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과 이성. 리영희. p431
어떤 서사序辭
어둠의 시간에 그가 있었다.
아픔의 시간에 그가 있었다.
거짓에 길들여지는 시간에 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간 속에서
그가 있었다가 아니라 그가 있는 것이다.리영희!
…나아가 냉전과 독재의 지정학이 만들어낸 우상을 타파하는 진실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삼아왔다. 그의 정신은 잠들 수 없는 밤에 깨어 있고 한낮에도 자행되는 지상의 숱한 기만들과 맞서 지향의 연대기를 찾아내고자 파도쳤다. 끝내 그는 누구의 사상이었고 누구의 실천이었고 또 누구의 전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전환의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현재는 쉬지 않고 과거를 들어올리고 미래를 불러들이게 된 것이다.
리영희!
그는 한반도의 상공에 날고 있는 각성의 붕鵬이다. 이와 함께 그는 한반도와 한반도를 에워싼 모든 힘의 논리를 이성의 논리로 이겨내는 물질적 정화精華이다.
리영희!
그는 그 자신의 확인이며 모두의 기념이다. 그렇지 않은가.
2006년 여름
고은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뉘어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책의 이름을 일컬어 『우상과 이성』이라 한 이유다.
#광복 32주년의 반성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생각해야 할까. 어쨌든 준엄한 자기성찰을 해야 할 때가 온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들에게는 남과의 관계가 무엇인가 잘못되어갈 때 으레 자기반성은 하려 하지 않고 상대방만을 탓하는 버릇이 있다. 주한 미군의 철수 결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듯 보이는 외국 군대의 철수 문제에 관한 그 숱한 말과 글은 남의 나라 국민, 정부, 지도자들, 국회, 대통령…에 대해서 못마땅하다는 이야기뿐이다. 공식적으로는 조금만 더 있어달라는 것이지만 많은 국민의 심정은 ‘언제까지라도 있어달라’는 것이 숨김없는 사실이다. 국민 일반이나 지식인들이나 심지어 나라의 지도자라는 지위의 사람들까지도, “‘양키 고 홈!’을 부르지 않는 것은 한국(인)뿐이다”를 무슨 자랑거리나 되는 것처럼 내세우는 것 같다. 그런 구호를 부르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진정한 민족적 긍지와 국가적 독립성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하면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이 민족과 국가와 국민의 자질과 덕성을 말하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부정(否定)을 부정(否定)하는 작업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난 민족이 ‘내 나라’를 꾸려나가는 작업은 결코 식민 지배자가 남기고 간 것 위에서의 변장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니었던가. 그 작업은 식민지(상태)의 연장이거나 겉치레의 분장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식민 지배자와 그 제도가 남기고 간 모든 것을 일단 부정하고 그것과 단절하고 그리고 극복하는 작업으로서의 ‘질적 변화’여야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새나라’를 건설하려는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은 거족적 역량을 퍼부어 ‘부정(否定)을 부정(否定)’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 의해서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민족의 모든 것이 부정되었다는 것이고 부정된 상태를 말한다.
연합국의 승리에 크게 힘입어 조선민족의 정치적 노비문서는 찢기었다. 그렇지만 식민제도가 겨레에 강요하기를 35년, 이 민족에 간섭하기 시작한 후 반세기에 걸쳐서 불어넣음으로써 노예적 속성으로 굳어져버린 이 민족사회 내부의 ‘내적 정신’과 ‘내적 근거’는 해방과 건국 후에 거의 그대로 온존되었다….이런 것에 대한 근원적인 수술 없이 오랜 식민지적 노예였던 민족이 진정으로 해방되고 이름과 내용이 다 똑같이 ‘독립’이라 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들은 이 민족의 것이면서도 모두 남의 것, 그것도 이 민족을 부정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한 노예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이라는 인간이 자기를 물건이나 동물로 만들어버린 그 모든 물적·정신적·문화적 조건을 일단은 깡그리 부정해야 한다. 즉 번신이 아니면 적어도 재생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노예가 인간이 되는 변증법적 논리이다. 민족도 마찬가지로 ‘부정을 부정’함으로써만 비로소 자주적 민족, 독립적 국가일 수 있다.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는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족정기를 바로잡을 숭고한 역사적 사명을 위해서 태어났던 반민특위와 법률은 한 사람의 매국노도 친일분자도 처단하지 못한 채 거꾸로 그들과 그들에 업힌 세력에 의해서 사실상 6개월 만에 맥없이 매장당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자기 나라를 세우려는 바로 첫 해에 한 일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떤 자들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런 자들이 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두 궁금한 일이다. 반민족적 독소들을 민족정기의 칼날로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그런 개인과 그런 개인의 집합체인 세력이 일제와의 공모로 소유했거나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그 힘의 기둥인 물질적 토대를 빼앗았어야 할 것이다. 그와 병행해서 그들의 힘의 또 하나의 지렛대인 정치·법률·사회·문화적 제반 제도가 근본적으로 혁파되었어야 한다. 그 작업은 혁명적이거나 적어도 혁명에 가까운 근본적인 개혁이 아닐 수 없다.
해리만의 예언
“그러니까 베트남의 대중이 어느 쪽을 더 존경하고 믿을 것이냐는 문제와, 어느 쪽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베트남인과 민족을 위해서 일할 것인가는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는 뜻의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는 베트남전쟁을 ‘지는 전쟁’이라고 예언했다.해리만의 이 예언은 그로부터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무서울 만큼 정확히 현실화됐다. 어떤 형식으로건 사회혁명을 하려는 사회와 그것을 거부하는 사회의 본질적 측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로서 중요시해야 할 점은 따로 있다. 일본의 공업화·근대화 작업의 이념과 내용이 서양의 그 과정과 내용의 모방이었던 탓에, 서양인은 일본의 경제·생산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문화·정신적으로 일본에 대해서 인간적·문화적 우월감을 갖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언제까지나 일본(인)은 서구(인)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게 마련이다.
이 관계는 지난 10여 년과 현재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우라가 국가목표로 추구하는 이른바 ‘조국 근대화’의 모든 작업이 일본 경제의 모방이고 하청작업이라면 이 민족과 국민이 앞으로 일본을 대등하고 독립적인 자격으로 대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진다.
이것은 일본(인)이 중국(인)을 대하는 태도와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의 현저한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국토·인구의 크기에 기인한 것만도 아니다…그것은 주로 현재의 중국이 추진하는 공업화·사회발전·경제발전이, 후진적 위치에서 시작했으면서도 서양의 모방이 아니고 더구나 서양을 모방한 일본의 모방인 아닌, 어디까지나 중국 독자적인 이념·내용·방법 때문이다.
오늘의 결과는 지난 32년의 해방 후 역사에서 청산할 것을 청산하지 않고 지나온 그 잘못된 내적 근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민족적·국가적 그리고 국민적 자세를 엄청난 것으로 바로잡을 때, 비로소 가깝게는 우리 자신의 내일과 길게는 우리의 후손들이 남의 모욕과 열등감에서 진정 해방될 것으로 믿는다. 그 방법은 식민지주의와 제도가 우리를 부정했던 그 부정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우리의 의지로 내부적으로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1977
#0.17평의 삶, 7달러의 인생
동대문 밖 창신동의 판자촌 화재가 있었다고 한다…신문을 다시 접아 잡고 읽어보니 129호가 잿더미로…그 많은 집이 타서 재만 남은 땅은 240평? 화마에 쫓겨난 이재민은 모두 347세대? 물적 피해액 300만원? 야릇한 관심이 명하는 대로 계산을 해보니..한 사람당 평균 0.17평!
이것이 한 도시, 한 사회, 한 나라에 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또 불리는 인생들이란 말이다. 7달러의 전 재산을 잃은 한 ‘국민’ 350세대는 동짓달 한파 속 어딘가에서 떨고 있어야 한다. 가슴 속에 솟아나는 분노를 달래기 위해 나는 신문을 내려놓고 라디오 스위치를 켰다. 조용한 음악이나 들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바라는 음악은 없고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무슨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국 근대화와 경제부흥의 이 영광된 시대를 사는 행복과 기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라디오의 스위치를 끄고 괴로운 잠을 재촉하기 위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1970
#서대문형무소의 기억
나와 서대문형무소의 만남은 무슨 잘못된 인연인지 언제나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에서였다. 그런 탓인지 무악재 고갯마루를 비껴 서 있는 우중중하고 음산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를 회상하면 그 추위부터 생각난다. 하필이면 내가 갈 때마다 왜 그렇게 추웠는지. 세 번 모두 다 그랬다.
박정희 시대에 두 번, 전두환 시대에 한 번. 박정희 시대인 1964년과 77년, 전두환 정권 때인 84년. 해방 후 현대사에서 아마도 극악의 시대로 역사에 기록될 그 20년 사이에 세 번이나 그들에 의해서 묶여 들어갔으니 적은 횟수가 아니다. 생각만 조금 고쳐 먹으면 태평성세를 구가하면서 영화와 입신도 웬만큼은 누릴 수 있었을 터인데, 생각하면 나도 꽤나 우직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우공이산!)
북한이 유엔에 대한민국과 동격으로 초대되거나 동시가입이 제한되는 따위의 이야기는 남의 나라에서의 이야기일지라도 국내법으로 ‘적성국가·단체 고무찬양’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악명 높은 ‘반공법 제4종 2항’이다!
영하 14도. 입고 간 옷을 홀랑 벗기도 여름 홑겹의 죄수복을 입혀놓아 와들와들 떨고 있는데, ‘밥’이 배급되었다…마뭇바닥에 뒹구는 콩밥 덩어리와 오경찬에 따라 나온 젓가락을 보았을 때의 생각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대나무를 아무렇게나 쪼개서 만든 젓가락은 굵기와 길이도 천차만별이었다. 얼마나 많은 손때가 묻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입이 빨고 지나왔는지, 끝에서 끝까지 숯덩이 같았다. 아무렇게나 마구 생긴 시커먼 젓가락은 병균 덩어리 같았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이것을 빨아 먹으라니! 이제 이 순간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는 말살되고 동물 취급을 받게 되는가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의 내용에 관해서였다. 황당무계하고 한심스러운 심문과 대화가 끝나자 그들은 나를 검은 지프에 태우고 무악재로 향했다. 뒷자리에 수갑을 차고 앉아 있는 나의 뇌리에 서대문형무소와의 첫 대면의 밤에 보았던 그 젓가락이 떠올랐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아! 또 동물이 되는구나!”
그해 겨울 감방안에서 동상에 걸린 열 개의 발가락에서 피를 짜내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6·25전쟁 발발 때부터 최전방 전투지대에서 휴전조인을 맞이할 때까지 3년 반을 살았어도 동상에 걸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치적·사상적 이유로 처넣어진 자기 정부의 시설 안에서 동상에 걸리니 어디에 하소연하겠는가. 나라를 잘못 타고 난 죄거나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죄를 한탄할 수밖에. 구치소에서의 재판 과정을 거쳐 형무소로 분산 수용된 2년여 동안, 겨울에는 동상에 시달리고, 여름에는 더위와 악취와 구더기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기에 나는 이 나라의 법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은 혹시 길이 여덟 자, 너비 넉 자 크기의 관 속에 들어가 누워본 일이 있습니까? 어떤 느낌일까요? 경험이 없어서 상상이 안 가지요. 그 관의 크기는 0.9평입니다. 그 관에는 0.2평의 변소가 붙어 있어서, 전체의 크기는 1.1평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이제 상상이 좀 갑니까?
0.2평의 변소는 콘크리트 바닥이고, 그 네모의 대각선이 교차하는 중심에 직경 10센티미터의 구멍이 뚫린 사방 한 자의 틈에서, 그것도 철장과 널빤지로 가려진 틈 사이로 뿌유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올 뿐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보이질 않습니다.
여름이면 낮에도 컴컴한 이 관 속 방바닥에 ‘식사’라는 것을 차려놓고 먹을라치면, 막힘이 없이 통해 있는 변소의 구멍에서 누런 구더기 떼가 줄줄이 기어나와 더불어 생존하기를 요구합니다. 처음 며칠은 음식이 넘어가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뿐이지요. 안 먹고야 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며칠이 지나면 구더기 떼를 빗자루로 쓸어내면서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해방 이후 역대 독재정권의 법복을 입은 분들이, 법정의 단상과 단하에서 ‘구형 7년’ 하면 ‘징역 5년’ 따위의 소리를 아무런 감상도 없이 주고받은 결과로 그들은 그 속에서 살았거나 죽어야 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 관은 21세기를 바라보는 세계 문명사회의 가려진 치부입니다. 분명 그래요.
나는 이제까지 독재체제의 법복을 입었거나, 지금도 입고 있는 분들에게 한 가지 간절히 권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1년은 너무 길고, 단 하루만이라도 그 관 속에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육법전서의 국가보안법이니 반공법이니 집시시위법이니 하는 법조문의 활자보다도 ‘인간’의 얼굴이 조금은 크게 보이겠지요.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이 나라 사법부의 권위도 서고, 교도소나 형무소가 ‘사람’을 잡아 넣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 서대문형무소도 80년 가까운 역사와 함께 문을 닫았다. 조금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교도소로 탈바꿈할 것인지…1988
#불효자의 변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효의 공덕을 훈계하려고 덤비는 사람은 대체로 부모를 섬겨본 일이 없거나 모실 필요가 없는 ‘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여기서 나는 또, 효를 하기 위해서는 ‘관념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효를 하기 위해서는 현학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그러고 보니 효를 국민에게 타이르기 위해서는 ‘출세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상업주의 정신’에 투철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위선적’이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로서는 굉장한 계몽이다!
본래 어느 사회의 도덕률이건 그것은 그 사회의 어떤 특정 시대의 역사적 발전단계의 경제적 조직원리에 따라 형성된 사회구조에 대응하는 인간관계의 규범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효의 사상도 예외일 수 없다.
진시황 무덤의 2,000명이 넘는 생매장당한 시체유물
그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시대의 권력의 관계이며 그 권력관계의 바탕은 총체적 경제적 소유관계다. 그릇된 경제적 소유관계는 그릇된 도덕을 낳는다.
요사이 충효사상의 복고나 재생을 강조하는 식자들은 충효의 사상이나 도덕이 딛고 서 있던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애써 무시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효가 ‘제도’로서 강요되는 사회는 본질적으로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사회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 관료주의가 깃들 위험성이 있고, 실제로 현재 충효사상을 ‘운동’으로 몰고 가는 움직임이 권력기관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충과 효의 이데올로기는 그 도덕률의 전제로서, 그리고 동시에 필연적인 결과로서 비이성적·비독립적 인간을 상정한다.
원세개·여홍원·장훈·장개석에게 공통적인 것은, 민주주의를 사갈시하고 대중적 요구를 거부하면서 각기 전제적 정치구너력을 강화하려 할 때 공교(孔敎)와 (충)효의 교의를 국민에게 숭상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요즘 사람들은 부모를 모시면 그것이 효도인 줄 아는가 본데, 그것만이라면 개나 말을 기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효도의 차이는 마음에서부터 공경하는 것이다.”-공자
관동대지진의 질서정연한 행동 vs 뉴욕 시의 12시간 정전 대소동
같은 극한상황에 직면한 인간관계와 인간행동 양식의 대조적 차이가 생겨난 이유을 캐물어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하나는 소유의 불평등이고 하나는 소유의 평등이다.
어째서 한쪽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려 하고, 한쪽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해치려는 것일까. 소유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필요한 만큼의 재화를 적은 대로 고루 소유하고 있다는 현실 조건은 도덕·심리적으로 사회적 인간애의 조건이 된다는 논리적 귀납이 가능하지 않을까.
모든 ‘타자’를 공격의 대상으로,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아야 할 ‘재화의 소유 주체’로 인식할 때, 순수한 본래적인 인간(인격)관계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상품경제(소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환가치를 토대로 하는 경제원리와 구조) 사회들에서 예외없이 부자간의 갈등, 남녀간의 갈등, 사제간의 불신, 상하간의 반목, 부부간의 배신이 이른바 ‘문명사회의 위기’로 경고되고 있다. 도덕주의자나 관념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 근본 원인은 도덕의 타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상품화된 인간’을 요구하는, 인간을 재화의 소유 단위로 해서 상호 기능한느 그 경제·사회적 원리와 구조에도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근에 이르러 인간관계, 사회도덕의 파탄 현상을 그런 측면에서 치유해야 한다는 경종이 저명한 그리고 양심적인 많은 정치인, 학자들 속에서 점점 짙은 위기감을 띠고 울려 나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식자들이 젊은이들의 작태에 실망했다거나 불안을 느껴 ‘효’의 도덕을 복구해보려는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현 사회의 원리와 구조가 소외의 원리와 구조라는 사실에 지식과 의식이 미치면 그들의 강의도 좀 발전적일 수가 있을 것 같다.
효는 아름다운 인간 감정의 행동적 표현이다…그렇지만 그것을 이 사회의 사회적 신앙교육의 근본 정신, 인간관계의 범주로 강조하려 할 때에는 그것만이 아닌 더 중요한 근본적 사실을 아울러 생각해보도록 권하고 싶어진다. 이런 생각이 나의 불효심 탓인지 모르겠다.1977
#언제부터인지, 어째서인지
상식이란 무엇인가. 소박한 민중이 까다로운 이론 조작·설득·세뇌 노력 없이 오랜 생활경험으로 옳거나 그르거나를 판단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맹자와 공자가 가르친 건전한 정치와 사회의 요체다. 민중의 소리는, 들으려는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들리는 소리다. 안 들리는 것은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괴상한 이론이나 충성을 표방하는 이상한 학자·정치가들의 말이 아니라 위가 맑으면 언제라도 맑아지려는 마음으로 있는 단순한 민중의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1972
#제복과 유행의 사상
미인대회에 비친 우울. 성적 자극의 경쟁
하이힐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복장 중의 한 가지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귀부인’들이 발명한 가장 혁명적인 성공이다…하이힐은 그들 ‘고급 매춘부’들의 몸매를 전체적으로 바꾸어버렸다. 즉 배가 들어가고 가슴이 나오게 된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히 그런 성적 자극이 강한 몸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뜻에서건 나쁜 뜻에서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된 육체밖에 가진 것이 없는 여성에게 남성이 요구한 결과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기에 제도로서나 개인의 경제·정치·사회문·화적 측면에서나 여성이 남성의 예속에서 진정으로 해방된 사회에서는 여성이 육체를 드러내 보이려는 경쟁적 유행이나 하이힐을 반드시 신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그만큼 적다고 할 수 있겠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회일수록,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렇지 못한 여성일수록 노출과 장식과 하이힐의 유행적 풍조에 뒤지지 않으려는 의욕과 필요성이 크다고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1974
#크리스찬 박군에게
박군은 지금 회의 속에서 한 발짝도 내딛을 수가 없다고 말했지. 배운 것과 현실 상황 사이의 모순고·괴리·긴장을 적절히 파악할 수도 없도, 더군다나 해결을 찾기란 불가능하게만 느껴진다고 고백했지. 박군은 바로 이성과 상황의 갈들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이 나라의 수없이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의 운명에 비로소 공감을 하게 된 것일세. 말하자면 ‘인간의 조건’이라는 문제에 비로소 눈을 뜬 것이지…비로소 ‘사고하는 사람’이 된 것일세. 내가 군의 편지를 축하한다고 말한 것은 이때문일세.
지난 한 해 동안 ‘한국’의 교회와 신자가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바로 이 인식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걸세. 그리고 인식이 사회적인 것처럼 실천은 더더욱 사회적인 것일세. 개체의 ‘사회성’을 인식한 데서 군의 고민이 생긴 것이라면, 사회에 대한 작용 없이 개인의 해방과 발전은 없는 것이요,
그런 뜻에서 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와 종교인이 마치 스스로 초사회적인 것처럼 또는 사회와 단절된 인간생존의 양식처럼 생각하고 행동(또는 不행동)해 온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왔음을 고백하네.
군이 교인이 아닌 나의 무례를 용서해준다면,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평면적인 사고방식과 종교관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겠네.
어쨋든 군이 교회 안에서 교회 밖 사회로 눈을 넓힌 것을 다시 축하하네. 교회도 사회 속에 있는 것이고 사회는 정치 속에 있는 것임을 명심하기 바라네.1976
#중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우리 역대 권력은 중국 본토에 관한 사링이 국민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알려졌다는 것은 무엇이든 서방 측 관점에서 보아 ‘어두운’ 면이라고 생각되는 일들뿐이었다. 중국이 아닌 중공(공산당)
중국의 역사가 혁명의 역사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것이 당연지사로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면 모택동에 의한 혁명도 중국 역사상의 수많은 혁명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데 이론상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도깨비는 못 보고 도깨비라는 이름에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실체와 내용이다…아편전쟁, 태평천국란,의화단민란,5·4문화혁명 등으로 연연히 이어온 100년의 중국혁명의 역사적 공통점은, 한마디로 백성을 수탈하는 소수권력 지배체제와 그들의 극심한 부패에 대한 백성의 항거와 중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외세애 대한 중국 ‘민중’의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주의 투쟁의 양면적 성격으로 규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