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이 사람을 흔들 수도 있다_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1991)
책을 보고 눈물지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아! 나는 너무 모르는구나, 지금 내 삶의 안온이 그의 죽음 위에 서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이제 세상에 별난 것은 없으리라는, 30대 조로(早老)의 감성과 오만을 대패질하듯 밀어버렸다. 그 경험은 내 삶을 뿌리까지 흔들어버렸다. 어떤 사상서나 이론서보다 더 깊이 내 정신을 때렸고, 그 일격에 내 몸도 붕붕거리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깊은 곳에서, 나는 부끄러웠다.
전태일은 누구보다 가난했지만 결코 자신의 고통에만 묻혀 있지 않았다. 어떤 미래도 기약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가기로 한다. 그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 부조리를 타개하기 위해 노동자의 기본권리를 명시해놓은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근로기준법 해설을 물어볼 대학생 친구 하나를 찾아 헤맸고, 관공서에 진정하고, 또 항의한다. 그러나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말한다. 너희 노동의 대가는 국가발전을 위해 잠시 유예해야 한다며, 좋은 날이 오면 다 함께 좋을 거라 한다. 국가발전을 위해 노동대중의 고통과 죽음은 불가피한 일이라 하며 자본-권력은 자기의 부를 채워간다. 이 간명한 논리는 지금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전태일은 이 말이 기만임을 깨닫는다…자신과 동료들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햇던 이유가 바로 착취 때문이며, 그런 세상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무시무시한 곳이라고 뚜렷하게 통찰한다. 초등학교 2학년의 학력이지만 노동체험을 통한 사회모순의 자각은 적실한 것이었다.
모순을 자각한 사람은 더 이상 굴종하지 않는 법! 전태일도 더 이상 굴종하지 않는다. 자신이 잃은 것은 노동의 대가이지만 찾고자 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었기에 그는 싸우기로 한다…그러나 거대한 벽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전태일은 공부하고 찾고 항의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소와 무시뿐이다. 근로기준법은 단지 종이 위에 있는 잉크였을 뿐, 자신과 동료의 고통을 전혀 덜어주지 못한다. 그 법조문은 이 땅에 하루8시간 노동과 법정휴식을 증거하지만, 이는 자본-권력의 거짓 알리바이에 불과했다. 이런 알리바이는 언제 어디서나 있어왔다…2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법은 있었다…율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국가발전의 이름을 앞세운 온갖 법조문으로 노동자들의 손발을 묶어 놓고, 자기들만의 정결을 앞세우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세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예수 전태일.
국가는 국익을 말하면서 언제나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국가폭력을 자행해왔다. 자본은 ‘모두가 좋은 날’을 위해 참고 기다리자며 1원짜리 풀빵도 허락하지 않았다…국가는 언제나 지배자들의 것이었고, 자본은 그 국가발전을 앞세워 자신의 배를 불려왔다. 거기에 우리 노동대중은 없었다. 그래서 국가는 절대로 계급을 초월할 수 없는 것이고, 전태일은 이들 국가-자본에게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 누구를 위한 발전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우리 노동자는 여러분의 국가에 속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내가 바로 전태일을 죽인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원했던 유대 동족들처럼 그 돌이 자신에게 이르는 것조차 모르고 나도 던졌다…나는 너무 몰랏던 것이다…그래서 전태일을 외면하며 사랑을 말하는 기독교인을, 나는 믿지 않는다…이 땅 교회 첨탑의 높이는 절망의 높이일 뿐이고, 산사의 고요함은 초월의 망상일 뿐이다. 그들에게 ‘지금 이곳의 그’는 없다.
나는 그의 고통과 죽음을 상상할 수 없다. 또 나는 그의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다…나는 그의 고통을 내 것으로 할 만큼 진실되지 못하기에, 이것이 내가 부끄러운 진짜 이유다.
당신으로 인해 나는 부끄러웠고, 또 가끔 몸이 아프기도 했다. 한 권이 책이 사람을 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지도당하고 싶지 않다_장 폴 사르트르, 조영훈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한마당,1984)
사회지도층? 도대체 누가 누구를 지도한다는 말일까. 불편함을 넘어 모욕감마저 든다. 이 말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지도당하고 싶지 않는 나는, 이 말을 거부한다.
가령 법률가, 과학자, 의사, 문필가처럼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은 사르트르에 따르면 단지 “실용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일 뿐이다. 이들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지식인과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들 실용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은 대체로 17세기 말 부르주아의 성장과 함께 나타났다…부르주아는 교육을 통제하여 “지배권력의 말단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일정한 권력”을 가진 ‘지식전문가’를 만들었다. 즉 지식전문가는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필요에 의해,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위에서’ 만들어진 존재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늘날 가장 위험한 것은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 태도”라고 줄곧 비판했다. 높은 교육을 받은 전문가일수록 좁은 지식영역에 갇혀 권력과 권위에 영합하기 때문이다. 사이드는 이를 극복하는 것은 “아마추어 정신”이라고 했는데, 이는 상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아마추어 정신이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그것이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지, 그것이 보편적 윤리와 일치하는지를 물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이는 도덕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용산참사와 재판은 상식의 문제이지만 그 상식을 뒤집는 것이 전문가들이다.
실용적 지식전문가는 어떻게 지식인이 되는가?…지배권력에 봉사하기를 거부할 때, 비로소 지식인이 된다고 한다.
우리가 조영래를 기억하는 이유…가혹한 세상의 차가운 법정에서 그의 변론은 따뜻했다. 이는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가 사는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가장 혜택 받지 못한 계층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을 실천한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이란 부탁받지 않은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모순된 존재”라고 한다. 지배계급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졌지만 결국 지배계급에 봉사하지 않기에 모순된 존재이고, 혜택받지 못한 계층에 봉사하지만 자신은 혜택받은 계층이기에 그들에게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모순된 존재다. 지식인이란 자청한 모순 때문에 결국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고독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참여는 현실권력과 권위에서 자유로운 사람만이 가능하다.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한 거부는 현실의 무거움을 벗어 던져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을 거부하고,…일체의 세속적 권위를 거부했던 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인으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일생 고독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으로 자유인이고자 했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의식이 없으면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라며 시대를 깨우쳤던 리영희처럼, 해직과 투옥과 고문을 견디며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지식인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복이다.
#악의 평범성과 말의 쓸모_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 2006)
예상했던 것보다 영감이 풍부한 책이었다.
결국 그에게 양심과 이상 같은 말들은 그냥 사용하는 ‘상투어’일 뿐이었고, 아렌트에 따르면 “말할 능력이 없는 인간”이었다. 이처럼 공허한 상투어만 내뱉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다. 앞뒤 맥락도 없이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자기만의 사랑과 행복에 겨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이 경쟁교육에 쓰러져도, 학교장의 전횡에 학교가 비틀거려도,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사랑과 행복을 말하는 그들의 말은 공허함을 넘어 기괴한 느낌이었다.
성실하게 행해지는, 악은 개인의 문제. 악의 평범성은 개인의 문제다. 이런 문제는 나치의 학살만이 아니라 언제나 있어온 문제다. 고문을 자행하면서 딸의 소풍 날씨를 염려하는 고문기술자처럼,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며 범죄행위를 일상적으로 무감하게 처리한다.
결국 다수의 침묵이 학교의 모순을 묵인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악’은 어떤 특별한 모습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성실한 모습으로 행해진다는 아렌트의 통찰이 무겁게 다가왔다.
말의 쓸모를 시험하는 것, 이는 말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교사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제기다. 생각해보라. 교사는 오직 말로 노동하는 자가 아니던가. 그래서 교사는 말의 쓸모를 시험해보는 정도가 아니라, 말의 쓸모를 완전히 믿어야 한다. 교사에게 말이란 곧 행동이다.
#텅 빈 말의 껍질과 구경꾼들_루쉰, 김시준 옮김, 『아큐정전』(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
교무회의는 ‘회의’가 아니다. 그냥 전달과 지시의 시간일 뿐이다…교사들의 의견개진이나 수평적 논의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으로, 말 그대로 봉건질서의 재현이다…그래서 학교 변화를 위해서는 의사결정구조의 민주적 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교사의 자세도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대부분 학교는 침묵과 굴종이 지배한다.
루쉰은 그런 중국민의 잠을 깨우기 위해 철의 방을 향하여 평생을 소리쳤다. 깨어나 일어나라고 통렬히 외치며, 온몸을 대중 속으로 던졌다. 그래서인지 루쉰을 읽을 때마다 그에게서 한없는 고독이 느껴지지만, 그의 메시지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훌륭한 은유로 살아 있다…문학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교과서처럼 읊조리지만, 정작 이 소설의 은유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문학을 웃음거리로만 즐기는 사람이 문학의 한 장면에서 교훈을 얻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구경꾼이 되어 즐거워하는 가운데, 지금 이 땅에서 자동차와 스마트폰으로 변발한 첨단의 아큐들이 우리 안에서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냐고, 시대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한순간에 아큐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인간의 배후를 지워버린 교육_에리히 프롬, 『마르크스 프로이트 평전: 환상으로부터의 탈출』(집문당, 1994)
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에코의 서재,2007)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본분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요증 아이들이 왜 이토록 일탈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또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호응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회적 성찰 없이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자치 우리 교육의 모순과 억압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와 연동되는 학교 ‘밖을 함께’ 볼 것을 주문한 것인데, 대부분은 이에 무감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개인의 배후를 통찰했다. 인간이 자기 사상이나 활동을 자기 것이라 믿지만 “실은 그 사람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객관적인 힘에 의해 규정”된다고 지적했다.
어울릴 것 같지 않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지만, 인간이 믿는 생각이나 활동이 사실은 환상일 뿐이며, 그 환상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인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목소리를 같이했다. 두 사람은 병든 개인과 변등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 인간의 배후를 지목한 것이다.
내가 마르크스를 말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인간이해가 얼마나 편협한지를 측량하는 준거점을 제시하고 싶어서다…우리는 정신분석학을 성적 결정론으로 오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조악하게, 마르크스를 저급한 유물론자로 교육받아왔다…나는 혼자 다시 공부해야 했고, 아주 단순한 사실을 늦게 깨달았다…한 번 잘못 배운 것을 다시 바로 세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나는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 고통은 나의 책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데, 왜 온전히 나의 몫이어야 하는지 억울하기도 했다. 그때서야 적어도 세상에는 개인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으며, 개인의 불행이 그의 책임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닌 것 같았다…나는 학교의 배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일탈에도 불구하고 더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본분이다’라는 그들의 교육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의 열성이 딱 ‘교실 안’에서 멈추는지를 묻는 것이다. 왜 그들은 교실을 짓누르는 배후는 외면한 채 기껏 아이들의 소란만을 힐책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고통의 배후를 질문하지 않는 열성이란, 비록 그들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틀린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두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앞세우며 전체 틀을 보지 않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사회의 구조악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닌가…도대체 사회적 관계를 떠난 도통이 가능한 것인지, 또 사회를 배제한 채 탐구한 마음의 본질이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개인의 노력이 아니다.
인간의 배후를 지워버린 교육 때문에 우리는 고통의 배후를 모르게 되었고, 그래서 대중에게 지속되는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이익이다. 그들은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국가는 지배계급의 대리자이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교육을 지배한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변증하는 사례이지 않겠는가.
#이식된 언어와 제작된 주체_강명관, 『열녀의 탄생』(돌베개, 2009)
한문학자 강명관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무척 인상적이었다. ‘고루한(?)’ 한문한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옛 서책을 대하는 신선한 관점 때문에 그의 글은 상당히 현대적으로 다가왔다. 대개 한문을 좀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현학 취미를 내세워 현대인을 경박하다 비판하고 현대문화 자체를 경멸하기까지 한다…특히 이 땅의 한학자들 중 상당수는 선조들의 텍스트를 주로 찬양하기에 급급한데, 그런 회고적 찬양이 불편하다. 선조들의 텍스트는 언제나 찬미 받아 마땅한가? 만약 우리가 옛 사회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현대적 해석과 실천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곳의 삶과 유리된 학문은 쓸모없는 현학 취미에 불과하다…옛 것을 혹은 외국 것을 공부하더라도 지금 이곳의 문제와 접속되지 않는 지식은 그것이 아무리 상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죽은 지식일 뿐이며, 그런 단절된 앎으로는 ‘나’의 삶을 추동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 이곳의 삶과 꿰매지 못하는 어떤 글 읽기도 무익하다. 영어를 잘하지만 세상에 무지한 사람들이 있듯이, 한문을 잘하지만 역시 인간과 사회에 무지한 사람들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그에 비해 강명관은 옛 텍스트를 통해 지금 이곳을 말한다. 그가 불러오는 과거 자료들은 모두 지금 이 땅의 모습들과 대비되어,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는 우리 선조들의 삶을 찬미 받아 마땅한 것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을 억압하는 옛 사회의 모든 것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그는 언제나 인민의 시각에서 텍스트를 읽는다.
열녀…1392년 조선의 건국과 함께 ‘여성성’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여성은 어떻게 죽음까지 미덕으로 여기고 기꺼이 실행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책을 통한 교육이었다. 조선조 책이란 모두 통치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하였기에 책의 발간과 유통은 국가가 직접 관리했다.
두발규정. 학생들의 답을 칠판에 하나하나 표시하며 내가 느낀 것은, 그들은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는 진짜 이유를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두발 통제에 반감을 가졌지만, 학교가 왜 그러는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가 내세운 언어를 의심하지 않고 자기 언어로 반복하고 있었다. 머리카락 통제가 부당하다는 ‘몸의 느낌’은 분명하지만, 그 부당함을 항변할 자신의 언어를 찾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 몸마저 자기 마음대로 못하게 통제받는 사람은 다른 그 어떤 것에서도 쉽게 통제할 수 있다. 내 머리카락을 짧게 강제 받는 것은 단순히 두발의 규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복종을 내 몸 깊이 새겨 넣은, 복종의 내면화 학습이다.
학생의 머리카락 통제는 정치권력이 개인의 일상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조선조에 여성(열녀)의 죽음을 아름다움으로 여긴 것처럼, 짧은 머리카락이 ‘보기에 좋다’는 취향은 바로 권력의 미학인 것이다.
그렇게 지배자의 언어는 대중의 의식을 잠식해왔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교육의 핵심 기능이다.자기의 언어를 갖지 못하면, 타인이 제시한 언어에 갇혀 철저히 타인에게 지배당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향으로 돌아갈 남편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내가 자신의 신체를 인육으로 파는 이야기,…이러한 “서술의 잔혹성은 적대국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열행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언어”로, 여성의 복종을 몸속 깊이 박아두기 위해 동원된 언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이렇게 잔인한 언어를 주입받아왔다. 1970년대를 휩쓴 ‘반공소년 이승복’의 이야기를 다시 보면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서술인지, 지금은 느낄 수 있을 테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조선 여성의 억압방식을 통해 지금 이곳의 억압을 통찰하는 것이다…이 성찰이 지금 이곳의 올바른 독서일 테다.
#불의한 권력을 바라볼 용기_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
질문의 순서가 바뀌었다…전문가주의를 내세우는 자들이 어떻게 한 사회의 건전한 상식과 윤리를 왜곡하는지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상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전문가주의’ 즉 전문기술자들이 권력과 자본의 실무자로 복무하여 그 사회의 지배를 공고히 한다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적은 옳았음을 여기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오직 돈을 숭배할 따름…그 돈으로 한국사회 전체를 매수한 그들은 염치를 모르게 되었고, 염치없는 ‘황제’들은 우리 인간과는 다른 세상을 이루었다. 무노조 경영은 ‘깨끗한 삼성’을 만들었고, 언론과 사법과 관료를 ‘또 하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 그들만의 씨족사회를 이루었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