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일일수행-세상 바로 보기. 박석무. p395
#왜 다산을 읽어야 하는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이후 30년이 되도록 필자는 줄곧 다산의 저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이런 대목은 정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순전히 한문으로만 이루어진 다산의 저서들은 전문가 아닌 일반인은 거의 읽을 수 없다는 한계를 잘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더욱 그런 안타까운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다산의 생각, 온 나라가 부란하여 어떻게 손댈 수도 없다던 세상, 그냥 두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리라고 엄중한 경고를 내린 다산의 뜻을 전달해주지 않고 그냥 두기에는 가슴이 너무 답답하였다. 국민의 자유와 인권도 상당히 증진되었고, 나라의 경제고 제법 윤택해졌건만,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다산의 이야기가 약석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30년 전과 큰 차이 없이 지금도 사회풍조는 금전과 권력만능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진실하고 정의롭게 살면 오히려 손해를 보거나 실패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세상, 정의는 힘을 잃고 권모술수와 아유구용만이 성공의 첩경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그렇게 하지 않아야만 세상이 올바르게 된다는 다산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다산은 사람이 연구해야 할 학문 분야를 크게 둘로 나누었다. 자신의 인경 수양과 자실 함양을 위한 경학과, 인격과 자질이 높은 수준에 이르면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경세학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경학을 통한 수기의 길, 경세학을 통한 치인의 길을 제대로 알아야 본말이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정도편_삶을 바르고 곧게 경영하라
수사와 재판의 기본정신.
다산의 저서는 5백권 이상이지만 세상을 구제하고 경륜할 책으로는 일표이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그 귀중한 책을 세상에서는 별로 알아주지도 않고 읽지도 않지만 그 중에서도 흠흠신서는 더 더욱 거론되지도 않습니다. 너무나 전문적인 분야여서 일반인들에게는 흥미롭지 못한 것은 사실.
그러나 그 책은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재판하는 일에서 필수적일 뿐 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인명의 고귀함, 형사소송제도에서의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라는 큰 주제에서 없어서는 안될 너무도 중요한 책. 다산은 흠흠신서의 저작목적이 바로 수사와 재판에서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서라고 했으니 얼마나 합당한 이야기입니까…수사와 재판의 기본정신인 공경과 애에 있다고 했습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어떤 흉악범도 인간인 이상 최고로 공경스럽게 대하며 수사하고 재판하며, 아무리 악독한 범죄자라고 가련하고 불쌍한 생각을 지니고 대하라는 의미였습니다.
큰 도둑 작은 도둑.
다산은 배가 고파서 야밤에 남의 집에 들어가 도적질하는 좀도둑은 도둑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장발장처럼 춥고 배고파 저지른 범죄는 범죄라고 해서는 안된고, 막중한 책임을 지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의 범죄는 참으로 무서운 범죄라고 단언했습니다.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모두 죽게 된다”라던 다산의 말씀을 잊지 맙시다.
방관은 죄악이다.
“탐학질하는 풍습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백성들이 초췌해졌다. 가만히 생각하면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고 말텐데, 이런데도 어떻게 충신이나 지사로서 팔짱만 끼고 방관할 수 있겠는가.”
시위 주동자의 무죄석방.
“고을 원님이 밝아지지 못하는 까닭은 백성들이 자기 몸을 위해서만 교활해져 폐막을 보고도 원님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할 사람이다.”
“고을에는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무죄석방한다.”
공직자의 지극한 영화.
“청렴하다는 소리가 사방에 퍼져서 아름다운 소문이 날마나 늘어나면, 이것 또한 인생의 지극한 영화이다.”
각자가 해야 할 책임만 다하면.
“인(仁)이란 사람이니 두 사람이 인을 행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의 본분을 다하면 인이다. 임금과 신하가 각자의 직분을 다하면 인이다. 남편과 아내가 자신들의 직분을 다하면 인이다. 인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두사람의 사이에서 나온다…”
세상이 왜 부패하는가.
낡고 썩은 법과 제도를 고치거나 바꾸지 못하여 세상은 타락하고 인민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여기고 법제의 개혁을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니,그의 논論.의議.설說 등의 단편 논문을 비롯하여 방대한 일표이서의 저서가 모두 그 분야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고치고 바꾸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썩을 수밖에 없다는 다산의 주장을 현대인들도 의미 깊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다산은 조선정신의 지보至寶.
위당 정인보. 다산의 학문이 “조선정신의 지극한 보배”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근세조선을 알려 하는 사람은 다산의 유저를 통하여 찾아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실實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오늘의 세상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고, 다산을 몰라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산으로 돌아가 오늘의 난관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요.
다산의 민중적 경학.
“대개 조선의 수백년간 안이나 밖이나 썩어문드러져 어찌할 수 없음은 전혀 실實을 알지 못한 때문이요. 그 실을 알지 못함은 그 이유가 또 학문상 착오에 있음일세. 이같이 학문에서부터 발란반정(혼란을 파헤쳐 바르게 돌려놓음)의 실을 거하자 한 것이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행동함이오.
‘진심지성’. 온마음을 다 바쳐서 노력하면(盡心) 천하에 오묘한 ‘성性’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知性)이라는 뜻인데, 그런 경지에 오르기가 어디 쉬운 이린가요.
오늘날 흔히 글을 조금 알고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을 지성인知性人이라고 호칭하는데, 그것은 정말 쉽게 부를 호칭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도道를 향해 도중에 그만두더라도 몸이 늙어감도 잊고 세월이 부족함도 알지 못하고 부지런하게 힘쓰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것을 ‘진심’이라 이르니,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행동함이요, 행동하면 반드시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반드시 행하나니, 앎과 행동이 서로 촉발되어 상호간에 수양되는 것이다.”라고 다산은 『맹자요의』에서 설명합니다.
관官의 잘못에 항의할 줄 알아야.
“통치자들이 밝아지지 못하는 까닭은 백성들이 제 몸을 꾀하는 데만 재주를 부리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관에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다산의 명언은 바로 요즘의 세상을 위해서 했던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과 서의 인심은 같다.
“이 지역 인심이 이렇게 사납느냐?”라고 한 차례만 입밖에 내다가는 말 한마디에 천 사람의 인심을 잃고 만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사람을 훈계하다가 고을 전체의 백성을 들먹이면 반드시 인심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다산의 주장이었습니다….”흥양은 본디 착한 풍습이 많은 곳이데, 너는 왜 그렇게 못된 짓을 했느냐?”라고 말을 한다면 흥양의 백성들이 마음을 흐믓하게 먹고 현감의 어진 정치를 칭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상도 사람은 어떠니’, ‘전라도 사람은 어떠니’라고 한두 사람의 행위를 보고 지역의 전 주민들까지 욕 먹이는 언사는 쓰는 경우가 많은데, 다산의 거관사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거울삼아, 그런 인심을 잃는 언사는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교과서를 바꿔라.
당시의 교과서는 4서5경이었기 때문에, 관념적이고 성리학적으로 해석된 당시의 교과서인 4서집주를 다시 해석하여 봉건적 결정론으로 윤색된 모든 해석을 뒤엎고 다산 자신의 실학적이고 실천가능의 논리로 재해석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학술사상 대업이 이룩된 셈입니다.
무원홀근務遠忽近을 경계해야.
다산의 글을 읽다 보면 2백년 전에 했던 말이 왜 오늘에도 이렇게 절실한지에 대해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세계화하지 않고는살 길이 없다느니,영어를 잘하는 나라만 선진국이 된다느니…
“먼 데에만 힘을 기울이고 가까이 있는 일은 홀대하는 것이야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인 병폐지만, 유독 우리나라는 너무 심합니다. 온갖 문물제도를 중국에서 모방해왔다해도 도서로 기록하는 데 있어서는 의당 우리나라 일에 밝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밖의 신기함을 탐색하고 연구하기 어려운 것을 연구하기보다는 우리의 국토 안에 있는 가까운 것을 조사해서 실상을 밝혀야만 합니다.”
#위정편_더불어 사는 이웃의 형편을 살펴라
호치민이 존경한 다산.
사회주의 나라에서도 가장 깨끗하고 청렴했던 지도자이자 혁명가의 한 사람이 베트남의 호치민. 결혼하여 처자가 생기면 아무래도 사욕이 생기고, 사욕이 일어나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 결혼을 거부하고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식민지 국가였던 자신의 조국과 결혼, 그 조국의 해방투쟁에 앞장섰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미국과 싸우는 월남전을 이끌어, 끝내는 조국의 해방과 통일을 달성한 ‘베트남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호치민의 사상과 철학이 어디서 나왔을까 세상의 관심거리였는데, 그 호치민의 머리맡에는 바로 『목민심서』가 항상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책이 닳도록 목민심서를 읽고 또 읽었다는 호치민…목민심서를 읽는데 그치지 않고 그 책을 지은 다산선생을 너무도 존경하여서, 다산의 제삿날까지 알아내서 해마다 제사를 극진하게 모시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세상을 원한다면, ‘희희호호’한 이상세계가 그립다면, 이제라도 목민심서를 읽고, 그 가르침을 실행에 옮겨야합니다.
경經을 잘못 해석한 오류.
‘무위이치‘. 통치자는 하는 일 없이 가만히 권좌에 앉아 있어도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다산의 반문에는 격한 분노까지 서려 있습니다. 역시 실학자다운 면모입니다. 순舜임금은 천하에서 가장 어질다는 22명의 탁월한 인재들을 골라 가장 적합한 직책을 맡겨 열심히 일하도록 온갖 독려를 다 했습니다. 사람 한 사람을 골라 쓰려면 몇 밤을 새우며, 온갖 어진 이들의 자문을 받아 적지적소에 인재들을 제대로 배치한 후, 감시만 잘하면 나라는 제대로 다스려졌기에, 요순의 세상이 되었습니다….그런 뜻도 모르고 통치자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경을 해석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그래서 경의 해석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재 등용이 그렇게 중요함을 다시 인식하게 합니다.
양羊들이 생존토록.
목민심서. “토호들의 무단적인 행위는 연약한 백성들에게는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무섭다. 승냥이나 호랑이의 피해를 제거하여 양처럼 순한 백성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목牧이라고 이른다.” 간략하지만 너무도 많은 뜻이 함축된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민심서의 뜻.
18년의 오랜 귀양살이. ‘목민’이야 백성을 보살펴주고 보호해 주며 편안하게 돌봐준다는 뜻의 글자대로 내포되어 있으나, ‘심서心書’라는 두 글자에 바로 그 안타까움이 서려 있습니다. “‘심서’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들을 편하게 보살펴주려는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는 없다. 때문에 마음만 있는 책(心書)이라 이름 한 것이다.”
바른 정치의 비결.
목민심서에서는 “청렴하지 않고서는 정치인이 될 수 없다.”고 까지 단정적인 주장을 했습니다.
“목민관이 백성들을 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먹고 살게 하는 일을 먼저 하고, 그 뒤에 교화시키는 일을 하고, 교화시킨 뒤에야 학문을 닦게 해야 한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 식생활이 보장된 뒤라야 문화와 문명을 향수할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한 문화와 문명의 혜택 아래서 학업과 학문에 힘쓰는 일이 가능한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입니다.
농민들이 살 길을 찾아줘야.
임시방편으로 넘길 일이 아닌 것이 농업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높은 정책을 세워 우리 민족의 뿌리인 농민들이 살 길을 찾아주는 것이 다산의 뜻에 부응하는 일이 아닐까요.
총칼로 죽여야만 살인인가.
‘사람을 죽인다’에 대한 다산의 해석이 정말 멋집니다. 총칼이나 사형을 통한 살인이 아니라 “왕정을 행하지 않아 풍년에는 검소할 줄 모르고, 흉년에는 양식을 풀줄을 모르는 것이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것이다” “정전법井田法을 행할 줄 몰라 위로는 부모를 섬길 수 없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양육시킬 수 없게 함이 살인을 즐기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기에 이릅니다.
전쟁이나 형벌로 살인하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풍년과 흉년에 대처할 경제정책, 백성 먹여 살릴 경제정책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사람 죽이기를 즐김’이라는 다산의 경고를 오늘의 위정자들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행동과 실천.
다산의 사상을 추적해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행동이 없고 실천이 없으면 어떤 논리나 철학도 성립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행하고 실천해야만 어떤 개념이 세워지고 성립되기 때문에 그의 학문을 통칭해서 ‘실학’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마음속에만 두고 있는 사람들,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들, 다산으로 돌아가 행동하고 실천해야만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산이 하고 싶던 진짜 개혁.
주자 이후의 성리학자들이 매몰된 관념의 세계, 즉 이理라는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경험의 바탕으로 사유의 틀을 변화시키자 는 것이었습니다.
정치를 하건, 기업을 하건, 학문을 하건 생각의 틀을 바꾸는 일이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임을 다산에게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정치란 무엇이냐.
“정치란 바르게 함이자, 우리 백성들이 고르게 살도록 해주는 일이다…” “누구는 토지를 많이 소유하여 부유하게 살고 누구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해 가난하게 사는 거냐. 고르게 소유하는 제도를 만들어 고르게 소유하게 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고 토지를 많이 갖는 것을 바르게 고쳐주는 일이 정치다”라고 분명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치에 바름正이 없고 균분均分이 없으면 그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큰 정치를 해야 하는데.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에게 두 가지의 큰 정치가 있으니 하나는 ‘용인用人(인재등용)’이고, 둘은 ‘이재理財(경제정책)’다. 무릇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 큰 욕심이 둘이니 하나는 ‘귀’요, 둘은 ‘부’다. 위에 있는 사람은 귀해지려는 욕구가 있고 아랫사람은 부해지려는 욕구가 있다”라고 설명하여, 인재등용을 제대로 해야 백성들의 마음에 위배되지 않고, 나라의 재정관리와 세금징수에서 민심에 위배되지 않아야 인심과 “물정이 평윤해지고 나라가 평안해진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용인’과 ‘이재’, 이렇게 해놓고 어떻게 중심衆心(백성들의 인심)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답답합니다.
붕당의 엄청난 폐해.
“대저 붕당이 갈라진 이후로의 문자의 대부분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들이 이와 같습니다”
#용인편_사람을 이해하고 아껴라
인재 등용의 원칙.
통치자의 가장 큰 덕목의 하나는 가장 적합한 인재를 가장 합당한 자리에서 일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사는 만사다’라고 말해지는 것입니다.
‘인사가 망사亡事’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다산의 『인재책』은 지도자들이 꼭 읽어야할 필독서입니다.
속된 선비와 참된 선비.
선비란 역시 지식인에 속하지만, 그냥 책이나 읽고 문장에나 힘쓰는 선비여서는 안 되고 세상을 바르게 만들고 백성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선비가 참 선비라는 말입니다. 글자나 배워 세상 사람들이나 속여먹고, 지도자라는 위치에 올라 온갖 잔꾀를 부리며 억지로 자신의 지위나 유지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자들은 절대로 선비라는 호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다산의 뜻이었습니다.
정치의 목표는 용인과 이재로 풀어야.
아랫 사람을 어떻게 단속할까.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수령이 바르게 임무를 수행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가장 큰 핵심은 자기 부하들이 아전들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의 여하에 달려 있다고 명활하게 밝혔습니다.
‘자기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제대로 행해지고, 제 몸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일이 행해지지 않는다’
#교우편_사람을 사귈 때 진심을 다하라
초의에게 당부한다.
세상에 유명한 스님으로 초의선사를 능가할 분이 누구일까 할 정도로 유명. 차 문화와 연결되면서 초의선사의 이름이 정말로 높고 높습니다. 이러한 초의선사는 바로 다산선생의 제자였습니다.
“시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본디 야비하고 더러우면 억지로 밝고 고상한 말을 하여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이 본디편협하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하여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않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려는 것과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초의에게 준 시론은 참으로 멋졌습니다. 오늘날 모든 시인들, 다산의 시론에 귀 기울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