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 모심과 살림 연구소. p296
한살림 20년의 발자취
이십 년 전, 서울 제기동의 작은 쌀가게에서 한살림은 쌀과 계란을 가지고 세상에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1987년 6월항쟁…이 격변이 시기에 서울 한 귀퉁이에서 태어난 작은 쌀집은 그다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그곳에 진열된 물품들도 새로울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뜻과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 소박하기 짝이 없는 물품들에는 시장의 여느 상품들과 달리, 무겁고도 깊은 성찰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살림은 또,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권위주의(독재) 정부를 타도하고 절차의 합리성을 갖춘 세상이 온다고 해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한없는 소비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맹목으로 질주하는 삶을 근원적으로 돌아보지 않고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위의 몰이해와 냉대 속에서도 묵묵히 갈퀴손이 되도록 생명이 살아있는 옹사를 고집하는 농민들, 이들의 진정을 이해하고 존경하는 소비자들이 얼굴을 마주하며 먹을거리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한살림 형동 조직의 틀 안에는 주인이 따로 있고 임금을 받고 노동을 파는 일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살림은 어쩔 수 없이 시장 안에 있지만 시장의 질서를 넘어서려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살림은 여전히 서툴고 미숙합니다. 그 부족함 때문에, 무한한 선의를 품고 몰려든 농민들과 도시 소비자 그리고 한살림의 사회적 역할을 기대했던 이웃들에게 실망을 준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1부-한살림, 시대의 문을 열다
1986년 12월 4일, 청량리 제기역 부근, ‘한살림농산’ 간팡을 단 쌀가게가 처음 문을 열었다…여느 쌀가게와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쌀가게의 개업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 조금 특이했다. 재야운동가와 서예가로 알려진 장일순, 해직교수 리영희, 노동운동가 김규벽, 카톨릭농민회 사무국장 이길재 등 당시 민주화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 작은 쌀가게의 개업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서 환한 얼굴로 덕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쌀이나 계란? 그러나 이들 물품의 생산과정은 전혀 달랐다. 최재명,최재영 형제가 생산한 충북 음성 성미마을 무농약재배 쌀과 강원도 횡성 공근마을의 유정란.
겉보기에 전혀 다를 바 없는 계란과 쌀의 이력이 여느 것들과 달랐던 것처럼 쌀가게를 차린 박재일(한살림 회장)의 속내도 여느 쌀장사들과는 전혀 달랐다. 눈에 보기 좋은 것만 찾는 세태에도 아랑곳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가치를 간직한 채 사람들에게 다가서겠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장사의 기본조차 모르는 무모한 시도하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점을 알려려면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그 다른 점을 설명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여기에 한살림의 독특함이 있었다.
한살림운동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쌀을 매개로 말을 걸고, 계란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식이었다.
“오늘의 세상은 너무나 많은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고 써버립니다. 많고 높고 빠르면 좋고, 편리하면 더욱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좋은 듯 보이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안심하고 믿고 도우며 건강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게 하고 있는지요?”-『한살림을 시작하면서』
시대의 변화 속에서
곱지 않은 시선? 중대한 시국에 한가하게 농약 타령이나 할 수 있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그러나 우리 사회를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당장에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좀더 긴 안목으로 큰 틀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보편화 대중소비사회로…하지만 풍요와 편이의 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희생, 농업과 마을공동체의 해체 그리고 대규모 생태계가 숨어 있었다. 좀더 근원적으로 보면 절제 없는 인간의 욕망과 물신화된 산업사회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한살림? 구체적인 물품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하여 땅을 살리고 더불어 사는 삶을 구현해보자는 것이었다. 아직 환경운동도 초보적인 시절에, 대량생산과 낭비적 소비에 대한 문제제기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위기를 극복할 구체적인 대안까지 내놓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그만큼 몇 걸음 앞선 시대적 통찰이기에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쉽지 않았다.
쌀집풍경?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쌀가게 운영은 여간 힘겹지 않았다…인건비와 기름값을 따지면 밑지는 장사일 수밖에 없었다. 심하게 말하면 미친 짓이었다(‘미친’ 세상을 바꾸는 ‘미친’ 사람들!)
모든 것을 열정 하나로, 오직 몸으로 때우던 시절이었다.
“자본과 기술이 아닌 몸과 시간과 경험과 마음으로 일을 풀어가야 했던 한살림의 원시적 축적기”
생명이란 시대정신과 협동이란 가치의 만남
다섯 가구 이상 공동체에만 공급? 효과는 대단했다…그런 불편을 즐겁게 감수하고 오히려 스스로 나서서 이웃들에게 한살림을 알리는 열성 주부들이 곳곳에서 생겨났다…가정에 박혀 있던 주부들이 세상으로 나오는 통로 역할을 했다(협동조합은 주부들의 힘? 아이쿱)
생산과 유통, 소비 그리고 분해(폐기)라는 전일적 물질순환을 강조
생산자와 소비자가 신뢰를 바탕으로 연대하는 직거래 방식의 무점포 조합을 정착시킴으로써 유통구조를 개선하고 새로운 공동체 시장을 실험하는 한살림 초창기 조직의 틀이 비로소 완성된다.
한살림은 한두 사람의 구상에 따라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축적된 역사적 결과물이었다…그 직접적인 뿌리는 원주의 지역사회개발운동과 카톨릭농민회운동에 있었다.
생명과 공동체에 대한 각성으로
공동체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화학농법에 의문을 품었던 문제의식과 만나 전농이 결성되던 1980년대 후반, 카톨릭농민회운동을 ‘생명공동체운동’으로 확장시키게 된 것이다.
도농직거래. 생산자와 소비자의 얼굴을 보이는 유통을 통해 기존 화학영농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기농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진행되는 직거래는 품이 너무 많이 들고 농민들의 삶에 안정을 가져다주지도 못했다. 결국 농산물 직거래를 일상적으로 안정되게 진행할 수 없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싹트고 이를 담당할 조직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1985년 원주소비자협동조합(현재 한살림원주생협)이 생기고, 한 해 뒤에는 ‘한살림’이란 이름을 내건 새로운 사회운동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2부-살림의 길
한살림 가입자들은 어딘가 유별난 사람들이었다. 물품을 공급받으려면 다섯 가구 이상 이웃들과 공동체 조직해야 했지만 이들은 그 모든 불편을 감수했다(즐거운 불편)
‘공부하는 어머니는 생명을 키우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주제를 내걸었다. 매월 정기강좌가 진행.
특히 생산자와 진행하는 간담회나 생산지 견학, 일손돕기는 한살림의 가장 중요한 공부가 되었다…공부를 진행하면서 회원들의 의식이 성장하고 이는 곧 생활 속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한살림은 잃어버린 ‘이웃’을 되찾는 일이며 붕괴된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는 생활협동운동이 되었다.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물품 부족? ‘계획 생산’과 ‘책임 소비’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뿐만 아니라 조합원들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다영한 학습모임들이 꾸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혜석 주부의 한살림 일기
주부들은 밥상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갔다. ‘밥 한 그릇 속에 우주가 들어 있었다.’ 한 그릇 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햇빛, 공기, 물, 흙. 벌레, 농민의 땀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부엌에서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살림은 이제 더 이상 집안일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병들어가는 세상, 죽어가는 지구와 뭇 생명을 살리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한살림 조합원들은 서서히 사회를 생각하는 주부, 세상 살림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콩세알의 의미
한살림운동은 유기농업을 통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협동적 삶이 가능한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유기농업을 통해서는 절대 부유해질 수 없다. 물욕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농사를 지었는지…생산자들이 마음을 담아 보내는 편지는 도시 소비자들을 감동시켰다.
당진의 정광영. 그가 삼십 년 가까이 정성스레 기록해 온 영농일지는 한살림이 매년 쌀 수매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자료가 되었다.
유기농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올곧은 신념 하나로 살아온 이들은 주위의 몰이해 때문에 외로운 시간을 견뎌왔다. 그런데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교류와 연대
사실 자본주의 시장 체계 아래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대립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동기만으로 만나는시장에서 생산자는 좀더 높은 가격으로..소비자는 좀더 싼 가격에…그런데 한살림안에서라면 이 관계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생명의 사슬로 연결된 생태계처럼 서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단순한 모습의 쌀가게가 알고 보면 농촌과 도시의 뿌리를 잇기 위한 목적을 가진 운동체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농사도 너무 욕심을 내면 정작 먹을 게 없게 됩니다.”
쌀값결정회의? 칼 폴라니의 ‘위대한 전환’을 만드는 자리이기도 한 셈이다
“…‘한살림모임’은 앞으로 생명의 세계관을 확립하고 이에 입각한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를 위한 대중적 협동운동을 구체적이고도 광범위하게 펼쳐 나갈 것입니다…”-한살림선언
생활실천운동, 생명문화운동은 한살림을 밀고 온 두 개의 수레바퀴였다
..우주적 존재로서 인간을 복권시키고 사회운동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 ‘밥’을 매개로 생활협동운동을 전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구체적인 생활, 삶의 문제를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바꾸어나가는 운동방식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원주소비자협동조합. 농약공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약재배를 통한 농산물 직거래를 중심사업으로 하고 있는 점이 특별했다..하지만 원주는 서울과 달리 지금도 인구 30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정착시키는 일은 무척 힘겨웠다.
유통근대화? 공동구입 직거래의 잇점이 없어지게 되자 이러한 소비조합들은 전부 소멸해 버린다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시장을 극복한 대한을 찾으면서 한편에서는 시장 속에 자리 잡아야 하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전후나 지금이나 농산물 가공은 농업 살림의 중요한 화두다. 농산물 가공은 과잉생산이나 품질 저하 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편이 되고 농가의 소득을 높이고 마을 단위 순환농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환경오염을 초래하는 가공상품의 포장지는?)
산지가공은 한살림이 지역농업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지향이 되었다.
협동농장 실패, 흙공동체의 좌절
우렁이 농법의 최재명 부부. 농사지을 땅을 공동으로 내놓고 함께 일하고 함께 출하하여 소득을 나누는 방식. 이런 일들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한살림생산자협의회의 해체? 도농공동체라는 이상을 향해 깃발을 올리고 출발한 한살림으로서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셈이다. 막상 이해가 충돌하고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것을 푸는 방식에 대해서는 준비와 훈련이 전혀 없었다. 누구의 잘잘못이라기보다는 미숙한 신생조직이 호된 비용을 치르고 겪은 통과의례와 성장통이었다.
이 과저을 겪고 나서야 사람들은 열정과 의욕만으로는 조직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3부-현실에 뿌리 내리기
조직이 진통을 겪는 동안에도 여전히 농민들은 땀흘려 유기농산물을 생산했고 이것은 조합원들에게 공급되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생명의 원천이 되었다.
한살림은 농업을 되살리는 일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농업과 농촌에 대한 감수성을 되찾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농촌·농민과 함께 하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흙과 농업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일을 실천하고자 있었던 것이다. 흙에 대한 감수성을 곧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기도 했다.
지역모임과 물살림 그리고 자주관리 매장
비누운동, 물살림으로
공동체의 둔화와 매장의 성장
대형할인 매장은 대중 소비문화를 자극하고 더 편리한 구매방식에 대한 욕구를 팽창시켰다
공동체 방식이 ‘불편’하다는 반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매장개설은 꾸준히 이어진다. 편리를 좇는 시대의 대세에 한살림운동이 무릎 꿇는 것이 아니냐는 내부적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매장관리와 지역 주부 활동가. 대대분 미혼이었던 실무자들보다 오히려 주부들인 지연 회원들이 더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기농산물 직거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크게 세 가기 흐름, 즉 정보와 물품과 돈의 흐름이 작용한다
이전까지는 알음알음으로 한살림운동의 지향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소개받아 채용해 왔으나 인력 수요가 늘어나면서는 이를 충당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조합원 역시)
#4부-직거래의 생산자와 소비자
‘책임생산, 책임소비’
원칙론과 현실론은 늘 부딪쳤다. 대개 논쟁은 이러한 원칙을 확인하는 식으로 정리되곤 했다. 소비자 회원들의 당해진 욕구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은 기울이되 이는 어디까지나 한살림 원칙에 맞는 우리 농업이 굳건히 유지되고 농민들이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게 어떻게 후원할 수 있는가를 고려하는 한도 내에서 모색한다는 원칙이었다.
농업 살림의 구상과 실천
‘쌀 선수금제’.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한살림 물품정책
가격은 농업 재생산을 보장하고 안정적인 경영계획을 설계할 수 있는 생산비 보장을 기준으로 생산자가 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5부-사회 속으로, 지역 속으로
성장의 뒤안?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급격한 회원 증가와 공급량 신장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물품이 부족했다. 공산품처럼 급히 기계를 설치하고 생산 라인을 늘릴 수 없는 게 농산물이기 때문에 부득이 한 일이었다(곡류사용 금지 사카린 소주의 합법화!). 유기농 물품의 경우는 특히 그랬다.
늘어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생산 규모도 급격히 늘려야 했다. 이 시기에 대거 참여하게 된 새로운 생산자들은 한살림을 만들고 지켜온 초창기 생산자들과는 가입 동기와 한살림에 대한 이해의 정도도 달랐다(농가 수익이 더 중요)
고동성장 시기에 무엇보다 곤란을 겪은 것은 인력 충원과 리더십의 문제였다
공개채용? 공채를 통해 들어온 실무자들은 초창기 실무자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회원들조차 이 무렵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아 실무자와 회원이 상호작용하면서 한살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일이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정신없이 성장 가도를 달리며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점검하고 한살림이 어디서부터 출발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졌다.
통합과 분화
새로운 지역조직의 결성과 지역 분화. 운동적 구심력의 정비. 생산자모임의 재결성
명태 논쟁? 이런 논의가 중요한 것은, 명태의 공급 여부를 결정하는 것보다는 논의 과정을 통해 한살림 회원, 조합원들이 우리의 왜곡된 사회구조와 생활양식이 초래한 온난화 같은 지구적 혼란을 이해하고 그 혼란의 결과물이 우리의 밥상에 고스란히 올라온다는 것을 느끼는 생명사상에 대한 학습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또 조합원의 의견을 묻고 토론을 거치는 과정 자체도 조직의 민주적 의사결정 측면에서 의미가 컸다.
한살림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이미 다른 단체나 기업을 통해 일반화된 유기농산물 직거래운동만으로는 한살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한살림의 고유한 이념을 실현하기도 어렵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정체성 논의는 한살림에 ‘농업 살림’과 함께 ‘지역 살림’이라는 화두를 등장시켰다.
한살림의 지역농업 실천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농업의 위기가 심화되고 지역사회의 붕괴가 급격히 진행되는 현실을 제어하고, 생명의 근간이며 삶의 뿌리인 농업을 통해 지역을 재생해 살 만한 곳으로 만들면 희망을 싹 틔우는 일이다.
한살림의 궁극의 목적은 산업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과 평화의 문명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
이제 새로운 도약대 위에, 또 동시에 엄청난 위기에 부딪쳐 있다. 한살림식 농업을 지속하기 위해 생산자에게 적정 가격을 보장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급락하는 시장의 농산물 가격을 도외시할 수도 없는 딜레마. 사회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정의 주부들이 일터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 도시지역 한살림운동의 주체로 여겼던 전업주부의 존재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한살림이 새로운 운동방식에 대해 모색해야만 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한살림 안에 한데 어울려 있는 것이 한살림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타성에 길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타인이 짚어주고,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 조성되는 긴장이 창조적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는 것, 즉 다름과 갈등은 달리 생각하면 창조의 원동력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생태계, 그것이 한살림인 것이다.
한살림이 그동안 찾으려고 한 것 바로 삶의 활력, 생명의 기운이었다.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는 거룩한 생명의 힘을 다시 찾고 되살리는 것. 밥을 통해서, 그 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연과의 공생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나눔과 협동을 통해서, 협동의 근거인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통해서 생명의 기운을 용솟음키게 하는 것.
그 생명과 평화의 길, 스무 살 한살림이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뻗어 있는 길이 더욱 멀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