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도법. p267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이야기
그럴듯한 말과 폼은 있는데 그럴듯한 삶은 있지 않았다. 내 삶도 폼은 그럴듯했지만 내용은 한심했다. 경전과 어록에서 보고 배운 내용이 실제 선방 살림살이로 나타나는 경우를 거의 만날 수 없었다. 말은 멋지고 거룩한데, 거룩하고 멋진 삶은 보이지 않았다. 말과 생각이 일치하는 삶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진리의 사랑 길에서 꽃 한 송이를 주웠다. 그 꽃의 이름은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이다. 한 인간이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안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60여 년 동안 길을 걸어오면서 가꾸고 다듬어 온 내 사유의 총화이다.
길이 천 갈래 만 갈래 같지만 실상은 이 길 한 길이 있을 뿐이다.
스승들께서 말씀하셨다.”진리가 그대의 삶을 자유롭게 한다. 진리의 정신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 삶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하다” 예수의 말씀이다. “진리에 귀의하고 자신에 귀의하여 진리의 정신에 따라 주체적으로 동체대비의 삶을 살라. 그대의 삶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하다” 붓다의 설법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람을 하늘로 인정하고 존중하라. 저절로 자신이 하늘이 되고 그 삶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하다” 동학의 가르침이다. “내 생명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존재한다. 생명그물의 정신대로 내 생명을 존재하게 해주는 상대 생명을 존중, 배려하는 사랑의 삶을 살라. 그 자리에서 즉시 그대의 삶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하다” 현대 과학과 인디언들이 제시해 준 길이다.
알고 보니 내 삶이 내 삶이 아니었다? 나와 무관한 세상 삶도 존재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 여기 내 삶으로 숨 쉬고 있다. 미생물을 위시한 천지만물이 지금 여기 내 삶을 가꾸고 있다.
눈먼 봉사가 천방지축 좌충우돌로 길을 찾아 헤매며 만난 무수한 인연들의 도움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꽃 한 송이를 주운 셈이다. 그 꽃은 내 인생의 전 재산이요, 최고의 보배이다…길에서 주운 꽃인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은 내 삶의 오늘과 내일을 밝히는 등불이다.
#생명평화의 세계관과 철학
생명평화경.
상호의존성과 상호 변화성의 우주적 진리를 말하리니
생명평화의 벗들이여!
자연은 뭇 생명의 의지처이고,/ 뭇 생명은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공동체 존재이니라.
이웃 나라는우리나라의…/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국가 공동체이니라.
이웃 종교는 우리 종교의…/…종교 공동체이니라.
이웃 마을은 우리마을의…/…고향 공동체이니라.
이웃 가족은 우리 가족의…/…가족 공동체이니라.
그대는 내 생명의 어버이이시고/ 나는 그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공동체 생명이니라.
생명평화 로고 이야기
不一不二의 인드라망 세계관과 철학이고 그것을 형상화시킨 것이 생명평화 로고입니다.
#생명평화 인드라망의 눈으로 삶을 본다
십무익송(十無益頌)의 핵심은 보편적 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방향과 길을 모르고 수행을 하면 아무리 열심히 수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는 것. 가야할 목적지가 동쪽인데도 불구하고 서쪽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가는 것처럼 부질없는 헛수고일 뿐. 목적지를 모르면 출발을 할 수가 없다!
올바른 방향과 길이 없이 맹목적으로 수행을 하면 당사자의 의도나 바람과는 다르게 기복주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현대 문명이 끊임없이 인류의 바람을 짓밟고 생명 위기, 평화 위기의 자기모순을 확대 재생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찾고자 했던 문제의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지식(말, 관념)에 빠져 구체적 사실과 진실인 실상의 달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삶을 다루어 왔던 것입니다…도구로 사용해야 할 언어와 지식에 매몰되어 살기 때문에 끝없는 왜곡과 갈등과 혼란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 등 모두가 그물의 그물코처럼 따로이면서 함께이고, 함께이면서 따로입니다.
마땅히 실상대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실상과는 관계없이 따로만을 고집하거나 함께만을 고집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실상과 분리되고 분열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늘 지금 여기에서 직면한 실상대로 따로이면서 함께이고, 함께이면서 따로인 삶을 온전하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설일 것 없이 지금 바로,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기존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즉 전도몽상의 삶의 양식을 버리고, 색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언어와 지식을 도구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존재의 실상을 사실대로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하고 그 정신에 일치하도록 실천하는 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여기 한 송이 백합꽃이 있습니다. 그 꽃은 우주적 존재입니다. 꽃이 피려면 온 우주가 다 참여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거룩하고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한 신비의 기적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 기적, 신비입니다.
너나없이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와 왜곡된 이해와 인식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너무나 잘못된 길을 멀리 와버렸습니다. 늘 목전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가사의한 현상이 항상 펼쳐지고 있는데도 그 실상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신비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불가사의한 기적이, 거룩한 기적이 늘 펼쳐지고 있는데도 그 실상을 알지 못하고 뭔가 이상하고 특별한 것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소위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전도몽상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상호 의존성과 변화성의 보편적 진리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자연 세계라고 한다면 그 바탕에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인간의 사회입니다.
#생명평화의 수행관
일반적으로 분별이 또 분별을 낳고 논리가 또 논리를 낳는 삶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비분별을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므로 또다시 시비분별하게 되고,…악순환이 거듭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보편적 진리인 구체적 사실과 진실에 근거한 올바른 이론이 없이 실천을 하거나 이론만 분분할 뿐 실천이 없기 때문입니다…결국 방향을 잘못 잡아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평화 수행
언어를 잘못 사용하면 삶의 문제가 더 꼬이게 됩니다. 그러니 자꾸 말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입은 재앙의 문’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어는 매우 위험한 도구입니다. 따라서 조심조심 잘 다루어야 합니다.
진실?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이것이라 말하고, 저것을 저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조작도 없이…언어를 실사구시적으로.
생명평화 탁발순례의 길…우리 삶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따로이면서 함께, 함께이면서 따로, 홀로이면서 전체, 전체이면서 홀로 살도록 이루어졌습니다.
삶의 올바른 방향과 길을 따라 걸어가면 가는 만큼 삶의 문제가 풀리고 우리의 바람이 실현되지만, 그릇된 삶의 방향과 길을 따라 걸어가면 갈수록 문제가 꼬이고 우리의 바람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물처럼…세계는 본래 그물의 그물코처럼 불일불이의 생명 공동체입니다. 세계가 마치 살아 있는 그물이라며 낱낱 존재들은 그물코와 같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그 안에 있는 진리의 길을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길이 참된 삶의 길이요, 희망의 길입니다.
#백대서원 절 명상 수행
절명상10. 소유는 또 다른 소유를 낳을 뿐 문제의 해결의 길이 될 수 없는 세상 이치를 생각하며 절을 올립니다.
100. 내가 밝힌 생명평화의 등불로 온 누리의 생명들이 진정으로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발원하며 절을 올립니다
“뜻, 내용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은 세상 이치에 맞습니다. 사실과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하지만 “농자천하지대본”의 삶을 살지 않으면서 그 말을 하는 것은 말이 참되지 않은 것입니다.
인식의 차이가 생기는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주체적인 진리의 눈으로 문제의 실상을 제대로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여기 꽃 한송이가 있습니다. 꽃을 본 사람들이 각기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꽃 자체를 꽃의 입장에서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색안경을 쓰고 주관적으로 보고 느끼는 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꽃의 실상을 사실대로 보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느낀 대로 말합니다. 삶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사실대로 보고 말하지 않고 자기 주관으로 보고 느낀 것을 말하게 되면 내용이 왜곡됨은 물론 서로간의 모순과 혼란, 갈등과 불신을 낳게 됩니다.
불교의 실천론은 팔정도. 팔정도를 정리하면 마음의 실천, 언어의 실천, 몸의 실천이 됩니다. 삼업수행, 삼업실천입니다. 삶이란 끊임없는 실천과 체험의 연속입니다.
수행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진리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고의 습관을 바꾸고 언어의 습관을 바꾸고 몸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 수행의 전부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수행이고 어디에서도 가능한 것이 수행입니다.
가까이 함께하는 사람들한테 인색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멀리 있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잘 돕는데, 왜 가까이 있는 동료나 식구들은 사랑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사구시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아프리카 사람하고 나는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아무런 막힘 없이 마음이 금방 갑니다. 그에 반해 가까운 곳의 사람하고는 이해관계에 막혀 금방 마음이 잘 안 가게 됩니다.
부처님 같은 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부처님은 성찰의 눈뜸 즉 중도적으로 삶의 다루어 가기 때문에 우리처럼 사람 관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더라도 본인이 상처를 안 받음은 물론 문제도 침착하게 다루어 갑니다. 일이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스스로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체적인 힘이 부족합니다.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 상처를 잘 주고, 상처를 잘 주는 사람이 상처를 잘 받습니다. 스스로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주지 않을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이 없는 것입니다…상처받을 만한 내용이 아닌 데도 상처를 받는다면 그것은 상처받는 당사자가 주체적으로 힘을 길러 해결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