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좌의 목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데 있다…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이 책은 『공산당 선언』 전체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실한 해설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돌이켜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본질, 즉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그 체제에 자신의 몸과 머리를 완전히 착취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종의 약도에 불과하다.
“하인의 눈에는 영웅이 없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위대한 영웅이라 칭하는 사람이라도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하인에게는 그 사람이 영웅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번 계몽주의를 맛본 이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물론 계몽을 아는 것과 맛보는 것은 다르다. 그저 알기만 하는 이는 언제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인간은 관계의 산물이다_물질적 관계와 유물사관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한마디로 정리한 문장이다. 멋지다. 구질구질하게 이런저런 말 갖다 붙이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한마디로 정리해서 말하고 있으니.
인간은 사회적 존재. 사회적 관계 속에 들어가 있는 존재. 관계는 두 가지. 서로 호의를 주고받은 호혜적 관계와 돈이라는 물질이 오고가는 물질적 관계.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대한 오해? “가장 담대히 거짓을 일부러 들고 나온 것”이며 “거기서는 역사의 근본을 아무 목적 없는 우연한 물질에 돌린다. 그러고는 모든 정신적인 가치 관념을 유치한 시대의 공상, 망상에서 나온 것으로 돌리려 한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유물사관에서 말하는 물질. 그건 바로 경제적인 의미의 물질. ‘황금만능주의’ ‘물질 중심주의’의 물질. 간단히 말해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돈 가지고 매사를 판단하지 않는가. 그게 바로 물질 중심 사고방식이다. 유물사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돈 가지고 매사를 판단하려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크게 오해한 것이 아니다. 조금 더 넓게 이해하면 돈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활동을 가지도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명절 가족간 발생한 폐륜 범죄. 대부분 돈 놓고 쌈질하다가 그런 것. 애초에 돈 가지고 싸우지 못하게 만들어야. 물질화되어버린 가족관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관계가 어쩔 수 없이 물질화된다. 그걸 이겨내야 호혜적인 관계가 유지된다.
서로 사귄다면서 머릿속에서는 돈 계산하고 있으면 그게 바로 물질적 관계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 같은 이야기가 미담으로 보도되는 것 아닌가.
유물사관이라 것은 바로 이런 물질적 관계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따져보자는 것. 그러니 불온한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물질적 관계를 기준으로 나뉜 집단끼리 서로 대립하고 싸워온 역사다? 이것저것 다 포함하는 출발점이란 사실 별 쓸모가 없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내놓은 출발점이 좋다는 말이다.
과제물 요령.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맨 마지막에 지키지 못할 말, 이를테면 “앞으로 자본주의 사회 전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겠다”와 같은 다짐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말만 무미건조하게 철필로 쓰듯 쓰면 된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_부르주아 계급의 등장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사회적 여건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세상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발견, 아프리카의 회항은 대두하는 부르주아지에게 신천지를 열어주었다. 동인도 시장과 중국 시장,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식민지들과의 교역, 교환 수단 및 상품 일반의 증가 등은 상업, 해운, 공업에 미증유의 비약을 가져다주었으며, 그럼으로써 허물어져 가던 봉건사회 안의 혁명적 요소에 급속한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자본주의는 초반부터 글로벌 경제였던 것. 애초부터 전 세계적 시장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지리상의 발견이 가져다 준 효과는 이처럼 대단. 결과적으로 서부 유럽만 빼고는 지구의 전 지역이 자본주의의 식민지가 되거나 상품시장으로 전락했다.
자본주의 경제의 비약적 성장. 지리상의 대 발견 이후 만들어낸 식민지 수탈로 가능했던 것. 자본주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다.
유럽에서는 최소 300년 정도 걸린 일을 한국에서는 ‘압축적 근대화’로. ‘근대화’하면 좋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착각해서는 안 된다.
#꿂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라_자유로운 계약 노동자의 등장과정
허전하더라도 끝을 맺어라. 앞에서 하지 않은 말을 결론에 써서는 안 된다. 결론은 항상 앞에 나온 말들보다 범위가 작거나 같아야 한다. 이걸 어기면 논리적 비약이고, 일상용어로 말하면 사기다.
자유? 영어 ‘free from’은 ‘~이 없는’이라는 뜻이 아닌가.
인클로저를 통해 소작인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떨어져 자유롭게 되었다! 말이 자유지 이것 역시 냉소적인 의미에서 쓰인 것이다. 연봉계약? 사인을 하고 안 하고는 각자의 자유다. 굶느냐 마느냐가 각자의 자유인 것이다.
자유로운 계약 노동자?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 ‘~이 없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아니다. 자기의 잠재적 능력을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는 아닌 것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 하여 그가 노동자가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이 현대의 노동자에 대한 핵심적 규정이다. 화이트칼라니 블루칼라니 하는 구별은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만 분명히 알아두자.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가, 부르주아_자본주의의 정치적 체제와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업적
마르크스의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경제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이 동시에 맞물려 돈다는 것을 발견한 점이다.
정치경제학. 사실 경제 따로 정치 따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자세히 보면 봉건제, 매뉴팩처 시기, 대공업과 세계 시장 시대 등이 나오고 그에 상응하는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위치가 나온다. 최종적인 결과는 현대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한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다 해먹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국가가 하는 일이 뭔가. 바로 부르주아 계급의 일을 처리해주는 위원회인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검토 없이 국가기구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국가론이 아니다…만일 좌파 운운하며 경제적 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를 좌파라 부를 이유도 없을 것이다…이렇게 분석하다 보면 한국에서는 좌파 정부가 들어선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현 정권을 좌파라고 하면 비웃어주면 된다. 정말 좌파가 뭔지 ‘ㅈ’자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소리인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경제적인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꾸었다. 거기에 더해서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인 지배권까지 손에 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회 전체를 완전히 자기 식대로 바꾸는 일. 따라서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가들이다. 마르크스도 솔직하게 그 점을 인정. 그러나 동시에 부르주아 계급이 인정사정없는 혁명가들이라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타고난 상전들에 사람을 묶어놓더 잡다한 색깔의 봉건적 끈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뜯어버렸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노골적인 이해관계, 냉혹한 현금 계산 말고는 아무런 끈도 남겨놓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인간애가 어떠니, 인간관계가 돈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삭막하다느니 하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의 혁명적 업적인데 그걸 불만이라고 하면 부르주아의 업적이 불만이라는 말이고, 그러면 당연히 빨갱이로 몰리지 않겠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 자신의 진본성이 없어진다. 생명도 복제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 그것을 복제하여 돈을 벌려고 든다. 돈이 되니까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해서 연구하는 것.
뭐든 돈 되는 방향으로 바뀌어간다. 오래갈 만한 것이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부수고 새로 지어야 그것으로부터 이윤이 생겨난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회 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과 격동 등이 부르주아 시대를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해준다…세상의 모든 것이 자본의 통제 아래 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 모든 것이 돈으로써 측정되므로 존귀한 것이 남아나질 않는다.
텔레비전에 아무나 선택될 수 없다? 텔레비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 광고주. 토론자들이 나와서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이 텔레비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광고주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가 접하는 텔레비전의 지식인이 곧 그러한 자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보 좌파라는 명색을 걸고 나오는 사람이라도 곧이곧대로 그러리라 믿으면 안 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광고주가, 자본이 선택한 사람들이다. 프로듀서의 손을 빌려서.
#영원히 성장해야만 하는 체제_자본주의의 혁신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요즘 자주 듣는 ‘세계화’, ‘글로벌 기업’하면 뭔가 새로운 것 같고 자기가 그런 회사에 다니면 대단히 멋진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이나 세계화니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바탕으로 성장한 것이기 때문. 다만 요즘 들어서는그 경향이 더욱 강해졌을 뿐이다.
끝없는 혁신?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숙명과도 같은 것. 계속해서 자본의 순환 고리를 돌려야 하니, 그것고 빨리 돌려야 이윤이 빨리 나오니까 혁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농업,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을이 되지 않으면 쌀을 수확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순환 고리가 있었던 것. 그런데 요즘은 농업도 이윤을 추구하는 하나의 산업. 비닐하우스 재배를 통해 철 없이 과일을 먹게 된 지는 벌써 오래. 이것을 환금작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돈을 바꿀 수 있는. ‘황금작물’이라고 읽어도 무방하다.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작물을 재배한다는 것은 농업 역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 철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시장에 출하해야 하고, 그래야 이윤이 돌아온다. 그래서 농업에서도 혁신이 진행된다. 농업은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농업이 아니다. 차라리 공업이라 해야 옳을 정도다!
자본주의 체제는 성장이데올로기로 무장돼 있다. 일단 성장한 다음에 뭔가를 떠들어도 떠들자는 생각을 가진 체제다. 성장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또다시 성장해야 한다고, 영원히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체제다.
성장을 하려면 혁신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혁신을 자주 하다 보면 결국에는 사람을 잘라내는 일이 생겨난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런 까닭에 기술적으로 몹시 역동적인 체제다. 부르주아 계급의 궁극 목적은 이윤 창출. 마르크스 관점에서 이윤의 원천은 살아 있는 노동에 있다…그런데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다 보면 노동이 불필요한 때가 생기게 된다. 기술적 역동성이 노동과 불가피하게 부딪치는 지점이 생긴다. 노동의 생산성이 올라가야만 이윤이 증가하니까, 노동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술 혁신을 했는데 어느 시점에 오면 살아 있는 노동자를 쫓아내게 된다. 성장과 기술적 진보가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된다. 일상적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기술이 발전해서 회사일이 편해진다지만 그러다가 사람이 잘려나가는 일도 생겨난다.
사람 자르는 일을 못하게 노조 같은 데서 반발하면, 부르주아는 ‘기업가의 파산’ 운운하면서 해외로 공장 이전. 해외로 가면 값싸고 말 잘 듣는 노동자가 있다. 게다가 물건을 만들면서 그 물건을 만드는 나라 사람들을 또 다른 소비자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 이것이 세계화요 글로벌 자본주의의 정체. 글로벌 기업이 하는 일이 이것이다. 그러니 ‘한국 기업이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는 말에 애국적 열광이 잔뜩 부풀어 올라서 으쓱하는 일은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세계 시장을 우려먹음으로써 모든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가 범세계적인 꼴을 갖추게 하였다.
스리랑카 의류 공장 설립, 기술 전수? 기술 이전이 아니라 자본 수출. 얼핏 기술이 움직여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자본이 움직여가는 것. 한국에서 남는 자본 잉여가 움직여가는 것. 공장만 움직여가는 게 아니다.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돈 놓고 돈 먹기. IMF외환위기. 자본이 돈 놓고 돈 먹기 하다가 빼내면서 생긴 일. 자본은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인다. 한국을 발전시키려고 자본이 들어온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물질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자본주의 세계에서 정신적인 면도 가지고 있는 문화가 형성된다는 말을 어불성설이다…자본이 매스미디어에 문화도 싣고 상품도 싣는다…나이키…마이클 조던…산골짜기 애들까지도 신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이게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 현실인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들의 급속한 개선과 한없이 편리해진 교통을 통해 모든 국민들을, 가장 미개한 국민들까지도 문명 속으로 잡아당긴다.
문명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농촌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의 농업이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농업이 아니라 환금작물 재배를 통해 이윤을 얻으려는 농업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는 농촌에도 손을 뻗친다.
자본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도 도시문명이다. 농촌은 자본주의와 잘 들어맞지 않는다. 자연의 힘에 상당한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도시에서는 뭐든 자기 혼자 힘으로 자급자족할 수가 없다. 음식을 먹으려 해도 슈퍼에 가서 공산품을 사다 먹어야 한다…이제 농촌에서도 마찬가지다…쌀 팔아서 공산품 산다. 세상사에 무관심한 농촌생활이 아닌 것이다.
자본 과잉. 돈이 남는다. 이윤을 못 내고 있다. 이게 자본의 위기다. 자본의 위기라고 하면 거창한 거 같지만 돈 놓고 돈 먹기가 안 되고 있다, 이윤이 안 나오고 있다, 이게 자본의 위기라는 말. 그걸 극복하려면 돈이 될 만한 곳에, 이윤이 최대한 나올 만한 곳에 투자를 해야겠다, 그게 극복전략이다. 별로 대단한 게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미래’. 그런데 핵심적인 내용은 자본의 위기극복전력. 따라서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남한의 자본의 위기가 극복되어야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는 말. 그게 민존의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공산당 선언』을 읽는 이유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이런 거 알아두자는 것 아닌가.
마지막 문제는 ‘전인적 인간 이상 실현을 위한 방안을 쓰라’. 너무 거창한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와 그것의 적용에 관한 것을 이해했으면 이 사회 속에서, 그것도 없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궁리해봐야 할 것이다.
#혼자서 공부하기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야기 정리
몇백 년에 걸친 이야기를 한 문단에 끝내버리는 경우도 있다…이른바 고전이라고 하는 책은 꼼꼼하게 읽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모든 책을 꼼꼼하게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고전은 꼼꼼하게, 이렇게 정리해두면 되겠다.
시간 관리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이 시간을 만든 것도 아니요, 모든 인간에게 디폴트로 주어진 것이기에 관리할 수 없는 것. 자기 관리가 있을 뿐. 자기 관리를 하려면 생활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회사 업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하고 최소한의 사람을 만나고 나머지를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준비를 해야 한다. 틈나는 대로 책을 집어 들어 읽음으로써 항상 뇌를 활성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노동의 무릎 위에서 졸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이룩한 거대한 생산력들은 사회적 노동을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는 것. 그런데 사회적 생산물의 경우 사회적 분업이 전개되면 될수록 부가 소수에게 집중된다.
봉건사회 안에서 태어났다? 이거 중요하다. 어떤 사회형태든지 느닷없이 나타나는 일이란 없다. 자본주의 사회도 마찬가지다…봉건사회 안에 봉건사회를 극복해낸 자본주의의 씨앗이 들어 있었고 그것이 싹터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능했듯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 자본주의를 극복한 씨앗이 들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씨앗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 씨앗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본주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자본』이라는 책을 썼다. 『자본』은 자본주의를 뒤엎자는 주장을 담은 책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밝힌 책. 뒤엎는 건 밝힌 다음의 일이라는 것이다.
#물건은 넘쳐나는데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다?_자본주의의 위기와 극본전략
과잉생산. “생산력들의 반란”? 생산력의 반란으로 봉건제가 폭발하고 그것으로부터 부르주아 사회가 나왔다면, 부르주아 사회 역시 생산력의 반란 때문에 위기에 놓인 것이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왜 그런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무나 나눠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 그 많은 생활수단, 그 많은 공업은 본래 이윤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 그러니 그냥 막 내다팔 수가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창고에 재고로 쌓여 있을 뿐이다.
너무 많은 생활수단만이 문제가 아니다. 자동화 도입, 너무 많은 노동력, 구조조정, 말이 그럴싸해 구조조정이지 사람 자르는 일.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냥 남는다. 노동력이 남아돌게 된다. ‘과잉’이 자본주의 위기의 근본적인 요인이다.
마르크스가 발견한 두 가지 방안. 대량의 생산력을 없애 버리는 것. 그냥 마구 내다버리는 것. 사람도 없애는 것.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다…’민주주의의 회복’이라면 명분을 내세우면 그럴싸할 테고. 이게 자본주의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다. 바로 ‘절멸’ 시키는 것. 깡그리 없애버리는 것.
또 다른 해결책은 “새로운 시장을 획득하고 옛 시장을 더욱 철저히 착취”하는 것. 시장확대는 전쟁을 일으킬 만한 형편이 안 되면 나오는 방안이라 생각해도 좋다.
전 세계를 상대로 물건을 팔아먹을 시장을 찾아나서는 것이 제국주의다.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장 커다란 환상? 자유경쟁,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효율적 체제? 현실에서 정말 그대로 작동할까? 결국 시장 독점으로 간다! 대기업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 과징금은 껌값에 불과하다. 결국 이기는 놈은 판돈이 많은 놈. 더 이상 가격은 자유 시장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급자가 가격을 규정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다국적 농업기업 카길. 굶어죽는 아이들과 남아 도는 식량? 태평양에 내다버릴지언정 거저 주지는 않는다.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각각의 개인들이 자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다 돈 주고 산다.
노동력 잉여. 기술과 노동 사이에 적대가 생겨난다. 물건은 넘쳐나는데 가난한 대중은 물건 살 돈이 없다. 부르주아지의 입장에서는 전쟁이든 시장확대든 어떤 해결책을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가난한 대중은 대책이 없다.
현대의 국가는 부르주아와 깊은 관계 속에 있다. 마르크스는 국가 권력이 부르주아 계급의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라고 했던 것. 그러니 국가를 타도한다고 자본주의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국가라는 조직 안에서 감정적으로 강하게 결속된 국민은 한 덩어리로 움직이기 때문에 세 가지 모두가 무너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를 낳다_프롤레타리아의 등장
부르주아지, 다시 말해 자본이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 노동자 계급은 발전하는데, 그들은 일자리를 찾는 한에서만 살 수 있고, 자신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시키는 한에서만 일자리를 찾게 된다.
대학마다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기업에서 요구할 만한 인재를 키운다고 난리법석. 대학이 학문탐구의 공간이 아니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기계화된 농업. 얼핏 기계화가 농업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듯. 기계화된 농업. 농업 노동은 “토지의 비옥함의 지속 가능한 원천을 파괴”하는 공업적 노동이 된다. 자연의 대 순환의 톱니바퀴를 빼는 공업은 지속 불가능한 산업이다.
헌법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써놓아봤자 아무 소용없다. 회사는 민주주의 체제로 굴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선언』은 이렇게 말한다.
이 전제 정치는 영리가 그 목적이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면 할수록, 더욱 더 좀스럽고 증오스럽고 잔인한 것으로 된다.
『유럽혁명 1492-1992』의 부제가 다름 아닌 ‘지배와 정복의 역사’. 400년 동안 영 연방국가가 해외에서 치른 수많은 전쟁 내역. 대영 제국은 무슨, 대영 ‘전쟁’ 제국이다.
현대의 자본주의적 대공업이 1990년에 와서 완성. 400년 걸린 거다.
#당신도 성공할 수 있다?_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과정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임금 투쟁을 한다 해도 임금은 국가에서 정한 법에 얽매여 있다. 법을 제정하는 것은 국회. 그러니 계급적대의 문제는 반드시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자신이 프롤레타리아트인데도 그걸 모르는 사람은 뜻밖에도 많다. 사장도 아니면서 사장 마인드 가진 팀장…사장도 아니면서 회사입장에서 생각해보자고 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객관적 위치를 알지 못할 뿐더러 남이 그 위치를 알려줘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다.
“정치 운동”.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 바로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 우리가 본질적으로 계급관계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숨기고 한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이런 것에 속아서 국민들은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 ‘우리 기업’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삼성의 매출과 이익은 거의 다 반도체에서 나온다. 그런데 반도체산업은 장치산업이기에 국내에 공장을 아무리 많이 지어도 생색낼 만한 고용효과가 별로 없다. 고용이 적으니 당연히 이익이 사회로 돌아오는 효과도 적을 수밖에 없다.
더 이상 기업의 애국심 호소에 속아서는 안 된다. 자신이 프롤레타리아트임을 자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애국심도 버려야 한다…이건희 명예철학박사 학위 받으러 왔다 봉변당한 일로 자기 학교 애들 삼성에 취업 안 되면 어쩌나 걱정해서 사과하는 족속들, 말만 지식인인 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사태를 파악 못하고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물들어버린 것이며 그것이 부르주아가 원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혁명이란 게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유의 반동적 매수에 넘어가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일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소유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절정에 이르면 계급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알거지 상태로 전락하기 직전이 된다…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학적 명령이 호소력을 읽은 까닭이 이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심이 생겨날 리가 없다.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조국을 없애려 한다? 마르크스는 국적을 없애려 한 것이 아니다. 자본과 노동은 무국적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 자본은 이미 국적이 없다. 자본에게 국적은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프롤레트리아트에게 국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계급투쟁만이 그들에게 남은 대안이다. 국민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국가가 가끔 던져주는 당근도 물리치는 게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대안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수의 이익과 관점을 따르다_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또는 사람답게 살 만한 세상
그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사적 안녕과 사적 보장을 파괴해야만 한다.
지배를 무너뜨리는 일은 지금까지의 취득 방식, 즉 임금 노동을 철폐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무너져야 비로소 구성원 모두가 사회적 생산력을 획득할 수 있다.
공산주의를 남김없이 설명하는 것은 소유 일반의 철폐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철폐이다.
다수의 관점과 이익을 따라야 하며 단순한 지배가 아니라 정신적 지도에까지 이르러야 하고, 그래야만 비로소 그 운동이 다수의 자립적, 자각적 운동이 될 수 있다.
국가는 교육기관을 장악. 교육부 방침을 따르지 않으면 지원을 해주지 않겠다고 협박, 결국 부르주아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교육인적자원부’, 사람을 ‘자원’으로 취급하는 자세. 회사 총무부서에 있는 교육팀과 뭐가 다른가. 이게 바로 부르주아가 현대 사회의 지배권을 세운 뒤 지도권까지 장악하는 과정에서 활용되는 세력과 방식들이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바로 이러한 것을 벗어던져야 하는 것이다.(탈학교, 학교 없는 사회)
#강의를 마치며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지 곰곰히 따져보니 사람들의 종교, 신념 등을 떠나 사회의 물질적 관계가 사람을 규정하는 사회로 되어버렸더라는 것이다. 이게 자본주의가 가져온 혁명적 변화다. 그런데 이게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이다. 날마다 회사에 츨근해서 머릿속까지 착취당하고 파김치로 돌아와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다시 출근하는 것이 사람 사는 꼴은 아니라는 것이다. 돈 중심의 사회적 관계를 폐기해야만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인간성을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세 신분사회에서 벗어나 자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돈의 노예가 되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 마르크스는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안을 제시한다. 이 점이 『공산당 선언』을 읽는 이유다.
자기계발? 인생을 길게 보아 사람답게 사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도 이익은 이익이다.
당장 필요하고도 유용한 ‘자격증 따기’ 공부? 그러나 그렇게 공부한 것은 강자에게 흡수되기 쉽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는 자기 찾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오래된 텍스트를 천천히 더듬어 보면서 진정한 자기를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