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p158
옛 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라고 하는 ‘무감어수(無鑒於水)’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이다만 그것이 바로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감어인(鑒於人)’.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얼음골 스승과 허준_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
허준의 이야기는 물론 소설가가 그려낸 상상의 세계이며,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진실’임에는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사실이라는 그릇은 진실을 담아내기에는 언제나 작고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그 책에서 사람은 부모를 닮기보다 그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고 하였지만 내가 고향에 돌아와 맨 처음 느낀 것은 사람은 먼저 그 산천을 닮는다는 발견이었습니다!
#반구정과 압구정_우리가 헐어야 할 피라미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의 창출 그 자체는 잠재적 역량의 계발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피라미드의 건설이 정치가 아니라 피라미드의 해체가 정치라는 당신의 글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땅을 회복하고 노역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형태의 피라미드를 허물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우리가 맡기지 않더라도 어김없이 모든 것을 심판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몫은 우리가 내려야 할 오늘의 심판일 따름입니다. 반구정과 압구정의 남아 있는 모습이 그대로 역사의 평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의 차이가 함의하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해체해야 할 피라미드는 과연 무엇인지, 우리가 회복해야 할 땅과 노동은 무엇인지를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압구정이 콘크리트 더미 속 한 개의 작은 돌맹이로 왜소화되어 있음에 반하여 반구정은 유유한 임진강가에서 이름 그대로 갈매기를 벗하고 있습니다.
나는 바람 부는 반구정에 앉아서 임진강의 무심한 물길을 굽어보았습니다. 분단의 제거야말로 민족의 역량을 최대화하는 최선의 정치임을 이야기하는 듯 반구정은 오늘도 남북의 산천과 남북의 새들을 벗하고 있었습니다.
#소광리 소나무숲_당신이 나무를 더 사랑하는 까닭
경복궁 복원을 위한 엄청난 원목? 200만재, 11톤 트럭 500대! 소나무가 없어져가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기어이 소나무로 복원한다는 것이 무리한 고집이라고 생각됩니다. 수많은 소나무들이 베어져 눕혀진 광경이라니 감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고난에 찬 몇 백만 년의 세월을 잘라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없이 잘라내고 있는 것이 어찌 소나무만이겠습니까. 없어도 되는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될 것들을 마구 잘라내고 있는가 하면 아예 사람을 잘라내는 일마저 서슴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위의 유일한 생산자는 식물이라던 당신의 말이 생각납니다. 동물은 완벽한 소비자입니다. 그 중에서도 최대의 소비자가 바로 사람입니다.
#백담사의 만해와 일해_진리는 간 데 없고 ‘색’ 만 어지러이
“그럼 자네가 그린 묵죽처럼 새카만 대나무도 있다더냐? 색은 마음이 보는 것. 세상에는 흰 색과 검은 색밖에는 없는 것이야. 선(善)이 아니면 악(惡)이야. 중간은 없어.”
“그렇지만 스님, 스펙트럼에는 흑과 백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렴 없지. 흑과 백은 아예 색이 아니야. 색을 본다는 것은 우산을 먼저 보고 비를 나중 보는 어리석음이야. 색은 흑백을 풍부하게 하는 데다 써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홀리고 어지럽게 할 뿐이야. ‘진리’는 없고 ‘진리들’만 난무하게 되는 것이야.”
#모악산의 미륵_미완은 반성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미륵불은 석가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마저 구제하기 위하여 오는 부처입니다. 석가의 완성을 위하여 오는 부처이면 반드시 와야 할 부처, 당래불(當來佛)입니다.
미완은 방성의 의미이며 청년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기에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역경 64괘는 미완의 괘인 ‘미제(未濟)’괘로 끝나고 있습니다. 괘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여우가 시내를 거의 다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하일리의 저녁노을_일몰 속에서 내일의 일출을 바라봅니다
황하의 오랜 잠류를 견딜 수 있는 공고한 신념 그리고 일몰에서 일출을 읽을 수 있는 열린 정신이 바로 지식인의 참된 자세인지도 모릅니다.
북극을 가르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지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읽어준 이 간결한 글만큼 지식인의 단호한 자세를 피력한 글을 나는 이제껏 알지 못합니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을 가리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이어도의 아침_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아픔과 기쁨으로 뜨개질한 의복을 걸치고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기쁨과 아픔, 환희와 비탄은 하나의 창문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풍경인지도 모릅니다.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지혜는 당신의 말처럼 ‘결합의 방법’입니다. 선량하나 나약하지 않고 냉철하나 비정하지 않고 치열하나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결합의 지혜’,’결합의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산의 사랑_한아름 벅찬 서울 껴안고 아파합니다
산천이 ‘몸’이고 그 위에 이룩된 문명이 ‘정신’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지금의 서울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처난 몸이 거대한 머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몸살이가 필요한 시대)
사람의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가슴’과 ‘머리’의 조화라고 하였습니다. 따뜻한 가슴(warm heart)과 냉철한 이성(cool head)이 서로 균현을 이룰 때 사람은 비로소 개인적으로 ‘사람’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사랑’과 ‘이성’의 인간학이고 사회학입니다. 사랑이 없는 이성은 비정한 것이 되고 이성이 없는 사랑은 몽매와 탐닉이 됩니다.
가슴이 먼저라는 당신을 어둡다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가슴에 두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는 말을 우수워하였습니다. 인간의 사고가 이루어지는 곳은 심장이 아니라 두뇌라는 사실을 들어 그것을 비웃기까지 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성주의의 극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오만이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이성이란 땅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처험 그 흙가슴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컴퓨터의 체(hareware)가 허용하는 범위내에서만 그 용(software)이 살릴 수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가슴을 떠나는 것은 ‘질’을 버리고 ‘양’을 취하는 것이며 사용가치를 버리고 교환가치를 취하는 것이라던 당신의 말이 떠오릅니다.
#천수관음보살의 손_눈이 달린 손은 생각하는 손입니다
천수천안. 그냥 맨손이 아니라 눈이 달린 손, 눈이 달린 손은 맹목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손입니다. 마음이 있는 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이 수많은 손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있는 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보화 사회. 세상에 ‘정보(情報)’란 없습니다. 있는 것은 소리입니다. 누군가의 소리일 뿐입니다. 소리는 앉아서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가야 하는 신호입니다. 손에 눈이 달려 있는 까닭이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질책을 무릅쓰고 천수보살 이외의 보살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잡초에 묻힌 초등학교_꽃잎 흩날리며 돌아올 날 기다립니다
농촌의 초등학교는 마을의 꽃이고 미래였습니다…당신의 말처럼 농촌을 보아야 합니다. 2억 평의 농경지가 묵고 있는 농촌 그리고 해마나 수십만 명씩 떠나간 농촌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을 찾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연과의 싸움에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혜와 끈기를 보여온 농민이 이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전 앞에서는 마치 상대를 보지 못하고 싸우는 병서처럼 막연하기 그지없습니다. 잡초에 묻힌 학교는 우리 농촌의 자화상이며 농촌은 우리 시대의 실상인지도 모릅니다.
세종대왕은 떠나가 어린이들이 돌아오리란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꽃잎을 날리며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땅을 버리고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온달산성의 평강공주_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믿습니다. 다른 어떤 실증적 사실(史實)보다도 당시의 정서를 더 정확히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완고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미천한 출신의 바보 온달을 선택하고 드디어 용맹한 장수로 일어서게 한 평강공주의 결단과 주체적 삶에는 민중들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은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편안함’ 그것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함은 흐리지 않는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그 속에 담고 있는 추억의 물이며 어딘가를 희망하는 잠들지 않은 물입니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_’역사를’ 배우지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과거’를 읽기보다 ‘현재’를 읽어야 하며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 목수의 집 그리기는 주춧돌부터…, 보통사람의 집그리기는 지붕부터 거꾸로.
#한산섬의 충무공_광화문의 동상 속에는 충무공이 없습니다
무거운 구리옷 벗어버리고 바람에 옷자락 날리며 바다처럼 풍부한 사람드의 한복판에 서 있는 충무공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당신의 글을 다시 읽습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서 있는 우상은 사람들을 격려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이다’
천재와 위인을 부정하는 당신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광화문의 동상 속에 충무공이 없다는 당신의 말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가장 강한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힘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산섬을 떠나오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상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고 있는가를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가 발견해야 할 수많은 사람(衆)과 땅(大地)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남명 조식을 찾아서_빼어남보다 장중함 사랑한 우리 정신사의 ‘지리산’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거창고 직업선택의 십계
한 시대의 빼어남을 지향하는 길을 가지 말고 장중한 역사의 산맥 속에서 익어가는 숯이 되라. 기계의 부품이 되지 말고 싱싱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결코 무너지는 일이 없는 지리산의 장중함이면서 동시에 남명의 철학이었습니다.
#섬진강 나루에서_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없이 사는 사람들의 부정은 흔히 그 외형이 파렴치하고 거칠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마치 맨손으로 일하는 사람의 손마디가 거친 까닭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합법적인 불법’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정작 딱한 것은 그 부분을 줌렌즈의 피사체로 잡는 세상사람들의 춘화적 탐닉이며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당의(糖衣)에 길들여 있는 우리들의 빈약한 의식이라고 해야 합니다.
#백흥암의 비구니 스님_가부좌의 한 발을 땅에 내리고 있는 부처를 아십니까
#석양의 북한강에서_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첨단과학은 인간이 어디로 향하여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없는 한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에 불과하다는 당신의 극언에 공감합니다
숨가쁘게 달려 도달하는 가상의 공간, 소외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이미 상품생산사회에 만연한 허위와 가상의 물신구조 속에 과도하게 매몰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언어제와 의상에 의한 자기표현도 본질적으로는 가상의 문화입니다. 그것은 분장과 디자인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건설하려는 그림자의 문화이며, 표면에 대한 천착입니다.
그것은 껍데기이기 때문에 결국 변화 그 자체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는 악순환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지의 변화로 현실의 변화를 대체해버리는 거대한 정치공학을 실감케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평등의 무등산_평등은 자유의 최고치입니다
당신의 말처럼 무등산은 최고의 산이 아니라 무등의 산, ‘평등의 산’이었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평등하고 산과 들판이 평등하고 나무와 바위가 평등하다는 자연의 이치를 무등산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평등은 자유의 최고치? 생각하면 이것은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양식(良識)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꿈꾸는 백마강_역사는 과거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입니다
당신은 3천 궁녀가 궁녀가 아니라 대부분 쫓기고 쫓기던 병사와 민초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낙화암의 3천 궁녀 전성을 애절할 정조의 아름다운 전설이지만 그것은 패배한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을 조명하기 위한 교묘한 각색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전에 앞서 자기의 손으로 처자의 목을 벤 계백 장군의 비장하지만 잔혹한 결단을 겨냥한 비난에 대해서도 잔혹하기는 오히려 어린 관창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신라군의 사기를 돋운 김유신의 책략이 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산한 고도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고작 비극을 미화라는 감상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감상은 표면에 대한 감성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극미의 조명이 아니라 승리든 패배든 그 이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더 큰 비극에 대한 조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의 쟁패와 통일을 통하여 우리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 유일한 승자는 어부지리를 챙긴 당나라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광활한 영토를 잃어버린 거대한 상실에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지배자로 들어앉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하여 혈흔이 채 마르지도 않은 창검을 들고 또다시 전장을 달려야 했던 민초들의 비극에 초점을 맞추어져야 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어리석은 민족사의 복판에서 백제의 패망이 조명되고 민족의 비극이 반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모학 격정이 낳은 소탐대실의 어리석은 역사를 뉘우치지 않는 한 백마강의 비극은 더 이상 과거의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제의 역사는 엇그제 그끄제에 있기’ 때문입니다.
#철산리의 강과 바다_강물의 끝과 바다의 시작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당신은 바다보다는 강을 더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강물은 지향하는 목표가 있는 반면 바다는 지향점을 잃은 물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바다로 나온 물은 이제 한강도 임진강도 예성강도 아닌 바다일 뿐입니다. 드넓은 하늘과 그 하늘의 푸름을 안고 있는 평화로운 세계일 뿐입니다.
나는 당신이 강물을 사랑하는 까닭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강물은 고난의 시절입니다. 강물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물이되 엎어지고 갇히고 찢어지는 고난의 세월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한강과 임진강.예성장 유역은 삼국이 서로 창검을 겨누고 수없이 싸웠던 전장입니다. 지금도 임진강은 휴전선 철조망에 옆구리를 할퀸 몸으로 이곳에 당도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강물 시절은 이념과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도도한 물결에 표류해온 오리의 불행한 현대사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존엄이 망각되고 겨레의 삶이 동강난 채 증오와 불신을 키우며 우리의 소중한 역량을 헛되이 소모해온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곳 철산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암울한 강물의 시절도 그 고난의 장을 마감합니다. 당신의 말처럼 이제 더 이상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물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바다가 됩니다. 달려야할 목표가 없다기보다 달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은 부질없었던 강물의 시절을 뉘우치는 각성의 자리이면서 이제는 드넓은 바다를 향하야 시야를 열어나가는 조망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강물의 치열함도 사실은 강물의 본성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땅으로 인하여 그렇게 달려왔을 뿐입니다. 강물의 본성은 오히려 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과 평화인지도 모릅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본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며 가장 평화로운 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물이고 평화로운 물이지만 이제부터는 하늘로 오르는 도약의 출발점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목표를 회복하고 청천하늘의 흰구름으로 승화하는 평화의 세계입니다. 방법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최후의 목표로서의 평화입니다.
평화는 평등과 조화이며 평등과 조화는 갇혀 있는 우리의 이성과 역량을 해방하여 겨레의 자존을 지키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꺠닫게 함으로써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아갈 수 있게 하는 자유(自由) 그 자체입니다.
나는 마지막 엽서를 당신이 내게 띄울 몫으로 이곳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강물이 바다에게 띄우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무야 나무야 | 강물이 바다에게 띄우는 이야기”에 대한 1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