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엄기호. p319
선생님들의 학교현장 이야기
교사도, 학생도 다 소진burn-out.
본문에 나오는 한 학생의 말이 기억난다. 새벽에 일어나 학교에 오는 것만으로 자기 할 일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새벽에 일어나 학교에 오는 동안 하루에 쓸 에너지 모두를 소모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교사들 역시 소진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은 끊임없이 몰아닥치지만 그것이 교육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시키는 사람도 모르고, 하는 사람도 모른다. 한 교사는 의미도 가치도 못 느끼면서 시키는 대로 전진하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좀비라고 자조했다.
이계삼의 교육 불가능성? 학교에 국한하여 더 이상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더 이상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에서는 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육이란 낯선 것, 새로운 것을 만나 경이로움을 느끼는 연속적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낯선 것/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고 설레야 한다. 그러나 지금 모두가 소진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낯선 것/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만 하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자는 말만큼 짜증 나는 말이 없다. 피곤이 설렘을, 짜증이 경이로움을 대체했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교육을 통한 성장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교육의 공간임을 자임하는 학교에서는 무엇이 가능한가를 묻기 위해 만든 말이 ‘교육 불가능성’이었다.
일이 벌어지면 모두가 학교와 교사를 비난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하는 일에는 별 관심도 없고 알기 위해 에너지를 투여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이 뭘 해낼 수 있을것이라는 기대도 전혀 하지 않는다.
냉소와 비난 사이의 교육은 사회의 무능에 대한 알리바이로 갇혀 있었다. 여기서 교사의 딜레마가 만들어진다. 열심히 학생을 만나고 새로운 수업을 준비하면 격려를 받는 것이 아니라 불온시된다. 학교에 분란을 일으킨다고 말이다.그래서 가만히 있다가 무슨 문제라도 벌어지면 네가 그러고도 교사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학교가 망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어떻게 망했는지, 그 망한 폐허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이런 안다는 착각이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그저 냉소에 머물게 한다. 그 냉소에 도전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 폐허를 응시해야 한다. 희망은 그 폐허에 대한 응시에서 나온다.
나는 그 폐허를 같이 응시하며 희망을 만들고자 하는 분들과 이 책을 같이 읽고 싶다.
이 책은 이처럼 사람은 기대어 사는 존재라는 내 확신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람은 기대어 사는 존재다. 기댈 사람이 없는 사람과 자신에게 기대는 사람 하나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모든 창작과 노동은 ‘기대어 하는’ 활동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노동으로 서로 엮어 있으며, 노동으로 서로에게 덕을 베풀고 은혜를 입는 존재라는 것이 곧 이 책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다.
파국의 시대, 서로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우리는 학교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저 가방 들고 학교만 꼬박꼬박 다니게 하다가 졸업하니 낭떠러지!”
갑자기 교육과 학교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12년 동안이나 학교를 다녔는데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게 말이 되냐고 버럭 화를 냈다. 아무런 책임감 없이 그저 가방만 들고 학교만 꼬박꼬박 다니게 하다가 졸업하니 낭떠러지란다. 부모도 막막하고 학생도 막막하다. 이렇게 아무것고 책임지지 않을 것이면서 왜 12년 동안 그렇게 고압적으로 사람을 윽박질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분개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약에 쓰려 해고 어디 한 군데 쓸모가 없는 것이 학교라는 말이다.
선배 아들의 이야기는 지금 교육과 학교가 어떤 위기를 겪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의 학교는 절대 다수의 학생들에게 그 어떤 의미도, 전망도, 준비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학교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왜 그런 위기가 왔는지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학교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으며, 그 기대는 가능한 것이지, 혹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되지도 않고 될 필요도 없는 일에 공연한 헛수고를 하는 셈이 된다.
교육과 학교는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한 개인뿐만 아니라 한 집안 전체의 사회적 탈출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런 계몽의 기구로서, 사회적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서 학교의 역할은 지난 20여 년 동안 거의 완전히 무너졌다. 무엇보다 학교가 지식을 독점하며 배움의 유일한 기관이던 시대가 지나갔다. 오히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미디어에서 흘러나오는 것보다 더 낙후된 것들이 많다…점차 학교는 살아가기 위한 배움과 멀어지고 공동화(空洞化)되고 있다.
교육의 보다 근본적인 측면인 계몽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학교의 신화는 벗겨진 지 오래다…사람들은 더 이상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자신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그런 지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사람을 국가와 시장에 종속시키는 역할만 하고 있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배울수록 무지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배울수록 무지해지고 맹목적이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생겼다. 배움을 통해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민이 아니라, 국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 시장논리에 충실한 ‘소비자’만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말로 학교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신분 상승의 역할도 끝났다. 이제 아무도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한 학생이 서울대를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정보력 그리고 학생의 체력이.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인간 된다’? 학교는 성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도리어 자신의 성장을 반대했다고 말하는 학생이 더 많았다. 반면 군대를 다녀와서 성장했다고 말하는 학생이 의외로 많았다.
이들이 군대에서 배웠다는 것이 바로 타자성이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 다음/타자성은 인간의 성장에 필수적이다. 인간은 다름을 만나고 마주쳤을 때에만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인간은 다름/타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재간이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타자와 만나지 않는 성장이란 불가능하다.
학교는 동질성으로 똘똘 뭉친 배타적인 공간이며 타자성을 적대하는 공간이다. 이것이 왕따와 자살 같은 학교 폭력의 근거를 이룬다.
#어떤 교사들의 딜레마
모두가 냉소하는 시대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서 이미 그것이 실패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원인과 결과도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곳이 학교다.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시도도 하지 않고, 시도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가 진짜 결과가 된다.
그 과정에서 모두가 냉소하기만 할 뿐 서로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위기 중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다 안다고 착각하는 냉소적 주체들, 결과까지 다 알기 때문에 절대 움직이지도 않고 모이려고도 하지 않는 주체들, 이들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학생들에게 집중하기 위해 때로는 동료 교사들과의 불화까지 감수하고 있지만, 정작 학생들과의 관계는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점에서 이 교사들의 태도는 교사사회에서 자신들의 고립만 심화시키는 딜레마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학교가 성장과 배움의 공동체라는 기대가 어떻게 무너져가고 있는지를 내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 교사와 동료 교사 사이에 ‘성장을 위해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만남’이라는 의미에서의 ‘교육적 만남’은 점차 불가능한 것이 된다. 교육적 만남이 교육현장에서 회피되고, 대신 그 자리를 자기 단속의 문화가 차지하고 있다. 교사가 학생과, 학생이 교사와, 교사가 동료 교사와 가급적이면 부딪치지 않고 서로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며 형식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요컨대 이들이 추구하는 ‘성장을 위해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만남’, 즉 ‘교육적 만남’이 더욱더 불가능해지는 역설적 상황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너 하고 싶은 걸 해.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폭력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득도하기 전까기는, 자신보다 남이 자기에 대해 더 잘 아는 법이다…그 나이에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아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거울, 타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가르치는 사람,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배의 아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타자를 통해 자신을 비춰볼 기회를 가졌을까? 그런 교사가 있었을까? 그런 교사가 있다며, 그들은 학교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 책은 바로 그런 교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폐허가 된 학교를 응시하려고 한다.
##교실이라는 정글
배움은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의 만남. 이 만남은 가르치는 이가 배우는 이의 언어로 말을 하고, 배우는 이가 가르치는 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배움으로 성립한다. 그래서 배움의 매체는 다른 무엇보다 말이며, 교실은 말을 하고 말을 듣는 공간이다.
##교무실, 침묵의 공간
교실과 함께 교무실 또한 붕괴하였다. 교실만 침묵의 공간이 된 것이 아니라 교무실 역시 침묵의 공간이 되었다. 반교육적인 교육행정이나 지침에 대해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풍경도 사라졌다…교사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교육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찾기는 힘들게 되었고 교사들은 각자 자신의 책상 앞으로 고립되어갔다.
교무실에는 천 개의 섬이 떠 있다.
무한책임을 지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교사들이 사건사고가 벌어지면 책임마저 ‘독박’을 쓰는 사태가 벌어진다. 누가 그런 일까지 하라고 했냐는 비난을 받는다.
교사의 ‘진짜’ 일은 퇴근 시간 후에 시작된다.
내가 교사가 된 첫 해에 깨달은 게 있다. 교사가 되기 전에 ‘이것이 교사의 진짜 업무’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항상 하루 일과가 끝난 뒤, 주말 그리고 방학 때가 되어야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슨 일들이 그렇게 많은지,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았다.
“학교 교육의 총제는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수업과 그 안팎에서 이루어내는 모든 ‘만남’과 ‘부딪침’의 총량”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온종일 모니터를 바라보는 교육현장”에서는 만남이 교사의 업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업무가 만남을 단절시키고 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교육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선도위원회나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같이 학교나 학생에게 중요한 회의는 대부분 근무 시간이 아니라 근무 시간 밖에서 일어난다.
#토론이 사라진 교무실
이렇게 하는 건 죄인 거예요. 이렇게 무력하고, 교사가 학생을 보는데 자극이 없다는 것은 사실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인 거죠.
‘교장의 왕국’? 군사독재 시절의 당신 교육법 75조는 “교사는 교장의 명에 따라 교육한다”고 명시했다.
교사들의 대화에 교육이 없다. “텔레비전 이야기” 아니면 “학생이나 관리자에 대한 뒷담화”뿐이다
#교사,교무실의 외로운 섬들
가르침의 내용과 교사의 개성이 밀착되지 않으니 일이 그냥 하나의 직업, 밥벌이가 되죠. 삶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이 약해지고 무신경해질 수밖에 없어요.
사람을 대하는 일. 매뉴얼보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지혜가 더 필요할 때가 많다. 학생이나 학부모와 관련된 예기치 못한 사건이나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교사 혼자만의 힘으로는 문제를 풀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능력주의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경험의 축적과 지혜의 나눔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관료주의. 학교가 “교육하는 조직보다는 행정을 처리하는 조직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위에서 시키는 일을 중심으로 과업을 수행”한다는 것이 관료주의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었다.
삶이란 곧 성장이고 성장이란 경험의 갱신과 확장. 이전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다음 경험을 해석하고, 그 새로운 경험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것이 경험의 갱신이고 성장이다.
무한책임과 무책임으로 나뉜 교무실
학생들이 하루 생활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공간.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길지 모르고, 혹시라도 생길 사건과 사고에 대한 책임은 교사가 지게 된다. 따라서 교사들은 교직이 기본적으로 책임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이스터고…이 학생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됩니다. 우리나라 교육 정책은 만들 때는 항상 그럴 듯하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장 대신 무기력만 남은 학교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교사와 교사 간의 교육적 관계 점차 단절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이런 위기의 배경에는 압축적 고도성장을 통해 90년대를 기점으로 소비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했다는 점이 있다…탈학교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시기도 이때다…생활이 아니라 생존이 다시 화두가 되면서, 살아남기 위한 초경쟁사회로 전환했다.
교사사회 또한 평가와 책무성을 중심에 둔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의 도입에 따라 성과 중심의 사회로 변모하게 되었다. 성과사회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얼마나 풍부하고 도움이 되는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일을 잘 해내는 능력이다. 새로운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하고, 자신이 얼마나 잘 적응했는지를 보여주어야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런 성과사회에서 교사들은 자신의 업적을 보여주기에 급급하게 된다…이들이 보기에 학교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추구하는 교육이 가능하지 않다.
성과사회의 주체는 타자에 의해 착취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는 존재라는 한병철의 말을 정확히 교사들에게 적용된다.
교육현장의 자기 단속과 단절이 더 심화되는 딜레마가 바로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 성장과 배움의 공동체라는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 교사와 동료 교사 사이에 ‘성장을 위해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만남’이라는 의미에서 교육적 만남이 점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교육현장에는 교육적 만남 대신 자기 단속의 문화가 들어섰다.
#교무실의 세대 갈등, 이어지지 않는 경험
전교조 세대. 내가 만난 교사들은 교사가 된 다음에 자신들이 바쁘게 일하고 열심히 노력할수록 역설적으로 얼마나 반교육적인 존재가 되는지에 대해 성찰하면서 교사로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중견 이상의 전교조 선배 세대들은 후배들을 ‘포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포섭을 하려면 후배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자기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그것도 늘 “왕년에”로 시작하는 무용담이고 “옛날이 좋았지”하는 이야기들뿐이다.
#학교는 다시 가르침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에서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육적 만남이 어떻게 점차 불가능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단위가 되지 못하는 것이 위기의 실체이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교무실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활발히 토론하며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하지만 정작 교무실은 침묵에 빠져 있다…아무도 나설 수 없는 구조, 나서면 망하는 구조, 그것이 지금 학교의 모습이다.
타자와 만나지 않고 교육은 불가능하다.
배움의 공간으로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깨달았다. 한국의 교실에서는 자신이 하는 질문이 질문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아는 학생만 질문할 수 있다.
질문이란 모르는 자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때 가치를 발하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앎을 위한 여정에서 가장 소중한 질문은 “선생님, 하나도 모르겠는네요?”라는 용감한 질문이다. 그 학생이 모르는 하나를 같이 발견하는 것이 가르침의 출발이며, 그 하나를 아는 것이 배움의 시작이다. 그런데 수업이 끝날 즈음에 질문이 있냐고 물었을 때 학생이 “샘, 하나도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정말 용감하고 좋은 질문이라고 말할 ‘가르치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는 자만 교실에서 질문을 할 수 있고 모르는 자는 질문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교실에서 어떻게 배움이 배반당하고 있으며 선배의 아들을 비롯한 학생들이 왜 학교를 떠나게 되는지 말해준다,
따라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는 “선생님, 하나도 모르겠는데요?”라는 말을 환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교사를 엿 먹이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초대하는 말이다…내 말을 알아듣는 학생들만 만날 때 나는 절대 가르치는 이가 될 수 없다. 나는 그저 말하는 이일 뿐이다…이 질문을 환영하는가 아닌가는, 가르치는 이로서 내가 타자성을 대면하려고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중대한 시험이 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가르치는 사람’들이 깊게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자신의 교직 인생에서 자신을 교사로 성장시킨 학생들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말이다…타자로서의 학생, 타자인 학생들 만나지 않고서 교사로서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