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 이병철. p274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삶의 주체요 근본인 내 생명의 절대적 조건이 무엇인가. 컴퓨터, 휴대폰, 자동차 등 그 무엇도 생명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오직 자연과 음식만이 내 생명을 살리고 유지하게 한다. 내 생명에 절대적 조건인 음식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농자천하지대본을 아는가?
만일 근본을 모르고 있다면 그 지식은 쓰레기 지식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을 믿는가?
근본을 믿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버려야 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의 길을 가고 있는가?
만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면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을 꿈꾸고 있는가?
만일 다른 꿈을 꾸고 있다면 하루 빨리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의 삶을 살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생을 헛살고 있는 것이니 더 늦기 전에 참된 삶을 모색함이 옳다.
천하의 근본을 모르고 함부로 하는 것은 마치 첫 단추를 잘못 꽨 상태에서 다음 단추를 계속 꿰는 것과 같다. 근본을 망각하는 한 우리가 하고 있는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그 모든 것들이 자기 생명을 파멸의 함정으로 몰아넣는 자기모순에 빠져 들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현대 문명의 모순과 위험을 통찰하는 눈 밝은 사람의 절절한 호소에 귀 기울일 일이다. 생명의 근본, 삶의 근본을 응시하는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의 지극한 기도에 함께 할 일이다. 근본 원칙을 붙잡고, 황소처럼 우직하게 걸어가는 용감한 사람의 사무친 절규에 겸손할 일이다.-도법스님 추천글
#숲안마을 가는 길-귀농을 꿈꾸는 당신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귀농이란 단지 농촌으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땅과 가까운 삶으로, 자연과 함께하는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더 올바른 뜻이라 할 수 있겠지요.
달리 말하면 귀농이란 단순한 직업의 전환이 아니라 삶의 전환이라는 것이지요. 뿌리 뽑힌 삶에서 뿌리내리는 삶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삶에서 자연과 조화로운 상생 순환의 삶으로,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삶에서 생산적이고 살리는 삶으로, 의존적인 삶에서 자립적인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귀농은 귀본이요, 귀일입니다.
#다시 단순 소박한 삶의 회복을 위하여
이 시대에 우리가 추구하는 귀농을 경제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직업의 전환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조화되는 삶 자체를 중심 가치로 삼는 생태적 삶으로의 전환이라고 정의한다 하더라도, 농촌 농업이 급격히 무너져 내리는 현실 앞에서 생태적 삶을 실현한다는 것이 더욱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의 무게 때문에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는 귀농 식구들도 적지 않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귀농하고자 하는, 또는 귀농하면서 추구했던 그 목적과 이유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려울 때, 앞이 막혀 나가기 힘들 때 다시 처음을 생각해 보는 것은 다시 일어서는 데 힘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왜 귀농인가?’를 다시 물어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지금 그렇게 살아라.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지금 그 일을 하라.”(일과 삶을 일치시키는 길)
자발적 가난?(Simple Living의 번역?)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할 수 없는 더 소중한 가치에 대한 자각없이는 이러한 삶의 전환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가난하다고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물질 그 자체의 궁핍 때문이라기보다는 돈에 의지하여 사서 쓰다 버리는 소비에 길들여진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비 중독 바이러스?
인류의 역사상 최대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이 시대에 우리 사회는 탐욕에 감염되고 있다. 인간은 더 많이,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을 살 수 있는 가능성에 모두 넋을 빼앗겼다. 전 세계가 지금 소비 중독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그 속에서 이제 인간마저 소비되고 있다.
우리의 필요를 진정한 쓸모에 바탕을 둔다면 그렇게 많이 소유할 필요가 없고 물질적 궁핍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아도 됩니다.
소비 중독증에서 벗어난 삶의 건강성을 일구기 위한 질문!!
“그 물건이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당신이 직접 만들어 쓸 수는 없는가?”
“다른 사람의 것을 함께 이용할 수는 없는가?”
“더 많이 소유하는 삶 대신 더 많이 존재하는 삶”-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단순한 삶, 풍요로운 존재)
#정성으로 땅을 살리며 삶을 가꾸기
정성을 다한다? 몸과 마을을 오롯이 한 곳에 모으는 것(일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
우리가 농사를 지어 생산한 농작물은 그 자체로 우리 인격의 반영이다!
가꾸는 삶 vs 꾸미는 삶
가꾼다? 본 모습을 잘 보이게 한다. 장식은 제거한다. (뺄셈의 생활방식)
꾸민다? 장식을 더한다. 본 모습을 감춘다 (덧셈의 생활방식)
생태농업의 핵심은 땅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인류는 원자폭탄의 발명 이래 무서운 공포에 시달려 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훨씬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또 다른 현상은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생존을 의지하고 있는 대지를 고갈시켜 황폐화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재난의 의미를 천재지변이나 전쟁의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있다.”-영국토양학회의 경고
대지에 일어난 일은 대지의 자식에게도 일어난다-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연설
농부는 땅을 지키고 돌보며 그 속에서 생명을 기르고 가꾸는 사람입니다.
생태적 뒷간? 대지의 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대지에서 밥을 얻었다면 그 밥을 먹고 만든 똥을 다시 대지의 밥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이 대지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제 길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한 길뿐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꽃이 피고 들이 푸르러지는 것 또한 사랑입니다
농사란 결코 혼자서 지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품앗이나 두레 등으로 여럿이 함께 일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부부가 함께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여럿이 함께 먹고, 함께 어울리고,..)
봄입니다. 저 불임의 도시, 시멘트 숲에야 제대로 봄이 오기 어렵겠지만 이곳 대지에는 벌써 봄이 한창입니다.
사뭇한 그리움, 간절한 기다림,…사랑!!
#다시 바른 농업으로 돌아가기
온난화, 기상이변? 새삼 절기를 잃어버린 것이 문제하기보다는 절기를 그렇게 변하게 만드는 우리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이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농업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근본 원인은 본질에서 벗어난 데 있다!
수출 위주의 근대화 정책 등으로 이 땅의 농촌, 농업을 구조적으로 소외시키고 희생시켜 온 정치경제적 원인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바른 농업이란?
1)자기 실현-농산물 자체가 곧 자기 자신의 인격의 표현
2)생태적-“병든 몸을 치유하기 전에 먼저 병든 땅을 치유하라”
3)소비자,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생농
“나락 한 알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 농업이란 본래 농사짓는 사람뿐 아니라 온 우주, 곧 천지 대자연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밥이 하늘이다”)
상품화? 소비자와 생산자의 철저한 분리
소비자와 함께하는 농사, 생명 연대를 이루는 공생농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의 지저귐을 들어 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잃어버릴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 보라.”-헬렌 켈러
#마음으로 짓는 농사
귀농학교? 귀농은 이 시대의 구원의 길, 새로운 공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풍요로움!
작물을 기르는 농사의 마음? 의식이 물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신과학이 규명한 중요한 성과입니다
계절의 환희를 느끼지 못하는 생태맹!
그것이 옳은 일일수록, 그것을 원하는 것일수록 자연스럽게 해 나가는 것이 오래가고 바르게 가는 바탕이라는 생각이지요. 요컨대 우리가 ‘단순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옳은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 자체가 즐겁고 편하기 때문이라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知者)
#조화로운 삶의 단순성
철 모르면 농사 자체를 놓쳐버린다
제대로 된 농사꾼은 ‘도에 가까운 사람’? 천지 운행에 조화로운 삶을 산다
‘살아 있는 밥상’의 기준은 땅과 얼마만큼 가까운가에 두어야 한다(땅과의 연결! 발을 땅에, 살아있는 흙에 닫지 않고서는 살아 있는 밥상을 마련하기안 불가능하다? 삶의 뿌리를 땅에 둔 밥상!)
내 작은 텃밭? 땅을 가꾸는 것은 밥상을 가꾸는 것이고 내 존재를 가꾸는 일임을 다시 새깁니다.
음식을 내 손으로 직접 장만하고 나누는 일?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걷는 것과 더불어 내면의 평화를 일구는 좋은 수행이라는 걸 뒤늦게 공감하면서 갖게 된 꿈입니다.
문명 속 생태맹? 이제 세 살인 저 아이도 식물을 구별하기 시작하는데, 지금 도시에서 나고 자란 어른들 대부분이 작물과 들풀을 구별할 줄 모릅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학교와 사회에서 배운 지식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하면 씁쓰레한 기분을 좀체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야성의 회복을 위하여
문제는 잡초의 강한 생명력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기르고 있는 작물의 야성, 본래의 자연스러운 생명의 힘을 잃어버린 것에 있다
인류 문명의 야만성은 야성의 건강한 회복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곧 야성을 회복하는 길, 자연성의 회복)
문명이란 문화란 이름으로 자연과 철저히 분리시켜 온 것입니다
#걸으면서 만나는 삶을 위하여
세계화의 대안? 지역적 자립? 마을 단위의 자립적 경제 회복
인도 비노바 바베의 토지 헌납 운동(부단 운동)
생태맹의 극복이란 농심의 회복에 있습니다
흙에 뿌리박기란 토착민으로 살기와 같은 말입니다. 이 시대의 불행, 이 문명의 한계는 초청장을 없애 버린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건강한 삶의 토대는 단순하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며 먹을거리를 유기농으로 손수 길러 먹는 곳만로도 충분하다.”-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
농업에 있어서 대형 농기계의 사용은 한마디로 대지의 질서를 거스르는 방법으로 자연의 생태 순환 시스템의 파괴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농가 부채의 대부분도 대형 농기계 때문!)
먹을거리는 상품이 아니라 생명이며, 생산과 소비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통일된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직거래, 서로 얼굴을 알고 거래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의 협동조합
단순한 삶? 소유에 얽매이지 않는 삶
#농사법에 대하여
자연에 의지한다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도를 믿고 이에 따르는 것이며 변화를 알고 함께 변화해 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무위농법,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사람인 농부가 곧 도인!)
#우리 쌀 지키기와 뿌리내리기
‘쌀은 생명이다’! 쌀은 국민 모두의 생명이다. 이 절박한 문제가 단순히 농민들의 경제적 이해 문제로만 여겨지는 것 같아 더 안타깝습니다.
#문명의 전환과 깨달음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다 같이 ‘모자람’에서 나왔다. 모자라니까 더 생산하자거나, 모자랄수록 나누어 먹는 것이 먼저라는 주장에서 두 체제가 나누어진 것이다. 이제 그 ‘모자람’이라는 전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체제 둘 다 무너지는 중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풍요를 너머 과잉의 시대, 죽음에 이르는 성장이 된 과잉생산 체제!)
새로운 생태 문명으로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깨달음이란 자연과 내가 하나라는 일원론으로의 귀의!
복귀기근(復歸其根)-노자 16장,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삶의 회복
웰빙? 참살이! 삶의 자연성 회복, 삶의 뿌리 회복
#오래된 미래를 다녀와서
“당신이 깍으려고 하는 그 금액이 당신에게는 푼돈에 불과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샹계가 좌우되는 매우 큰돈이다.”
#감사하는 삶의 풍요로움
우리가 감사할 때 비로소 참다운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감사함이 있을 때 풍요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감사는 행복과 풍요의 원천)
행복한 삶의 세 가지 요소? 단순한 삶, 자연과의 교감, 자립적인 삶
#귀농, 그 하나로 돌아가기
자연과 조화되는 삶이란 결국 철을 알고 제때 그 철에 맞추어 사는 것이겠지요.
#비움으로써 채우는 풍요로움
창자를 비우면 육신이 가벼워지고 몸이 가벼워지면 마음이 절로 맑아집니다(비움으로 태우는 새로운 충만!)
“21세기는 생태주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영국의 생태학자 조너선 포릿의 지적은 이에 대한 적절한 경구입니다.
귀농은 고행하는 삶의 선택이거나 현실에서 도피하는 수단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외는 정반대로, 해방된 자로서 세계의 해방을 위한 적극적인 삶의 결단으로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이다.(스스로 자립 실천)
#우리 몸의 회복
아는 것처럼 식사란 잔치며 동시에 공양입니다… 소박하지만 제철, 살아 있는 땅에서 거둔 생명이 충실한 밥상을 마련하여 자신에게 올리는 일이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는 생태적 삶의 첫번째 조건입니다.
“활력과 건강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토양인데, 인간은 증가하는 인구수에 맞추어 식량을 생산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러는 와중에서 자신의 육체가 흙에서 온 것임을 잊어버렸다.”-앙드레 부아젱
식물과 동물의 질병을 없애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은 바로 토지를 비옥하게 가꾸는 것임을 믿었던 앨버트 하워드
우리가 직면한 토양의 위기의 성격? 그것은 한마디로 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유명한 연설처럼, 대지에서 일어난 일은 대지의 자식에게도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
농부야말로 ‘아끼는 사람’? 이 아낀다는 의미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
오불여노농吾不如老農,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한다.
분수를 아는 명언?!
이 분들이 떠나시면 흙과 함께 일구어 오던 문화, 자연을 공경하고 삼가던 그 농심의 문화가 또한 사라지고 말 것이라 생각됩니다
농사일이란 가장 바탕이 되는 일이라 마치 물처럼 공기처럼 오히려 그 중요성을 잊은 채 세상에서 흔히 맨 밑바닥 같은 처우를 받는 동시에 그것 없이는 세상 사람들이 한시도 살 수 없는 근본인 까닭에 가장 으뜸가는 일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합니다.
#생명 운동으로서의 귀농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
생명 운동의 실천 원칙은 자연의 법도인 상생 순환의 원리에 따르면서 섬김과 삼감, 보살핌과 아낌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 | 오불여노농吾不如老農”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