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편지. 황대권. p287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야생초 관찰일기이지만, 실은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한 젊은이가 타율과 감시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던 생명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감옥 마당에서 무참히 뽑혀 나가는 야생초를 보며 나의 처지가 그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밟아도 밟아도 다시 살아나는 야생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닮고자 하였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잡초’이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무진장한 보물을 보며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신뢰하게 되었다.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기술이지만,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하여 모든 생명은 본질적으로 같으며, 그것이 아무리 하찮아 보일지라도 이 우주에 하나뿐이라는 생명의 동질성과 소중함을 읽어 주길 바란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 생태주의적 시각이 널리 확산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이겠다.
풀 향기 가득한 식물일기이고 생명일기이며, 감옥에서도 자유로운 한 구도자의 사색일기, 수련일기라고 여겨집니다-이해인 수녀
행동의 자유가 없는 감옥? 생각의 자유가 없는 바깥 세상!
“토종이 사라진 사회, 토종이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사회,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이라고 탄식하는 그의 고백을 들으면 진정 우리 주변의 들풀 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만이 생존 경쟁을 넘어서서 남을 무시하고 제 잘난 맛에 빠져 자연의 향기를 잃고 있다. 남과 나를 비교하여 나만이 옳고 잘났다고 뻐기는 인간들은 크고 작건 못생겼건 타고난 제 모습의 꽃만 피워 내는 야생초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이제 온몸으로 맛보며, 요리하며, 약으로 쓰며, 그림을 그리며, 급기야 자기까지 던져 버린 자연공부의 선배 덕에 내가 사는 들판을, 온 천지를 보물섬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딜 불러봐도 먹거리, 찻거리, 볼거리, 공부거리가 지천에 널려 있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안동교도소에서(92~93년)
[산과 들의 계절 식물]
#스타펠리아_자라고 영그는 데는 다 때가 있다
이놈을 옆에 놓고 매일 관찰하면서 느낀 게 있다. 세상 만물이 다 그렇겠지만 식물이 자라고 영그는 데는 다 떼가 있다는 것이지….자고 일어나 보면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싶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더러 아무리 공부해라 뭐해라 하고 부모가 야단을 친들, 때가 아니 되면 아무 소용이 없어. 아이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서 언젠가 자신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힘을 기다려 인내하고 있어야지. 조급한 마음에 이리저리 뛰어다녀 보아야 ‘치맛바람’ 밖에 더 되겠니? 또 그 억지야말로 아이를 죽이는 횡포가 아니고 무엇일까?
산에서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이 풀 무더기를 한 평만 떼어다 교도소 운동장으로 옮겨 놓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운동시간 내내 그 풀밭에 머리를 박고 지낼 수 있을 텐데…
들풀모듬
#모듬풀 물김치
자연상태에서 천지의 기를 듬뿍 받고 자라난 야생초를 십여 가지 뒤섞어 발효시킨 것이니, 밋밋한 배추 한 가지로 만든 것과 비교가 되겠니?
웬만한 것은 스스로 만들어 쓰는 것 좋아하는 사람? 소비를 미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 환영받지 못할 사람
#입안에서 살살 녹는 밤
그러구 보면 맛이란 것은 음식 자체라기보다 허기와 정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적당히 배가 고프고, 음식을 만드는 정성과 먹는 정성이 합쳐지면 어떤 음식이라도 맛이 있을 거라는 거지. 그러고 보면 젊은 시절 내가 집에 있을 적에 왜 그리 밥을 먹기 싫어했는지 이해가 간다. 먹을 것 귀한 줄 모르고 마음이 닫혀 있으면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몸에 좋은 산야초] 석오 출판사
## 안동교도소에서(94년)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무릇 정성과 열심은 무언가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만약 내가 온갖 풀이 무성한 수풀 가운데 싶고 있는 데도 이런 정성과 열심을 낼 수 있었을까? 이런 점에서 삭막한 교도소에서 만나는 상처투성이 야생초들은 나의 삶을 픙요롭게 가꾸어 주는 귀중한 ‘옥중 동지’가 아닐 수 없다.
#끈기를 가지고 행하되 조화와 균형 속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한 번으로는 대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대상을 아무리 수십 수백 번 들어다보아도 직접 그려 보지 않고는 제대로 파악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한 번 그려 봐서는 부족하다. 두번 세번 그려 보면 처음 그린 것이 얼마나 허술하고 엉성한 것인지 알게 되지.
디테일과 전체와의 조화? 디테일이 모여 전체적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디테일은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아니 애초에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디테일을 그려 나가야 한다.
첫째, 실천의 중요성, 실천을 하되 지속성이 있어야 할 것. 둘째, 어떤 일을 할 적엔 반드시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그 일을 추진할 것.
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실제로 하지는 않으면서 머릿속으로 쌓고 부수고 쌓고 부수고, 입으로 나불나불 대다가 세월만 보내었던가! 어떤 것이 좋아 보인다고 앞뒤 헤아리지 않고 그것에만 탐닉하고 좇아 다녔던가!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저 작은 꽃을 피워 내기 위하여, 화단 구석의 내밀한 공간 속에서 의젓하게 자리하기 위하여 쉼없이 움직이고 있는 주름잎의 내면을 그려 본다.
우리가 식탁 위의 자연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무슨 색다른 맛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인공적 조작에 의해 잃어버린 자연 그대로의 입맛을 되찾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과의 합일에 한 걸은 더 나아가자는 것이지.
기존의 야채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야생초의 풀 냄새가 역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싱싱하게 무쳐 낸 야생초의 냄새를 맡아 보고는 어쩌면 야만의 시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럴거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그런 풀들은 먹고 살았다. 문명이란 그 풀 냄새를 점차로 지워 없앤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야채가 그것이지. 야생의 풀 냄새를 제거하고 인간이 미각에 맞추어 특정한 맛만을 선택하여 육종, 발전시킨 것이 오늘의 야채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얄팍한 입맛을 위하여 원래 야채가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영양소와 맛을 제거해 버리고 특정한 맛과 영양소만 취하게 된 것이다. 그래 놓고 요리할 땐 그 위에 갖은 양념을 다 뿌리고도 또 영양을 보충한다고 각종 비타민제를 따로 먹고 있다. 우습지 않니. 이것이 문명이다!
전체와 분리된 요소는 제한적인 가치를 지닐 수 밖에 없다. 채소는 채소를 둘러싼 생태와 온전히 결합되어 있어야 하고, 그 채소를 먹을 때에도 요소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식주의자들은 되도록 전체식을 권장하는 것이다. 머리부터 뿌리까지 전체를 통째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지.
명아주 지팡이? 청려장! 노인성 질환에 시달리는 노인들의 아주 좋은 반려자
#나팔꽃 명상
새로 발견하게 된 조그만 신비? 이런 것을 보면 징역이란 깨달음의 장소이기도 하다.
꽃에 대한 염원? 얼마나 정성스럽게 꽃에다 염파를 보내느냐이지
늦가을의 기막힌 색의 대비! 나는 숨을 고르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가 오히려 숨을 죽이고 말았다.
#무위에 의한 학습
전에 몰랐던 테크닉이 저절로 구사되기도 하고 아무리 애써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색깔이 어느덧 만들어지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실제로는 그리지 않고 있었어도, 관념 속에서 또 손안에서 그림 그리기는 계속되고 있었던 거다.
명작?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 일구어 낸 거품같은 것이다
#관찰력
그림 그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
관찰하는 데 있어 시간은 별로 중요한 변수가 못된다. 관찰력이 탁월한 사람은 암 리 짧은 시간이 주어져도 단번에 대상의 특징과 디테일을 잡아낸다(아는 만큼 보인다)
#사람을 생긴 그대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사물이 어떠해야 된다는 생각에 매달리기보다 그들은 복되게도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여여)
평화는 상대방이 내 뜻대로 되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그만 둘 때이며
행복은 그러한 마음이 위로받을 때이며
기쁨은 비워진 두 마음이 부딪힐 때이다.
#뿌리내리기_녹색평론 창간 10주년 기념모임 연설, 2001년 12월 8일 대구 카톨릭근로자회관
내 인생의 책?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카스트로의 책,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농업의 산업화, 생물종 다양성의 파괴
잡초? 잡스러운 풀, 원치 않는 장소에 난 모든 풀들, 잘못된 자리에 난 잘못된 풀? 이것은 풀에 대한 철저히 인간 중심주의적인 정의입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농약으로 잡초 제거를 한 결과!
농약을 뿌리는 농사, 단작에 의한 농사 때문, 이것은 거대한 사회시스템, 즉 자본주의 시스템과 맞물려 있습니다
슈퍼마켓의 엄청난 상품종류? 식품가공산업이 발달한 것이지 작물의 종이 늘어난 게 아니다!
녹색혁명, 다수확 품종 씨앗
들어오기는 낱알 하나였지만 선진국에서 만든 거대한 사회시스템이 다 들어갑니다? (씨앗-농약,비료-물 많이 먹는 다수확품종 관개수 필요-대규모 농기계…..)
잡초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인간과 다른 생물종이 동등하다, 다른 생물종들도 고귀한 가치를 갖고 있다! (잡초는 없다)
잡초를 싹 죽여버리고, 그 자리에 희말건 야채만 키우는 농업! 이것은 아주 낯익은 사고방식입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제3세계를 침략할 때 바로 똑같은 방법을 썼어요. 자기네 문명이 가장 선진적이고 인간적이고 민주적이고 인간의 문명이 가야할 방향이다. 이렇게 정의해 놓고 나머지 제3세계 문명들에는 방금 말한 잡초처럼 모든 나쁜 품성들을 다 붙여 놓았습니다.
제초제를 쓰는 농업=생태학적 제국주의
어째서 잡초입이까. 그래서 저는 잡초라는 말을 안 씁니다. 대신에 야초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잡초는 그 가치가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풀이다.”-에머슨
산업화된 생활용품들(석유제품), 새끼줄 대신 나일론 끈, 초가지붕 대신 양철지붕,…야초를 활용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다수확 품종 통일벼? 엄청난 외부투입 필요, 따지고 보면 소출이 많이 난 건 아무 것도 아니다!(머리만 커서 바람만 불면 쓰러진다, 완전히 세상이 가분수로 되어버린 것이죠!)
야초가 쓸데없이 그 자리에 난 건 하나도 없어요. 다 자연이, 그 땅이 필요해서 야초를 그 자리에 키우는 것이죠.(하나님은 쓸데없는 건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
풀도 다 뽑아 버리고 맨땅이 드러나게…무식한 놈이 용감하다고 지금 그런 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마을공동체와 생태주의
제3세계 혁명 연구 결과?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오직 공동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마을)공동체야말로 막강한 제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사회구조!!!
감독이라는 특수한 상황? 자기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재인식 경험
‘몸으로 깨달은 심층생태주의자’란 말은 절반의 진실? 경험 + 녹색평론 (창간 독자!!)
몸의 깨달음, 몸의 확장
생태주의자는 자기 몸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것에 둘러싸여 자기 몸을 관찰할 기회가 없어요. 너무 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있어 자기 몸이 어떻게 되어 먹은 지도 모릅니다. 저는 참 운이 좋게도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됐어요.
한 평짜리 방안에서 내가 우주구나, 그것을 깨달으면서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달라 보이게 됩니다.(전일적, 우주적인 생태적 사고방식)
감옥에서는 자기 글을 써서 가지고 있지를 못합니다. 나갈 때 다 빼앗겨요.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게되면 그것을 편지형식으로 기록해서 밖으로 내보냅니다!
야생초와 더불어 짓는 농사
4무의 자연농업(무경운,무제초,무농약,무비료)
마지막으로 제가 이점으로 들고 싶은 것은, 야생초와 함께 농사를 짓게 되면 자연과 공생하면서 조화롭게 살 수 있다, 즉 자기 삶의 총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생태주의 운동을 복잡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생태주의 운동을 삶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삶의 조건인 식물, 자연, 이것과 공생할 수 있고 일치할 수 있으면 이것이 생태주의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가장 손쉬운 재료가 야초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농업을 상업주의에서 해방시키자
WTO체제, 대규모화된 기업농, 우리 같은 나라들은 WTO 체제에서 기존의 농사방식을 가지고는 버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참 좋은 기회? 틈새는 일부 농민들이나 혜택, 전반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이것이 오히려 대안적인 농업으로 가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지역)공동체 회복 필요
“농업문제는 자기자신이 해결한다.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책임진다.” 앞으로 방법이란 이것밖에 없다고 봅니다. 농업을 상업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합니다.
자연농법으로 세계를 구원하자? 후쿠오카 마사노부와 같은 시기에 자연농법 창안한 모키치 오카다의 ‘세계구세교’
야생초는 단순한 풀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여는 상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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