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과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책을 읽지 않는 그들은 자연과 자신의 일치 속에서 살아가므로 원초적으로 행복하다. 또한 그들은 지구에게도 행복을 준다. 지구가 원하는 것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순환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나무를 베어 그걸로 책을 만들고 한쪽 구석에 쌓아놓는, 이른바 순환의 톱니바퀴에서 이빨을 빼내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은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책 자체가 아닌 세계, 즉 책이 놓인 공간 속에서 책의 의미를 살펴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언명의 비진리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책, 넓게 말해서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즉, 세계가 텍스트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텍스트는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거짓을 앞세워 자신에 앞서 있던 세계를…
사람의 삶은 고되다. 고됨은 여가를 용납하지 않는다.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학문이 본래 ‘여가’라는 뜻을 가졌듯이, 여가가 없는 이들은 텍스트를 읽을 틈이 없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농경민이건 유목민이건 그들의 생업에 필요한 정보나 지식은 조상으로부터 말로써 전해진다.
수메르 지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책들은 상인들이 남긴 기록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건 책이 아니라 장부다. 왜 수메르에서는 이런 장부가 생겨났을까?
‘비옥한 초생달(메소포타미아)’. 그러나 그 비옥함이 행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비옥함은 그것을 탐내는 이들을 불러온다. 이는 당연히 분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분쟁과 자급자족 불능을 배경으로 그 땅에 농경민과 유목민이 뒤엉키면서 도시가 생겨났다. 도시에는 자연의 순환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상인들이 자리잡았다. 그들은 거래의 필요에 의해 장부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바로 오늘날 남아 있는 수메르 점토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점토판의 95%가 경제 관련 내용. 영수증, 청구서, 재산목록, 땅의 측량 결과 등이다. 이는 점(占)을 친 결과를 기록했던 중국의 갑골문과 구별되는 수메르 문명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문명은 세속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들이 만든 것이며 이 특징은 오늘날까지도 서구의 전통으로 이어진다.
텍스트의 힘: 모세5경
쿠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처음 찍어낸 책은 성서. 구텐베르크를 움직인 건 유럽 전역의 교회와 지배자들이라는 시장, 한마디로 돈이었다. 세속적인 것이 신선함을 눌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탐욕을 채운 이 사건을 두고 고대의 구약성서 기록자들은 뭐라 말할까? 탐욕의 궁극적 승리를 개탄할까?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공포는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요, 탐욕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즐거움에 의해 생겨난다.
모세 5경의 야훼는 인간이 공포로 움직이는 존재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모세 5경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다….야훼는 말로써 만물을 만들어낸다. 야훼의 전지전능함, 잔인함의 원천은 바로 ‘말’, 텍스트, 로고스인 것이다.
모세 5경에 나오는 히브리 민족은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중요한 일을 미루는 법이 없었더. 항상 ‘지금’ ‘여기’가 중요했다.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유대인들의 현실주의적 생활 태도를 형성하는 골간이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매체 네트워크가 있다고 할 때,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점은 ‘그 그릇과 네트워크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운용할 것인가’이다. 이것은 매체를 둘러싼 일종의 권력이라 부를 수 있겠는데, 이렇게 본다면 ‘매체’는 텍스트의 생산과 유통을 둘러싼 거대한 컨텍스트를 가리키는 말로 다시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컨텍스트가 끊임없이 텍스트 내용 자체와 의사소통을 하면서 텍스트를 제어하기도 하고, 매체가 가진 테크놀로지의 독특한 측면들을 텍스트가 극대화해서 활용하기도 하는 등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로마적 요소? 로마적인 것 또는 서양의 어떤 것을 언급할 때 사람들이 대개 그것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다만 그것이 현실의 사태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대응하는지를 따지는, 실용성이라는 잣대만을 들이대는 것이다. 이는 언뜻 보기에는 사소한 태도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 서구의 전통에서는 아주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요, 그 사소해 보인다는 것 또한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그들의 삶의 저변에 깊숙이 자리잡았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얻기 위해 힘들게 애쓴다. 그리고 나는 그것(학문) 또한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것은) 정신을 힘들게 하는 일일 뿐이다. 이 세상 자체가 지나가버릴 터인데, 이 세상 만물에 대해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마직막 날에는 네가 무엇을 알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행했느냐를 물을 것이며, 네가 가게 될 지옥에는 학문도 없을 터인즉 헛된 수고를 그치라.
종의 기원. 다윈은 자신의 선배들이 제시한 핵심 문제, 즉 ‘종의 소멸과 생존’에 관한 결정적인 대답을 내놓는다…다윈은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우선 세계 안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을 수 있음을 드러내 보였고,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진화해왔음을 천명하였다. 자연계와 사회세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인간은 세계에 우뚝 선 존재가 아니라, 그 중에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목적이 진보라 해도 과정은 끊임없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자원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끼리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된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인간 본성과 자연환경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로 설명된다. 이로써 무한 경쟁에 근거를 둔 근대의 자본주의 세계는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에필로그
20세기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극단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극단은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15세기 이래 면면히 준비되어온 것들이 표피를 뚫고 터져 나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극단에서 극단으로 오갈 수 있을 뿐이다. 개념적 파악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 불가능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모든 이론은 잿빛’이어서 이론은 현실에 맞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것이 극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들을 자기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다시 빠져나와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질 자아가 과연 진정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텍스트를 손에 잡지 말아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