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을이다. 조한혜정. p238
조한혜정 컬럼집
#프롤로그
탈.선.하.다.
길을 벗어나 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새 길을 낼 수 있을까요? 지난 10년, 아니 20년간 ‘탈선’한 사람들과 보낸 시간은 즐거웠습니다. 그들은 ‘서태지 세대’로 불리다가, 이제 ‘88만원 세대’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국민, 아니 ‘21세기 시민’들입니다. 조만간 그들의 부모 세대에서도 ‘탈선’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조짐이 보여 기쁩니다.
가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공동체적 기반’이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토건 국가를 넘어서 ‘돌봄 사회’로 가자.”는 말을 자주 하는 나를 발견하면서 제 관심이 모든 세대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어린아이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청소년 역시 든든한 후원자들과 잘 늙어 가는 어른들이 곁에 있을 때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청소년 무기력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은 그들에게 모델이 없다는 점일 겁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대학을 나와도 취업을 하지 못하는 형과 언니들을 보면서 이들은 지레 겁을 먹고 있습니다.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가면서 이들은 스스로 삶을 개척하기보다 어딘가 기댈 곳을 찾는 데 급급합니다. 학교라는 ‘제도’에 남아 있으면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그나마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십 년 전 시대를 표현했던 핵심어가 ‘청소년’, ‘대중문화’, ‘소비 사회’, ‘대안 교육’이었다면 최근 시대의 핵심어는 ‘청년’이며 ‘실업’이며, ‘전망 없음’일 겁니다. ‘고실업, 불안정 고용’, ‘고용 없는 성장’, ‘위험 사회’와 ‘평생 학습 사회’, ‘사회적 기업’과 ‘속도 조절’, 그리고 ‘지속 가능한 삶’과 같은 개념이 우리 삶을 좀 더 잘 설명해 주는 단어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권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글로 책을 시작합니다…시대는 변하고 그 ‘국민’의 틀이 몸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간 신성시되었던 ‘민족’이라는 이름, ‘근대’와 ‘국가’와 ‘진보’라는 이름이 후손들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하는 시대가 온 것이지요. ‘국민’의 틀이 몸에 맞지 않는다고 가장 먼저 몸부림을 친 것은 십대들이었습니다. 학교는 오로지 훈육의 장소이고 감옥일 뿐이라고, 시대에 맞지 않는 목적으로 운영되는 낙후된 수용소라고 그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대 분석은 끝났지만 구체적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런데 해법은 최소한의 안정성을 확보한 상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을이 없는 사람들, 신뢰하는 준거 집단이 없는 사람들은 파편화된 조각으로 불안하게 서성이다 거대한 고도 관리 체제에 포획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를 헤쳐 나갈 방법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을 겁니다.
사실 해법은 마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보일 겁니다.
다행이 그간 ‘탈선한’ 사람들은 두런두런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크고 작은, 갖가지 모습의 마을들이 ‘천 개의 고원’을 이루며 제각각의 변주를 해낼 때, 그리하여 언젠가 다들 연결하여 아름다운 교향곡이라도 연주하게 된다면 그때는 아마도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간 지치지 않도록 몸조심, 영혼 조심하시며 마을 잘 가꾸어 내시기 바랍니다.
#’근대’에 관한 명상
도심의 추석 축제. 전통은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되살릴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지난 백 년에 걸쳐 진행된 도시화의 역사, 그 속에서 자란 도시 아이들의 삶의 공간을 이제는 인정하자…피난민과 이농민의 시대를 지나 ‘도심의 고향 만들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때다.
진퇴양난. 분명한 것은 근대화/개인주의화/합리화가 진행되던 한국 사회가 21세기에 들어서서 개인주의도 집단주의도 아닌 아주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고실업 위험 사회를 살아내기
빨간 마후라. 사실상 도덕적 엄숙주의와 선정적 상업주의는 돈이면 무엇이든 하는 천민자본주의를 계속 굴러가게 하는 ‘한 몸체의 두 얼굴’이다
위험 교실, 침묵은 독. 고3이니까 눈 딱 감고 공부나 하라는 가르침은 불행을 풀어내는 최악의 방법일 것이다.
무고한 죽음. 도저히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사회적 재앙’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합리와 이성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다…타인에게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위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과잉의 시대에 살아남기. 아이들이 소비에 치중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면 아끼라고 말하기보다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좋다…우리 사회는 그런 기회를 주지도 않고 돈 관리를 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나무란다. 소비 사회의 아이들은 자기 나름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 그것을 얻어 내기가 너무 힘든 상황에 처하면 아이들은 자원을 독점한 기성세대에 적대감과 불신감을 갖게 된다.
아이들과 빈 마음으로 자원을 나누자. 스스로 돈 관리, 몸 관리를 할 수 있게 자율의 공간을 마련해 주자. ‘결핍의 시대’를 살아가는 전력이 있듯이, ‘과잉의 시대’에 살아남는 전략이 있다. 그 전략은 금지와 금욕이 아니라 체험과 기획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글로벌 시대 국경 넘나들기. ‘경계 넘나들기’와 ‘탈선’의 차이는 제대로 된 연습의 기회가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청소년은 누구? 교실 붕괴와 청소년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신문과 방송, 텔레비전 토론회…듣고 있으면 모두가 청소년 문제 전문가인데, 실은 전문가가 없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청소년에 대해 써 보라는 숙제를 내 준 적이 있다…“청소년의 반대말은 ‘자유’다…”
부산 ‘우다다학교’ 무인도 탐사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것. 제도권 학교…좋게 이야기하면 온실이고 안 좋게 이야기하면 편안한 감옥이다…이 나라에 미래를 만들어 갈 현재를 살아가는 십대를 위한 교육 정책이나 청소년 정책이 있기나 한 것일까?
강의실 붕괴. 중고등학교 교실이 엉망이라고…열린 교실 탓하는 이들도…한 자년 시대를 탓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주범론’은 무의미하고, 남을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게 하기 때문에 위험하기조차 하다.
#학교를 살려 사회를 살린다
하고 싶은 걸 왜 참나요. 하자작업장학교. 하자의 시간을 아주 느리게 흐른다. 그런데 보면 어느새 놀라운 것들이 생산돼 있다. 이들은 대학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미래를 보장해 주는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이 아이들은 ‘학교를 이탈하면 죽는다’는 어른들의 강박증이 안타까울 뿐이다. 배움의 기쁨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며, 욕망이 없는 기계 인간이 돼야 한다면 어떻게 이 카오스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학습시공간. 급변하는 시대의 교육은 그 전 시대와는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요즘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라고 말한다. 너무 부족한 것이 없이 자라서 그렇다고 한다. 정말 그 말이 맞을까?
그들이 부모보다는 경제적인 부를 누린 세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좀 덜 부족한 경제 상황에서 살았다고 해서 다른 것도 덜 부족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것은 물질주의자들이나 할 생각이다.
과도기는 꿈꾸는 사람들의 시대다. 꿈을 실행 기획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위험이 가득한 사회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한’ 시도들이 난무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하면 된다’는 시대가 아니라, ‘하면 더 망치는 시대’라는 말이다…문제를 풀려고 아등바등할수록 더욱 문제가 심각하게 꼬이는 사회, 사실, 이럴 때는 뭔가 하려는 사람보다 남을 해치지 않고 노는 사람이 더 훌륭한 주민이 된다. 많은 이들이 다시 신화를 읽고 판타지 소설에 탐닉하는 것도 모두 이런 ‘비약’을 요구하는 전환기적 시대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수련의 자리, 구경꾼의 자리. “…야! 너 코딱지! 뭐하는 거냐? 이걸 그냥./ 주목!../4시15분까지 체육복 갈아입고 여기 집합합니다/ 뭐 싫다고?.” 3~5분 사이로 존댓말과 반말, 그리고 고함소리가 절묘하게 섞인 연설이다…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야외 활동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기획력이 있는 교사들이 아이들과 함께 기획하고 진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 교실에서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다른 모습을 보면서 친해지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연히 관찰하게 된 ‘수련 활동’을 통해 나는 청소년은 학교에 있으나 학교 밖에 있으나 통제와 관리의 대상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공부하는 시간을 대폭 줄여 청소년들 스스로가 삶을 기획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과 기획력 있는 교사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 이 두 가지가 지금 시점에서 교육부가 시급히 해내야 할 핵심 사안이다.
#다시, 마을이다
노동하는 몸, 놀이하는 몸
#학교가 있는 마을에서 쓰는 편지
배움은 만남이며 돌봄이다.
우리 동네 사람이 되어 주세요.
아이들을 망치는 386세대 드센 부모들. 386세대는 가난하지만 사랑이 풍부한 어른들의 손에 키워졌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이모와 삼촌, 동네 아주머니들,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진 어머니들이 계셨지요. 그런 사랑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실은 386세대가 그 무서운 군부 독재와 싸울 수 있던 힘이었을 겁니다.
#에필로그
누구도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바벨탑의 시대에 계몽의 말은 진부하고 지루합니다. 따뜻한 말, 친밀한 감정, 신뢰의 눈길이 힘이 되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 가야 할 때인 것이지요. 환경, 일상의 조건을 바꾸어야 뭔가가 제대로 달라집니다.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실천의 때가 온 것 같습니다…이제 서로 접속하면서 그 판을 키워 가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접속을 통한 비약의 즐거움을 만끽하면 좋겠습니다….마음 맞는 이들과 같이 가다 보면 길이 보이고 집도 생기고 학교도 생기고 마을도 만들어집니다. 상부상조하는 마을 없이 어떻게 이 삭막한 시대를 살아 낼 수 있을까요? 마을이 없는 사람들은 살기가 점점 더 무섭고 힘들어질 것입니다. 아직 머뭇거리며 접속을 하지 못한 이들은 이제 용기를 내어 근처의 마을을 찾아 나서면 합니다.
서로를 돌보는 마을이 생기면 세상이 크게 달라질 겁니다.
사람들이 주민으로 마을 일을 토론하고/ 마을 잔치에 덕담을 준비하고/ 마을 역사를 기록하고 해석하느라/ 모두 글쟁이들이 되어 버린 마을을 상상해 봅니다…이것이 곧 후기 근대의 ‘공공 영역’을 만들어 가는 것이고/ 후기 근대의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일과 놀이와 배움이 어우러진 창조적 삶을 사는 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