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고 더불어. 신영복과의 대화. p353
모든 변혁 운동의 뿌리는그 사회의 모순 구조 속에 있습니다.
사회의 변혁은 아시는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물적 토대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그 실천 운동의 시작과 끝은 상부구조의 사상·문화 운동에 의해 조직되고 마무리됩니다.
사회의 변혁 과정은 최고의 예술 창작 과정이라는 점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유연한 예술성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말이지요.
정보에만 매몰될 경우 매우 위험한 사고의 피동성에 빠질 수 있기 때문. 현상과 본질이 동일한 것이라면 과학이 설 자리가 없다고들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읽는 관점은 감옥이든 여행이든 견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작은 것은 그것이 정말 작은 것일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나고 있을 뿐임을 잊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의사 결정… 그러나 시장은 동시에 모순의 현장입니다. 교환의 현장. 교환 당사자의 모순이 만나는 곳이 그곳인 것도 사실입니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이 집중되는 구조가 바로 시장입니다. 특히 이 점과 관련하여 시장이 결코 평등한 공간이 아니라는 데에 그것에 대한 거부의 이유가 있습니다.
주체와 개방.
북한의 경우에는 주체성을 강화하면서 오히려 고립과 정체를 면치 못했다면, 남한의 경우는 개방을 통해서 문화적·물질적으로 성장한 반면에 민족의 주체성을 잃고 종속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남북이 화(和)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 공존과 평화 구조를 만들어 낸다면 이러한 두 개의 축을 적절히 구사하는 민족 전략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과정은 민족사적 과제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문명사적 과제와 연결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발(發) 대안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상주의에 대하여 경계하는 이유는 이상적인 모델을 미리 상정하고 그 모델로부터 실천을 받아 오는 그런 방식 때문입니다. 사회적 실천의 경우든, 개인의 사고에 있어서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적인 조건, 그 현실 속에 실천주체가 갖고 있는 정서적인 현주소를 무시하고 있는 관념성, 도식성 등은 이상주의의 결함이자 큰 위험입니다.(여럿이 함께하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
인간관계 자체가 없다는 것, 특히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삶의 구조인 도시는 사실 인간관계의 황무지입니다…같은 공간 내에 있는 이웃끼리도 관계가 없습니다. 경계심을 가지고 낯선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열악하고 조악한 근대의 모습을 우리는 매일 직면하고 있습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졌다면 개인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품성으로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의 완성이란 낙락장송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무들과 함께 숲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게 가슴으로부터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숲이라고 볼 수 있고, 삶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저는 실천의 문제가 가장 궁극적이지 않나 싶어요. 실천이 곧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사회의 전개 과정이 보여 온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관계론적 패러다임으로 전화하는 것이 오늘의 문명사적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계몽주의가 왜 나쁩니까?
허허, 그게 잘날 사람들이 하는 거거든요. 계급적 편견이라고 봐야 되죠. 자기 가치를 기준으로 타자를 끌고 들어가는 거잖아요. 계몽주의 프레임은 허물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전 ‘멘토’에 대해서 좀 부정적으로 봅니다.
‘우리 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을 승인하고 평화롭게 공존합시다’ 그럴 듯한데,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톨레랑스에는 강자의 패권적 사고가 스며 있습니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을 승인할 것이 아니라 이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해서 자기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차이란 것은 자기 변화의 교본입니다. 이런 변화를 위한 실천으로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공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참된 공부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평생학습이야말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가장 중요한 작은 숲입니다. 평생학습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깨닫고, 더불어 실천하는 것이 곧 작은숲들을 확산하는 일입니다. 질식할 것 같은 우리 사회의 숨통을 트는 일이기도 하구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길게 보면서, 먼 길을 함께 걸었으면 합니다. 저도 그 길에 동행할 것을 약속드리지요.
글씨는 어떤 태도와 자세로 써야 합니까?
잘 쓰려고 해선 안 됩니다. ‘무법불가, 유법불가’이지요. 글씨 쓰는 법이 없어도 안 되고, 글씨 쓰는 법이 있어도 안됩니다. 교육과 학습의 이상적 형태도 바로 이런 자유로움과 다양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