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 황주환. p313
#서서히 그러나 격렬하게, 나는 변해왔다
그 아이에게 학교란 어떤 곳이었을까?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 아이에게 학교란 다시 오고 싶은 곳이었을까? 물어보지 않았다. 왜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학생은 당연히 학교에 와야 하고 그래야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인데, 그 아이는 방향을 잃고 옆길로 빠졌다고만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 아이가 정상적으로 학교로 돌아오게 하려는, 딱 거기까지가 내 생각의 전부였다.
오랜 가난과 절망으로 무기력에 빠진 아이에게 학교는 돌아올 만한 곳이었을까. 자시 삶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하는 교과서와 수업, 밤 10시까지 딱딱한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자율학습, 조금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 규율의 감옥에서, 그렇게 삶 자체가 버거운 아이에게 학교는 어떤 곳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나는 그때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과 겉돌기만 하는 학교만의 문법에 아이는 돌아오고 싶어 했을까. 그 아이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이의 입장에서 학교가 어떤 곳이었을까, 한 번도 질문해보지 못했다.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학교란 좋은 곳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말한들, 아이들에게 학교란 절대로 그렇지 않은데 어쩌겠는가! 학교를 졸업한 우리의 기억에, 학교는 언제나 아름다운 풍경으로 채색되어 있어야 한다. 학교의 현실을 너무나 가혹하지만 배움과 우정의 아름다움으로만 기억되기를, 그리고 고통과 모멸마저도 추억에 기대어 아름답게 윤색되기를 요구한다. 누군가가 자기 이익을 위해 이 거대한 거짓이 유지되기를 강요하고 있다.
이 책은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의 개정 증보판이다…사태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 책의 유효기간을 연장하고 싶었고, 또 변하지 않은 교육현실에 교사로서 죄스러울 따름이다.
한국사회의 모순 역시 대중 스스로 만든 것임을 말하고 싶었다. 그 중심에 교육이 있어왔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노예의 품성이었고, 교사가 된 내가 또 다른 노예를 제작하고 있었음을, 학교에 오래 있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이 사태를 뒤늦게 깨달은 현장 교사의 고백이다.
사람들은 대안이 뭐냐고 묻는다. 해결책을 말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고통은 답이 없어서가 아니다. 답은 이미 곳곳에 있다. 단지 타인이 전해준 답은,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가볍게 흩어져 버린다.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면 불 속에 손가락을 넣지 않듯이, 고통의 이유를 알면 벗어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언어로 지금의 이 고통을 정확하게 묻는 것이다. 물음이 정확하면 답도 정확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래서 질문이다.
이 책이 껄끄러운 독자가 있다면, 내 글이 일정 부분 성공한 것으로 여기겠다. 불편하지 않은 독서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편한 질문을 시작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수히 많다.
질문 없는 학교, 우리 사회의 축약판
#학교의 거짓말, 인성
학생에게 학교의 첫째 존재이유는 석차다. 다른 것은 부차적이다. 이 석차경쟁을 위해 다른 많은 것을 포기했다. 자기를 느낄 시간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길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가 바쁘지 않은가.
학생 인성이 타락해서 교육이 안 된다지만, 사실은 학교가 인성으로 내세운 복종과 규율이 학생의 일탈을 촉발해온 것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교사와 교육관료는 사태의 결과를 사태의 원인으로 뒤바꾸어 말하는 것으로 면죄부를 얻고자 한다.
인성진흥법이 핵심가치로 삼는 저 아름다운 말들이 학교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육될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숨이 탁탁 막힌다…가장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인간풍성조차 이게 국가가 교육하겠다는 발상에 놀라울 따름이다.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학력향상을 최우선 정책에 두고 학업성취도평가(일제고사)를 강제하던 교육부가 이제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도 강제하겠다는 이 상황은 모순적이다…한국사회와 학교의 모순을 성찰하지 않고 학생에게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요구하는 것은 분열적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단체관람. 몇몇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때 나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무감함이야말로 도덕과 윤리의 파탄이라 생각했다…타인의 고통과 파멸을 단지 타인의 것으로만 격리하는 무감함이 바로 인성의 타락이고, 이는 단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학교를 벗어나면 아이들을 생기가 돈다. 평소 무기력하게 있던 아이들이 야영장 무대에서 눈부신 몸짓을 발산한다. 존재감 없던 아이들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동한다…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자기를 온전히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학교의 거짓, 공부
‘열심히 공부해야 성공하고 삶이 행복하다’ “이렇게 공부하면 전문대밖에 못 간다!” “전문대 가면 어때서요?”
우리는 무한순서경쟁을 공부로 여기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 오직 입시문제만 있을 뿐이다…이 가운데 모두가 말하는 공교육 부실이란 인간교육의 부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과 경쟁하지 못한다는 비난일 뿐이다.
교사들이 더 열심히 가르치기만 하면 사교육이 줄어들 것이라는 진단이야말로 한국교육에 무지한 것이다
특이한 현상은 학력보다 더 큰 차별의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서 배웠느냐’에 따른 것, ‘학벌’이다. 『학벌 사회』
“아이고,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더 했어야 했는데…” 라며 탄식했다…학교의 석차경쟁은 ‘지금 노동의 몫’을 못 보게 한다는 점에서 소수 승자의 독식과 대중의 억압을 상식으로 여기게 하는, 아주 효율적인 이데올로기다. 즉 대중의 사회노동을 대중 스스로 무가치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의식화 과정이기도 하다.
다른 세상을 아는 것이 변혁의 시작이다. 우리 고통의 진짜 이유를 알고 다른 세상도 있다는 것을 알면, 변화는 자연스레 일어난다.
그래서 지금의 교육제도 때문에 고통 받는 대중의 각성 없이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사회변혁은 고통 받는 대중의 각성된 힘으로만 가능하다. 누가 대신 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 대중의 의식을 통제하는 것도, 반대로 깨치는 것도 교육이다. 교육은 억압과 해방 모두 가능한, 양날의 칼이다.
#학교의 거짓말, 가난
내가 근무하는 이 읍은 가난하다…살펴보면 아이의 고통은 아이의 책임이 아니다…어쩌면 이 아이들에게 한국사회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게임인지도 모른다. 해외유학이나 영어연수는 상상조차 못하고, 개인과외도 사치인 아이들은 의사, 변호사, 대기업 입사 같은 희망은 처음부터 갖지도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교육문제는 누구나 비판하는 동네북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교육해법은 가난과 노동임금 구조의 개선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어느 사회나 교육이란 먹고사는 투쟁이지만, 한국사회는 학력과 학벌에 따른 지나친 노동임금 차별이 학교 경쟁을 증폭시켰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교육문제, 아니 입시문제는 부와 권력의 배분방식을 바꾸지 않고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런 차별은 해결하거나 완화하지 않은 채 대학입시 변화로 경쟁교육을 해결하겠다는 것은 한갓 헛소리에 불과하다…교육은 이미 교육의 차원에서 개혁할 수 없다. 교육개혁은 당연히 정치의 영역이 된다.
좀 투박하게 말해서, 우리 사회의 숱한 ‘상것들의 천한 일들’이 제 몫을 찾는다면, 지금처럼 목숨을 건 경쟁교육은 완화될 것이다.
부모의 능력에 따라 아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공정한 사회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엔 항상 자기 몫의 가감이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문제는 계급문제가 된다.
교육정책을 이끈 정치인과 교육관료들은 명확히 알고 있다. 그들은 대중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안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질문이 우리의 길을 만들 것이다.(여럿이 함께하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
#나도 맞았고, 나도 때렸다
아이의 고통은 온전히 바라볼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엄격한 체벌 규정? 매를 들고 때리겠다는 교사에게 아이가 할 수 있는 해명은 어떤 것일까. 그것 역시 나만의 규정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둔하게도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폭력은 학교에서만 시작되지 않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기술이듯 사랑도 기술이라며 사랑에 대한 지식과 노력을 줄곧 강조한다.
문제 학생은 없다. 단지 문제 부모가 있고, 덧붙여 문제 교사가 있을 따름이다. 죄는 우리 어른들이 지었다.
#학교폭력만 비난하는 그들에게
오늘날 학교폭력은 한국사회의 폭력이 밀려들어온 것뿐이다. 자본과 권력의 폭력이 일상화된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이 병든 것은 아이들의 책임이 아니다…쌍용자동차 노동자, 용산참사….그런데도 한국사회의 그 폭력에는 무감한 채 단지 학교폭력에만 분노하는 그들이야말로 위선적이고 무지하다고, 지금 나는 말하는 것이다. 학교폭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손톱만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도, 그것을 승자의 특권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학교폭력은 더 이상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과 권력의 확장을 위해 한국사회에 폭력을 자행하는 ‘그들’이 바로 학교폭력의 진원지다.
학교에 오래 있으며 내가 깨달은 것은 내 아이만 앞설 거라는 이 헛된 기대 때문에 우리 모두 피폐해졌다는 것이다. 내 아이가 성적 경쟁에서 이기면 세상 고통과 무관할거라는 믿음은 헛되고 헛되다. 경쟁교육은 처음부터 출구가 없었기에, 내 아이의 고통만 해결되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학교 밖을 덜 지옥’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때의 석차’보다 ‘사회노동’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이 경쟁교육의 압력을 줄일 수 있다. 즉 노동임금이 정직한 사회를 외면한 어떤 교육 개혁도 성공할 수 없듯이, 폭력사회의 해법 없이 학교폭력의 해법도 없다. 각종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왜 교육문제와 연관되는지 깊이 생각해보자.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마라’는 그들 교사에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이 ‘세상 바꿀 필요가 없는 시대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전에,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이며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향해 힘껏 밀고 올라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선거는 끝났지만…아무 일도 없었다
매년 총학생회 선거. 표를 얻기 위한 불가능한 공약. 새로운 대표 결정되었다는 것 외에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행사가 무척 불편하다.
왜냐하면 학생회장 선거는 민주주의의 무력함을 학습시키는, 가장 나쁜 교육이기 때문이다.
#교사와 학부모는 왜 맨얼굴로 만나지 못할까
“당신 돈 얼마 받았어?” 그 학부모는 왜 교육청에 먼저 말했을까?
#지금 이곳의 세월호를 말하라
‘가만히 있어라’. 설문조사 서명. 서명지는 깨끗해야 하고 교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학생의 자세라고, 그 담임교사도 자기 믿음으로 훈시했을 테다.
질문 없는 사회, 우리 학교의 확장판
#이 세상에 질문하는 몇 가지 방법
이것은 누구의 언어인가? 정부정책 반대 집회 화면 문구, “배려가 있는 주장은 아름답습니다” 누가 누구를 위한 배려?
이것은 어떻게 발생한 언어인가? 이것은 현실의 언어인가? 언어의 해방 없이 현실의 해방이 가능한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중립적이다’라는 것은 명백한 허구. 일상의 언어가 이미 정치적 재현이기에, 세계 자체가 정치적이고 편향적이다.
여기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은 무지다.
#이 교과서를 만든 그들은 누구인가?
정치의 바깥은 없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정치적 이익에 따른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을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자기의 이익과 반대되는 선택을 서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사립학교 개정’ 사태를 다시 살펴보자…많은 국민들이 이에 동조했다…이 모든 일들이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진 정치투쟁이었다.
자기 이익을 표현할 자기 언어를 배운 적이 없다
자기의 계급적 위치가 노동자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은 이해되지 않는 물음일 뿐이다. 자신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본의 논리만을 내면화한 사람에게, 자신의 정치적 계산법이 무엇이냐고 왜 자기 이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느냐고 묻는 것은 그래서 공허하다. 대중은 자기 이익을 표현할 자신들의 언어를 배운 적이 없다. 사립학교법, 세금,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동자, 파업, 계급, 자본, 국가, 인권 등 이런 언어의 실체와 사용법, 즉 이들 언어의 정치적 의미를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던가?
자기의 언어를 익히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타인의 언어로만 생각할 뿐이고, 타인의 언어로는 결코 자기 이익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욕망을 내 것으로 학습받아왔다. 그래서 ‘나’의 정치적 이익을 배반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누군가 의도하는 대로 정치문맹으로 남게 되었다. 극진한 자비를 베풀 위대한 지도자 타령을 반복할 뿐, 스스로 찾아보고 생각하고 참여하는 정치의식은 부족하다. 권력의 언어를 암송하며 ‘모범학생-착한 국민’이 되었다.
모든 교사는 정치적이다
학교는 중립성을 가장하지만, 사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선별적으로 주입하고 강요하고 제어해왔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학생은 자기의 생각과 언어를 금지 당한다는 점에서 학교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다. 살펴보면 학교란 원래 그런 목적으로 생긴 것이다. 근대교육의 발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맞는 노동력 공급에서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타인의 언어를 자기 언어로 주입받아온 대중이 자기 이익을 계산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교사는 젊은 브레히트가 그랬던 것처럼, 질문하는 법을 잊어서도 안 되고 질문하기를 멈추어서도 안 되는 것이리라.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베르톨트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는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나와 있다네.
왕들이 바위 덩어리를 끌어 날랐는가?
…
너무나 많은 이야기.
그만큼 많은 의문.(1939년)
연일 시위를 벌이자, 그들은 사태를 조금 심각하게 여기는 듯했다. 권력은 부드러운 사람에게는 징그럽게 날뛰지만, 힘 앞에서는 온순해지고 비굴해지기까지 한다. 권력은 대화하지 않는다. 권력은 권력과만 협상할 뿐이다.
현실을 왜곡하는 온갖 수치와 그래프. 전문가들은 거짓 지식을 당당하게 팔아먹는다. 교육청은 주민을 내세워 다른 주민을 제어하려는 분할지배를 구사. 눈곱만한 이익을 선취하기 위해 이웃을 배제하는 그들을 보며, 이 땅의 숱한 억압과 모멸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듯했다.
세상을 바꾼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몸을 움직인 소수가 세상을 변화시켰지만, 그 열매는 모두가 누려왔다…그들 냉소하는 사람들이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는 자들이기에, 그들에게 기대할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아름다운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언어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말의 의미란 “쓰임의 문제”라 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언어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에 의해 규정된다. 현실 맥락없이 사용하는 아름다운 말은 아름다움의 실현이 아니다. 학교는 언제나 아름다운 말로 가득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슬펐다…아름다운 말로 현실을 은폐하는 학교장은 그렇다 하더라도, 평소 그의 독단에 불만인 교사들마저 왜 그 말을 따라하는 것일까. 교사들은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아름다운 말만 사용하고 있었다. 급식은 엉망이 되고 교실 난방이 되지 않아도, “웃어야 행복합니다!”, “우리 모두 사랑해야죠!”라며 부드럽고 나긋한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교언영색. 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다운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질문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해서 구하지 않은 답은 결코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타인이 전해준 답은 튀는 물방울처럼 쉽게 부서진다.
알게 되면 ‘손가락 끝 투표’만으로도 세상을 바꾼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각성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래서 질문이다.
예전의 지배권력은 폭력과 형벌 같은 물리적 방법으로 대중을 지배했기에, 대중은 자신이 지배받는다고 선명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대중은 선거권을 행사한 자신이 권력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지배당한다. 단지 지배의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자본과 정치의 지배권력은 그들 지배를 지속하기 위해,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규정하고 교육을 통하여 대중에게 스며들게 한다. 지배계급의 의식은 교육, 미디어, 법제도, 대중문화, 종교 등을 통해서 대중에게 올바른 것으로 이식된다. 그 지배계급의 의식이 대중에게 교육되고 주입될수록 그것은 상식이 되고, 대중은 그 상식을 따르는 것으로 결국 지배에 동의하게 된다.
오늘날 지배는 철저히 대중의 동의에 의해, 즉 대중의 자발적 복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이 이론이다.
학생들이 자기 권리를 자각할까봐, 학생들이 자기의 언어를 되찾고 노예에서 해방될까봐 두려운 것이다…특히 교사는 자기가 지배의 언어를 가르치고 있음을 모른채 가르침으로써. 한국사회의 억압과 모순에 중대한 역할을 수행해왔다…정치권력에 눌리며 내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껏 내가 학교에서 익혔던 것들이 사실은 노예의 품성이었고, 그렇게 노예가 된 내가 또 다른 노예를 제작했음을,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깨달았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하나를 변혁하려는 투쟁은 모든 것을 변혁하려는 총체적 투쟁과 엮일 수밖에 없다고 통찰했듯이, 한 명의 학생을 변화시키는 것이 세상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의식변혁과 사회구조 변혁은 하나”라는 그의 지적처럼, 교사의 의식이 변할 때 한국사회는 크게 변할 것이다.
삶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불온한 책 읽기
#책 읽기에 대한 짧은 생각
독서는 지금 ‘나-세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 독서는 자신이 익숙하게 여겨왔던 것들, 자기의 관성에 대해 끊임없는 저항과 전복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기존의 ‘나’가 허물어지고 다시 내 ‘몸’이 재구성되는 고통을 수반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독서는 무의미하다. 모든 독서는 급진적이고 불온해야 한다.
살펴보면 세상의 위대한 것들은 모두 불온했다. 예수도, 갈릴레이도, 마르크스도, 전태일도 모두 그러한 자들이었으니, 바로 그들을 통해 시대의 핵심이 드러났다. 불온한 책, 불온한 사상, 불온한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통찰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거짓 세상이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래서 당신의 세상은 아름답고, 당신의 삶을 행복한가? 아름답지 않는 세상에, 아름다운 말로만 쓰인 책은 모두 쓰레기다. 거짓 세상에서는 불온한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학교 바깥에 있었다. 학교에서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 시대의 불온을 읽는, 이것이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