본을 파고든 텍스트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세계를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고자 해야 합니다.
문학은 인간의 정서. 이러한 정서를 갖추지 못한다면 인간다운 삶의 기초를 마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세계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러한 기억과 기록을 역사.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에 대한 객관적 통찰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철학적 통찰로 불리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정서적 인간, 역사적 인간, 보편적 인간이라는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전은 통합적 사유를 요구하는 텍스트. 시대의 맥락도 함께 살펴보아야 하고 더 나아가 그 텍스트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도 궁리해보아야 합니다.
고전을 읽는 것은 고전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전은 입이 무거운 스승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캐묻지 않으면 속뜻을 쉽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고전 100권’ 같은 게 유행이긴 한데 그냥 요약본으로 이야기 줄거리만 읽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
‘음미’라는 행위는 아예 없습니다. 요즘과 같이 날마나 발전하는 세상에서 고리타분하게 이런 구절이나 외우고 있는 건 한심하다 여길 사람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느긋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실용이 중요하고 격식은 낡아빠진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전을 읽는 우리는 그 실용과 정반대 자리에서 있습니다. 고전이 가진 격식과 위력 앞에서 겸손한 태도로 그것을 암송해 보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저는 큰소리로 읽고 외우는 것이 없어진 공부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정지상의 한시 『송인』. 몇 개 되지 않는 단어들을 통해서 계절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심정까지 내보이는 것, 이것이 시를 쓰는 작법이라 하겠습니다.
고시 공부.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이것이 최고의 공부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악착같이 기를 쓰고 남과 경쟁하여 남을 밟고 올라서 자기 바깥에 있는 뭔가를 쟁취하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고시 공부를 하고 나면 피폐해진 인간성만 남아 있습니다. 진짜 공부는 정답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 한없이 궁리하는 것, 즉 내 앞에 있는 대상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터득하려면 이런 한시를 읽는 것은 좋은 출발점일 겁니다.
고전은 당대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거듭 말하지만 어떤 시대와 인간을 철저하게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 고전인 것입니다.
그 시대 속으로 들어가서 읽어야 합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이 책을 지탱하는, 이것을 빼면 책 전체 구조가 무너질 것 같은 핵심 문장을 딱 하나만 뽑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현재 사회에서 민주주의 국가는 형식을 빌린 아주 유력한 몇몇 사람들의 과두 지배에 불과합니다. 먹고사느라 바쁜 사람, 여유 시간이 없는 사람, 극단적으로 말해서 돈 없는 사람은 애초부터 공직에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다 공평하게 공직을 맡을 수 있다.” 이것이 고대 아테나이 사람들이 생각한 민주주의입니다.
추첨을 통해 관직을 맡으므로 돈이 필요 없습니다.
재판관도 추첨을 통해서 뽑았으므로 오늘날과 같은 사법고시가 없었습니다…시민이라면 누구나 제비뽑기를 통해서 관직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위정자의 권세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이라해서 먼 옛날보다 더 발전된 세상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비극 작품들은 혼자 자신의 방안에 앉아서 고독한 작업의 산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훨씬 나중에야 일어납니다. ‘고독한 예술가’라는 이미지는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생겨난 개념입니다. 예전에는 모든 예술이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만들어졌습니다.(예술이란 ‘씨앗을 뿌리고 길을 낸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일하며 논다, 배운다』)
비극은 서사시보다 더욱 더 ‘사건의 한가운데로’ 밀고 들어간 장르. 쓸데없는 얘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정치가 후진 나라는 그 나라의 시민들도 후진적입니다. 문화도 어설픕니다. 정치인들의 모습과 정치의 상황은 일반 시민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원숙한 경지에 이른 정치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인간 세상의 미묘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원숙한 절정기에 이른 고전예술도 잠깐 흥했다가 곧바로 집니다. 이렇게 짧은 것이 원숙함의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_훌륭한 시민의 조건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 앎과 삶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을 길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 봅니다. 알아도 습관이 들지 않으면 행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혹독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 그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마음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치는 ‘소란스러운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면서 말을 많이 하게 되므로 당연히 시끄럽습니다. 반대편의 주장을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합니다. 다수결이라고 해서 무조건 소수 집단을 억누르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터져나오기 마련입니다. 이 시끄러움을 참을 수 없으면 독재자를 떠받들든지 비민주적인 국가로 이민을 가면 됩니다. 그런 곳은 조용합니다.
#군주론_지극히 현실적인 것의 발견
#거대한 전환_현대 세계의 파탄과 혼돈의 시기
칼 폴라니는 20세기 말과 21세기를 온전히 살아낸 사람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거대한 시간을 살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근대국가를 이끌어가는 두 가지 힘은 자본과 폭력인 셈.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있었던 대영제국만 자유무역을 고수. 선도 국가가 되려면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어야 합니다. 군사력은 폭력입니다…경제사를 보면 경기침체는 1873년부터 1896년까지 약 20년간. 그럼에도 전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선도 국가였던 대영제국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기 때문. 그 많은 돈을 어디서…바로 중국과의 아편무역을 통해서 벌었습니다…어찌보면 그 당시 전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은 중국인들이 유지시켜준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 세계가 하나로 묶여서 움직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세계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의미입니다.
식민지 쟁취하고 물건을 팔면 돈이 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해외 식민지 쟁탈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조.
폴라니는 세계대전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도대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백년의 평화’. 폴라니의 통찰 중 하나. 보수반동 체제가 출발하면서 유럽의 평화가. 전쟁이 발생하지 않으니까 이때부터 자본가들은 마음 놓고 돈을 벌 수 있게. 자본가 계급은 이처럼 이념에 전혀 민감하지 않습니다…불안에 떨지 않고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수반동 체제와 폭력조직은 유사한 점이 많다. 보수반동 체제를 통해 폭력적인 세력균형이 작동하자 이러한 평화가 자본가 계급의 영리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로크적인 국가가 현실화. ‘민주주의 입헌’이 아니라 ‘자유주의 입헌’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유재산권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것을 헌법에 명시했다는 것은 개인의 사적 이익을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는 국가가 성립했다는 것입니다….국내 경제 부분에서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성립. 폴라니의 말에 따르면 ‘자기조정 시장’이 등장한 것. 토지, 노동, 화폐를 상풍화한 후 이것들을 시장가격에 따라 결정하는 경제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입니다…그런데 이것들을 상품화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사람들은 그 위에 경제 시스템을 구축. 그러니 시스템이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상품화한다는 것은, 특정한 생산과정에 따라 생산이 가능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인간, 토지, 화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토지, 노동, 화폐를 상품화할 수 있다는 집단최면에 걸리면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시장에서 조정이 안 되면 국가가 나서야 하는데 그 당시에는 이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폴라니는 이러한 환상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경제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동체의 차원에서, 인간의 본질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기계에 의한 생산이 산업사회에서 일어나게 되면 현실에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적·자연적 내용물들이 상품의 형상을 뒤집어쓰게 된다. 이는 실로 엄청난 변화이다.
폴라니는 인간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을 촉구합니다.
아무리 시장이 발달한다 해도 마지막까지 시장화되지 않는 관계가 있습니다. 가족관계, 전통적인 공동체, 무형문화재 등. 학문 역시 시장화되면 안 되는 영역. 오로지 이익만을 위해 활동하게 되면 결국 자기 영혼이 무너지고 병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자기조정 시장이 들어서면서 이런 것들이 완전히 무너져버립니다. 개인의 사유재산권을출발점으로 삼고 자기조정 시장을 관철하려는 국가, 즉 자유주의 입헌국가의 병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몸값’이라는 말을 씁니다.
근대사회에서는 인간을 상품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시장에 넣은 결과 노동력을 사고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계제 생산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분명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면 그 원인을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어렵다는 얘기만 합니다. 그저 누군가가 나타나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줄 것만을 기대합니다. 지금 지구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식량이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상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거래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시장이 없으면 사람들은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상태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장이 실질적인 필수품을 거래하는 공간을 넘어서 허구적 상품까지도 거래하는 곳으로 바뀌거나 이윤만으로 움직이는 곳이 된다면 그것은 더이상 시장이 아니라 일종의 아귀다툼의 소굴 같은 것이 됩니다.
‘인문학은 시장에서 경쟁이 안 되니까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러므로 인문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늘려야 한다…’ 가만히 따져보면 돈이 없어서 위기가 왔다는 이야기. 원인은 시장경제이고 처방은 국가 지원이라는 것. 위기에 대한 해법 자체를 돈에서 찾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참으로 인문학적 태도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처방입니다. 그들은 속된 말로 밥그릇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 사회가 지향하는 바 혹은 흐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 못합니다. 인문학은 바로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에서 성립하는 학문입니다.(정화조 용량 부족은 용량이 아니라 생태적 삶의 부재가 원인)
#논어_역사에게 묻는 인간
현대 중국인들도 『논어』를 읽으려면 따로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묘사된 공자. 시작은 야합인데 끝은 성인의 극치. 참으로 굉장한 대조법. 공자를 숭앙했던 조선의 잘난 선비들은 가문을 무척이나 따졌습니다. 요즘 뼈대있는 집안 출신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은 야합에서 태어난 공자가 어떤 귀결에 이르렀는지를 한번쯤 새겨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플라톤은 올바름을 ‘각자가 각자의 일을 행하는 것’으로 정의. 이것이 공자에서는 ‘분(分)’에 해당.
문행충신. 사람꼴을 갖추고 살려면 문,행,충은 기본.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이 셋 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고전 텍스트를 읽지 않습니다. 정치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돈만 생각합니다. 언어를 갈고 닦아 쓰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6년을 배워도 ‘문행충신’을 기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역사를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항상 두려움을 느낍니다. 남의 이목이 두렵습니다. 매사가 조심스럽습니다. 반면 신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기준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인간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사심을 이겨내고 예로 돌아간다
유가는 세상으로 들어가지만 불가는 세상을 떠납니다.
꼭 사람을 죽여야만 살육이 아닙니다. 삶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은 모두 다 살육입니다.
농사지으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도시로 가서 살라고 하는 것도 살육입니다. 이렇게 잔인한 시대에 공자는 올바른 정치를 말합니다.
실존주의자들에게는 전통이 무의미합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와 대극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좌파가 아니라 실존주의자들입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정의에 민감하고 이익에는 둔감하라.
처음에는 겸허한 태도로 출발해서 마지막에는 말한 대로 완성한다. 이것을 할 수 있다면 군자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설명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인자다.
군자는 앎과 삶을 일치시킨 사람. 지식인은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 탐욕, 감각적인 것 등을 끊어야 합니다. 군자, 지식인이 이익을 탐하면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닙니다.
리(利)에 밝은 사람은 자신이 얻게 될 이득에 푹 빠진 나머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기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익에 완전히 몰두해 있습니다. 자나깨나 돈 생각만 해야 돈을 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합니다.
“아버지,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가 한 말 중에서 인간에 대한 가장 경멸이 담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속된 말로 ‘돈독’을 빼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습니다. 지식인은 극기복례를 해야 합니다. 고전을 읽는 우리는 모두 지식인입니다…올바름, 공정함, 정당한 이치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항상 스스로를 경계해야 합니다. 인맥을 자랑하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오직 의(義)가 맞는 사람과만 함께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내가 지식인’이라는 자각을 가질 때 극기복례가 시작됩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랴.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이(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옛것을 찾아 새로운 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됨직하니라
배우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어둡고, 생각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로우니라.
고전 읽는 법. 날마다 읽고 그 뜻을 새겨보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삶이 지탱되고 있는 한 우리는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되고 무엇보다도 고전읽기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인간답고 나답게 공들여 사는 길이라는 것,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내놓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