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p399
우리 시대의 고뇌와 양심
그 작은 엽서는 바쁘고 경황없이 살아온 우리들의 정수리를 찌르는 뼈아픈 일침이면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자기성찰의 맑은 거울이었다. 그것은 작은 엽서이기에 앞서 한 인간의 반듯한 초상이었으며 동시에 한 시대의 초상이었다.
사람이 그리운 시절에 그 앞에 잠시 멈출 수 있는 인간의 초상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이다
#단상 메모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세상이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인간의 적응력, 그것은 행복의 요람인 동시에 용기의 무덤이다.
인내는 비겁한 자의 자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란 ‘모두살이’라 하듯, 함께 더불어 사는 집단이다. 협동노동이 사회의 기초이다.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함께 만들어낸 생산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 곧 사회의 ‘이유’이다. 생산과 분배는 사회관계의 실체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관계의 토대이다.
그러므로 고독의 문제는 바로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의 소외문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청구회의 추억
#객관적 달성보다 주관적 지향을
그러나 나는 인간을 어떤 기성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개인이 이룩해놓은 객관적 ‘달성’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너도 알고 있듯이 인간이란 부단히 성장하는 책임귀속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평소에도 독서보다는 사색에 더 맘을 두고 지식을 넓히는 공부보다는 생각을 높이는 노력에 더 힘쓰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방법의 문제
사실은 여하한 경우라 할지라도 반드시 1)어떠한 계기에서 발생하였으며 2)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한다가 3)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갔는가 하는 역사적 관계 내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동시에 또 그것을 당시의 사회구조, 당시의 가치 규준에 조응시켜 당시의 사회구조가 갖는 필연적 한계를 늘 그것의 인식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많은 것을 읽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높이고자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하여야 사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시어머님
옛날 같지 않아 이제는 점점 젊어가는 노인이 되셔야 합니다. 진정 젊어지는 비결은 젊은이들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흥미있는 일과 가치있는 일의 차이는, 곧 향락과 창조의 차이이며, 결국 소-장의 차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아름다운 여자
긍정적 미래로 열려 있는 여자인가 현재 속에 닫혀 있는 여자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은 현재를 고정불변한 것으로 완결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연관 속에서 변화발전의 부단한 과정으로 인식하는 철학적 태도이며, 현실성보다는 그 가능성에 눈을 모으는 열려있는 시각이다.
#이웃의 체온
무수한 벽과 벽 사이, 운신도 어려운 각진 공간에서 우리는 부단히 사고의 벽을 헐고자 합니다. 생각의 지붕을 벗고자 합니다. 흉회쇄락, 광풍제월. 그리하여 이윽고 ‘광야의 목소리’를, 달처럼 둥근 마음을 기르고 싶은 것입니다.
잡초를 뜯어서 젖을 만드는 소처럼 저는 간고한 경험일수록 그것을 성장의 자양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 하기에 앞서, 붓을 잡는 자세를 성실히 함으로써 먼저 뜻과 품성을 닦는, 오히려 ‘먼 길’을 걸으려 합니다…그리하여 최고의 예술작품은 결국 ‘훌륭한 인간’, ‘훌륭한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매직펜이 실용과 편의라는 서양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죽은 동양의 정신을 담은 것이라 생각됩니다(편리한 문방구)
저에게 주어진 이 작은 일우가 비록 사면의 벽에 의하여 밀폐됨으로써 얻어진 공간이지만, 저는 부단한 성찰과 자기부정의 노력으로 이 닫힌 공간을 무한히 열리는 공간으로 만들어감으로써 벽을 침묵의 교사로 삼으려 합니다. 필신기독, 혼자일수록 더 어려운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 깊숙히 들어가는 것이 곧 나의 ‘사회학’이기도 합니다.
결국 서도는 그 성격상 토끼의 재능보다는 거북이의 끈기를 연마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향 선생님의 행초서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글씨가 무르익으면 어린아이의 서투른 글씨로 ‘환동’한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저마다의 진실
섬 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산골 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서울 사람에게 있어서 해는 빌딩에서… 이것은 섬 사람이 산골 사람을, 서울 사람이 섬 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오진을 스스로 깨닫도록 은밀히 도와주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는 유연함과 후덕함을 갖추는 일입니다…상선약수, 최고의 선은 슨저롭기가 흡사 물과 같다는 까닭도 아마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성장과정과 경험 세계가 판이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매 먼저 부딪치는 곤란의 하나가 이 언어의 차이입니다. 같은 언어를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그런대로 작은 차이이고, 여러 단어의 조합에 의한 판단형식의 차이는 그것의 내용을 이루는 생각의 차이를 확대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벽을 기능은 우선 그 속의 것은 한정하는 데 있습니다. 시야를 한정하고, 수족을 한정하고 사고를 한정합니다. 한정한다는 것은 작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넓이는 좁아지고 길이는 짧아져서 공간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결국 한 개의 점으로 수렴케 하여 지극히 단편적이고 충동적이고 비논리적인 편향을 띠게 합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의 첨예한 감정은 이러한 편향성이 축적, 강화됨으로써 망가져버린 상태의 감정입니다.
#한 발 걸음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 과정의 반복. 그러므로 이 실천이 없다는 것은 곧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일어서서 걸어야 합니다. 징역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맨 처음 시작하는 일이 책을 읽는 일입니다. 그러는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시 한 발 걸음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 있다기보다는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다른 모든 블구자들이 그렇듯이 목발을 짚고 걸어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목발로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이었습니다.
나는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려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기 3개, 칫솔, 수건, 젖가락 각 1개씩만으로 징역을 살아가는 용기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비록 무기징역을 핑게삼는다 하더라도 아직 더 버려야 합니다.
용기는 선택이며 선택은 골라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을 버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관계를 맞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창녀촌의 노랑머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어떠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함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자기 것으로 하는 경우 이를 도둑으로 부르고 있거니와, 훌륭한 사상을 말하되 그에 못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 우리는 이를 무어라 이름해야 하는지….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면 그 자체가 하나의 ‘학교’가 되기 마련
#인동의 지혜
겨울 추위는 몸을 차게 하는 대신 생각을 맑게 해줍니다. 추위는 흡사 ‘가난’처럼 불편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불편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이 박을 글귀가 삼뜩합니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인간의 초상”에 대한 4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