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다 순례. 자현.
만들어진 신. ‘죽음의 극복’과 ‘위험으로부터의 탈피’, 이 두 가지의 문제는 초월적인 힘을 요청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인류는 신을 만들어 내게 된다. 즉, 신은 인류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요청된 존재인 것이다.
사제, 신과 계약하다. 호가호위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호랑이 앞에서 모든 동물들에게 위세를 부린다는 의미다. 사제 집단이 신을 끼고 행세하는 것도 이와 같다. 다만, 여우 뒤에는 진짜 호랑이가 있다면, 사제들에게는 실체적인 신이 존재하는지 의심스럽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전시가 되면, 신의 힘은 무력하기 그지없다…국왕은 전쟁을 통해서 보다 현실적이 된다…결국 이 세상은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을 대신하는 합리성.붓다는 주변의 조약돌을 갠지즈 강에 던지며, 신에게 기도하면서 그 돌을 ‘떠올라라, 떠올라라’ 외친다고 해서 돌이 떠오르겠냐고 묻는다. 사제가 안 된다고 하자, 붓다는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떠오르는 것이지 신에게 기원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신을 숭배하며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행동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 중 하나이다…즉, 신을 믿는 마음은 인간 이기심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 사실. 우리는 일견 사실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종교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에 기초한다. 즉, 종교는 행복론인 것이다.
불교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종교 중 가장 합리적이다.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불기는 붓다의 열반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추산된 것인데, 이는 기독교나 유교에서 예수와 공자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중도적인 특징이다.
일부다처제. 언뜻 보면, 남녀가 대단히 불평등해 보이지만 당시는 전쟁이 빈번해서 남성의 수가 여성에 비해 매우 적었다. 그러므로 성비를 고려하여 이러한 규정을 만든 것이니,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평등이었다.
무상이란?
이는 세상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시도 멈춰 있지 않고 끊임없이 유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를 불교에서는 ‘무상’이라고 한다.
무상이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으로, 변화를 의미하는 말이다.
언어의 생명력과 유교의 음모? 무상은 연기와 통하는 불교의 핵심어 중 하나이다. 따라서 무상에 부정적인 인식을 심게 되면, 불교 전체가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인식 속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음모를 획책한 것은 불교를 견제한 유교였다. 그리고 이는 상당 부분 성공했다. 오늘날까지도 불교는 염세적이고 탈속적인 듯한 인상으로 아로새겨져 있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신으로부터의 인간 해방.붓다의 깨달음의 핵심은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지만, 현상은 실존한다는 것이다. 곧 체가 없는 용을 말하는 것이 붓다이다. 그러므로 붓다께서는 집착없는 마음을 내고, 머묾이 없는 고요 속에 계시는 것이다. 무상과 무아는 인식 대상과 인식주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닌 변화 속의 임시적인 존재라는 의미이다.
서양 중세의 교부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신을 ‘부동의 제일자’로 설명한다. 신이란 변화하지 않는 첫번째 존재라는 것이다. 신은 절대 자아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현상세계와 함께할 수 없다. 또한 조물주이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아여야지 만들어지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유신론적인 신의 항상성을 부정하는 것이, 붓다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변화의 철학이다. 이를 통해서 신은 더 이상 인간을 넘어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세계는 신의 놀음에서 해방되어 인간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에는 신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이 깃들어 있다. 이는 신이라는 무지의 벽을 깨고서 나온 이성적 사유, 즉 인본주의에 대한 시대적 요청과 그 반영이라고 하겠다.
정견. 바로 보기. (여여(如如) ‘있는 그대로’? 단순한 ‘객관적 보기’가 아니라 ‘제대로 보기’, 참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요구된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올바른 안목이다. 이는 변화 속에서 변화를 잠재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중도란 파도타기다. 파도라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파도를 타는 사람은 그것을 정확히 읽고 파도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이 중도의 실천자가 변화라는 파도에 빠지지 않으면서 얻게 되는 고요한 행복인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중도를 얻게 되면, 안으로는 번뇌가 미치지 못하고 밖으로는 원망이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마음’과 ‘공’. 가장 개념이 불투명한 애매어? 그러나 공은 본래 애매어가 아니다. 다만 인도 문화가 중국 문화로 이식되는 과정에서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이해된 것일 뿐이다. 공이란,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는 말이다. 실체란 변함없는 것을, 그리고 작용이란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는 연기나 무상, 무아의 교리와 맥을 같이한다.
유신론적 종교의 경우, 신이 곧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사유나 일체 과정이 별도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교는 사람이 잠에서 깬 후 잠시 시력을 고르는 것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깨달음과 가르침은 차원이 다르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논리적인 층차가 다른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타자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은 답답하고도 귀찮은 일이다. 더구나 그것이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자각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것은 더욱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흔히 성인은 허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인은 허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허물이 있음에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수행자는 세속적 가치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금전을 가지지 않는다.(수행자에게는 배삯을 받지 않는다!)
깨달음은 스스로 자각하는 것! 붓다는 답을 제시해 주는 분이 아니다. 다만 우리로 하여금 답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 수 있도록 자각케 해 주는 분이다. 이 점이 바로 붓다의 규정지어질 수 없는 위대함인 것이다.
요즘은 전도라는 단어를 들으면 기독교가 먼저 생각나지만, 전도라는 단어는 원래 불교 용어이다…붓다 전도 선언의 특징은 인간의 자유와 행복에 있다…인간과 진리가 중심적인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불교의 인본주의를 잘 나타내 준다.
<손자병법>에서 전쟁이란, ‘싸우기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 나 있는 것을 단지 확인하는 것’
우루벨라 가섭. 타인의 어려움을 벗기기 위해서 자신의 어려움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깨침의 빛’에 의한 완성자의 행보라고 하겠다.
번역.음역. 반야심경의 사리자 또는 사리불. 사리불의 인도식 발음은 사리푸트라로 사리불은 이를 음사한 것이다. 푸트라를 ‘아닐 불’자로 음사한 것. 붓다를 ‘부처 불’로 음사. 음역 글자를 달리하여 차이를 부여하고 있다…사리불은 ‘사리라는 여인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별명…그러나 이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붓다는 고향에서 인정받은 유일한 성인이다.
동정녀 마리아? 진정한 신성 확보는 태생적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 인류는 인간이 생식을 통해서 태어난다는 것은 비범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존재는 반드시 신성과 결부된 태생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위대한 것은 평범함에서 태어나 비범함을 이루기 때문이다.(평범함의 위대함!)
“대왕이여, 법에는 나와 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도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법은 없습니다. 만약 이 전도된 생각을 끊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해탈입니다.”
연기법. 만물의 상호연관성. 연기적 조건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나’라고, ‘나의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일단 그렇게 자아가 홀로 솟아나면 그 ‘나’를 강화하기 위해, ‘나의 것’을 증식하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돋보이고 싶은 마음, 자아의 욕심)
‘나’는 내가 아니다! 붓다의 연기법에 따르면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연기조건의 산물이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당연히 나라고 규정할 만한,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제1원소나 영원한 주체 같은 건 없다. 고로 자아는 ‘만들어진 허상’이다…무아야말로 불교의 핵심이자 미증유의 전복적 사유다.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설정해 놓고 거기에 맹렬하게 집착한다는 것이다…
연기법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한다…하지만 그것이 무아로 연결되는 순간 사람들은 멈칫(!) 한다…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변해 가도 ‘나’만은 고유하고 영속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갑자기 그것이 모두 신기루이자 물거품이라고? 이것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불교를 허무주의나 니힐리즘으로 해석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으로 즐겁구나, 참으로 즐겁구나.”
“왕일 때에는 모든 것을 갖추고 무사들의 보호 속에서도 혹은 지위를 잃을까, 혹은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하여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출가하고 나니 나무 밑에서 홀로 밤을 지내도 두려움이 없으니, 이것을 즐겁다고 한 것입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고이듯, 복 역시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에게만 모이는 것이다.
화장은 유목민의 문화다. 유목민들은 농경민과 달리 풀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무덤을 지키며 기릴 수 없다…이러한 유목의 화장 문화가 인도의 농경문화와 습합되면서, 탑이라는 망자에 대한 기념물을 만드는 쪽으로 변모하게 된다.
붓다, 부처님의 일생을 통해 깨달음의 가르침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부처의 일대기.
단 한 권의 책으로, 여여如如, ‘있는 그대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을 통한 해탈의 길을 일구어낸 ‘인간’ 붓다의 참모습을 종교역사적으로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