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p128
출간되자마자 열광적인 반응? 이 시대의 뇌관을 건드린 책!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자기 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로서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소진증후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긍정의 배신)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 공격과 방어(타자성 자체,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된다!)
새로운 구도?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21세기 신경성 질환? 긍정성의 변증법? 긍정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보드리야르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 상태” 지적)
같은 것은 항체의 형성을 초래하지 않는다
과잉행동,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 띈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내재성 테러!)
여기에는 부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동질적인 것의 과다,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과잉)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로,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해서는 안 된다‘가 지배적인 조동사,’No’가 지배적)
성과사회의 탈규제화?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Yes We Can)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욕망의 환상!)
소진증후군? 탈진한 자아의 표현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 명령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일과 능력의 피로?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사회?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깊은 심심함
긍정성의 과잉?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눈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활동적 삶-한나 아렌트
삶의 가속화와 존재의 결핍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솟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 낸다…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사유는 활동적 삶의 활동 가운데서도 가장 활동적인 것이며 순수한 활동성의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한다!
#보는 법의 교육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회의 긍정성 증가?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공에 도달하는 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다(참선? 주권적 중심이 되는 연습)
#필경사 바틀비
모든 주민이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버린 비인간적 노동 세계
베껴쓰기는 도무지 어떤 자발성도 허용하지 않는 활동이다
#피로사회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도핑은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 결합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벆에 없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적이다 폭력을 낳았다. 아마도 이러한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그러뜨리는 시선 속에서뿐이었을 것이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안식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
##우울사회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재2의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치유적 피로? 그것은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 건강하고 “세상을 신뢰하는 피로”이다. 반면 자아 피로는 고독한 피로, 세계가 없는, 세계가 부족한, 자아를 고립시키는 나르시즘적 자기 관계의 대가로 타자와의 모든 관계를 파괴해버리는 피로다.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는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해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타자로부터의 자유는 나르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는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
끝없는 기대? 결코 만족감을 맛 볼 수 없게 되고, 이와 나란히 무언가를 완결시킬 수 있는 능력도 상실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격”은 부정성의 현상이다!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이 없는 인간이다. 더욱 일반화하여 말한다면 후기 근대의 자아는 성격이 없다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된다.
자유와 탈규제의 이념을 내세우는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규율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제한과 금지를 대대적으로 철폐한다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룰 더욱 줄여 놓는다…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다.
과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강력한 유대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도 없다.
우울증에 자주 선행하여 나타나는 소진Burnout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빠져가는 주권적 개인의 증상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병리적 결과다!
절대적 경쟁?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진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결국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자기 착취?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도 많은 삶의 능력을 나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면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호모 사케르의 생명은 모든 가치를 상실하고 생명 기능과 생명 활동이라는 내재적 가치로 축소되었다는 점에서 벌거벗은 것이다. 이제 문제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서 생명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일뿐이다.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포스트모던니즘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병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자기 자신 마모…그 결과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직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이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
새로운 입시 교육 구호?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건강‘과 ‘벌거벗은 생명‘이 성과사회의 최후의 가치가 된다면, 미국산 소고기 문제가 최근의 어떤 이슈보다도 압도적으로 더 큰 규모의 시위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그러한 성과사회의 징후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산성에 대한 후기 자본주의의 기본 요구와 착취의 진화?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성공의 유혹?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이것이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
병의원 진단은 나왔지만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피로사회 | 긍정의 배신”에 대한 7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