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향기. 한병철. p182
Duft der Zeit 머무름의 기술
진정한 안식을 모르는 현대인을 위한 철학적 성찰
#한국어판 서문
오늘날의 피로사회는 시간 자체를 인질로 잡고 있다. 이 사회는 시간을 일에 묶어두고, 시간을 곧 일의 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일의 시간은 향기가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일의 시간 이외 다른 시간이 없다. 쉬는 시간도 다른 시간이 아니다. 쉬는 시간은 그저 일의 시간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일의 시간은 오늘날 시간 전체를 잠식해 버렸다…그것 역시 기속화된 일의 시간이 낳은 결과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와 달리, 느리게 살기는 오늘날 당면한 시간의 위기, 시간의 질병을 극복할 수 없다. 느리게 살기 운동은 증상일 뿐이다. 증상으로 병을 치료할 수는 없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다른 시간, 일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시간을 생성하는 시간 혁명이다. 시간에 향기를 되돌려주는 시간 혁명.
#기다림의 감각_역자 해설(김태환)
시간의 위기? 왜 나는 늘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길까? 왜 시간은 그토록 빨리, 그토록 허망하게 지나가버리는 걸까? 그토록 바쁘게 지냈지만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까? …[시간의 향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 의문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오늘날 시간은 리듬과 방향을 상실하고 원자화된다. 시간은 균질한 시-점Zeit-Punkt들로 축소된 현재들의 나열일 뿐이다. 현재는 지속성을 상실하고 순간순간 가볍게 휘발되어 날아가 버린다. 그것은 시간에 무게를 더해주던 의미의 중심, 의미의 중력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무게를 상실한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가지만, 사실은 어디로도 가는 것이 아니다…시간의 진행은 어디론가를 향한 전진이 아니라 단순히 끝없는 현재의 사라짐일 뿐이다.
왜 중심이 사라지는가? 세계를 인간의 작위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근대적 세계관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다.인간은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조작 가능성과 자유의 세계관은 결국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절대화로 이어진다. 무엇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은 완전한 자유가 인간의 존재 가치가 된다. 그러나 구속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자유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의미의 중심은 인간이 그것에 구석되어 있다고 느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구속에서 해방된 인간 자신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순간, 의미의 중심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고 만다.
활동적 삶은 시간도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늘날 훨씬 더 젊고 건강하게 더 오래 산다. 그러나 살아가는 시간의 무게는 말할 수 없이 가벼워졌다. 사람들이 예전보다 잘 늙지 않지만 훨씬 더 빠르게 나이를 먹어버린다는 역설은 여기서 생겨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삶의 시간의 양적인 증가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리듬이 없는 시간은 고유한 시간의 질을 상실한 채 양화된 시간이다. 그것을 한병철은 ‘향기가 없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한병철은 시간의 위기를 초래한 조작 가능성의 세계관과 ‘활동적 삶’의 절대화를 비판한다. 그가 ‘활동적 삶’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색적 삶vita contempativa’이다…그것은 정관하는 삶, 무위의 삶으로서, 행위를 멈추고 우리의 뜻대로 대상을 조작하고 바꾸어버리려는 협소한 욕망을 잊어버리고 그 순간에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을 가만히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것은 어쩌면 기다림에 대한 감각의 복원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한병철은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을 촉구한다. 그는 어쩌면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문구.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그저 여러 가지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경구를 다음과 같이 뒤집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인간은 지칠 줄 모르고 세계를 변혁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의 뜻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다.’
#서론
오늘날 닥쳐온 시간의 위기는 가속화로 규정할 수 없다. 가속화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우리가 현재 가속화라고 느끼는 것은 시간 분산의 징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시대가 겪는 시간의 위기는 다양한 시간적 혼란과 착오를 초래하는 반시간성Dyschronie 때문이다. 반시간성으로 인해 시간은 어지럽게 날아가 버린다. 삶이 가속화된다는 느낌은 실제로는 방향 없이 날아가 버리는 시간에서 오는 감정이다.
반시간성은 더 강화된 가속화의 결과가 아니다. 반시간성을 가져온 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의 원자화다.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지나간다는 느낌도 시간의 원자화에 기인한 것이다. 시간의 분산은 지속의 경험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어떤 것도 시간을 늦추지 못한다. 삶은 더 이상 지속을 수립하는 질서의 구조나 좌표 속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동일시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물들도 금세 사라져버리는 덧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인간 자신이 극단적으로 무상해진다. 삶의 원자화는 원자적 정체성으로 귀착한다. 사람들에겐 자기 자신, 즉 작은 자아밖에 없다. 인간은 급격하게 공간과 시간을, 세계를, 공동의 삶을 상실해간다. 세계의 결핍은 반시간적 현상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작은 육체로 쪼그라들며, 그 작은 육체를 건강하게 지키려고 악착같이 애쓰게 된다. 그것밖에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사색적 삶을 되살리는 일이다. 시간 위기는 위기에 봉착한 활동적 삶이 사색적 삶을 다시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에 비로소 극복될 것이다.
제때 죽을 수 없는 사람은 불시에 끝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가속화 역시 끝을 맺고 마무리하는 능력의 전반적인 소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은 그 어디에서도 종결과 완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을 붙들어주는 아무런 시간적 중력도 없기 때문에, 그저 마구 돌진할 뿐이다,
#시간의 중력 파괴
이미 하이데거는 점점 흩어져버린 무역사적 현재에 직면하여 “오늘의 탈현재화“를 여구한 바 있다. 현재가 축소되고 지속이 사라져가는 것은 흔히 착각하듯이 가속화 때문이 아니다…현재를 이루는 점들 사이에 아무런 중력도 작용하지 못한다면, 시간은 휩쓸려가고 방향 없는 과정의 가속화가 촉발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방향이 없는 까닭에 가속화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가속화의 테제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오늘날 삶이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오늘날 죽음과 관련하여 언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삶이 극단으로 고립되고 원자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향기 없는 시간
#역사의 속도
“그의 삶은 서로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 감각들의 불연속적 연쇄가 될 것이다.”-드니 디드로
현대적 기술을 통해 인간은 땅에서 분리된다. 비행기와 우주선은 인간을 지구의 중력에서 떼어넣는다. 인간이 땅에서 멀어질수록, 땅은 더 작아진다. 인간이 땅 위에서 빨리 움직일수록 땅은 그만큼 줄어든다. 지상의 거리를 극복할 때마다 인간과 땅 사이의 거리는 커져간다. 그리하여 인간은 땅에 대해 소원해진다. 인터넷과 전자우편은 지리를, 아예 땅 자체를 증발시킨다.
현대적 기술은 인간의 삶을 땅에서 소외시킨다.
어디로 가는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가속화와 정지 상태는 방향의 부재가 초래한 상반된 듯한 현상, 동전의 양면!(목적지가 없다면 출발할 수 없다)
탈시간화는 모든 서사적 긴장을 소멸시킨다. 이야기되는 세계 속의 시간은 단순한 사건들의 연대기로 해체되어버린다…불시의 중단이 의미 있는 종결을 대체한다.
#행진의 시대에서 난비의 시대로
끊임없이 새로운 출발, 옵션, 버전,…삶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지속성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느낌일 뿐이다!
시간이 과거보다 훨씬 더 빨리 간다는 인상 또한 오늘날 사람들이 머무를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 지속의 경험이 대단히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정에서 비롯된다.
#현재의 역설
가속화는 세계의 의미론적 빈곤을 초래한다. 공간과 시간은 더 이상 많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현재화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현재해야 한다(now and here) 현재성에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사이공간과 사이시간들은 폐기된다.
진리와 인식은 지속을 바탕으로 한다
#향기로운 시간의 수정
프루스트에게 조급성의 시대는 곧 모든 “사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철도의 시대였다.
조급성의 시대에 맞선 프루스트의 시간 전략의 핵심? 지속성, 시간의 향기가 발하도록 만드는 것!
프루스트의 시간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향기로운 시간의 정수는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조급성의 시대는 “영화적” 사회, 조급함의 시대는 향기가 없는 시대이다.
#천사의 시간
이야기의 종언은 무엇보다 시간의 위기다. 이야기의 종언과 함께,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을 현재 속에 모여들이는 시간의 중력이 파괴되는 것이다. 시간적 집중이 일어나지 않으면 시간도 해체되고 만다.
#향기로운 시계: 고대 중국으로의 짧은 여행
중국에서는 향인이라고 불리는 향시계가 19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좋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을 비워낸 정신이다. 바로 이러한 비움이 정신을 욕망에서 해방하고 시간이 깊이를 준다. 시간의 깊이는 모든 순간을 온 존재와, 그 향기로운 영원성과 결합한다. 시간을 극도로 무성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정신이 가만히 서 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세계의 윤무
새로운 미디어는 공간 자체를 철폐한다. 하이퍼링크는 길을 없애버린다.
머무르지 못하는 산만함, 머무름의 부재
결국 시간이 없다는 이러한 의식은 예전처럼 시간을 미루며 낭비하는 것보다 더 큰 자아의 상실을 가져온다.
“고유한” 실존은 “느리다.”
#떡갈나무의 냄새
“왜 사람들은 한번도 느림의 신을 생각해내지 않았을까?”-페터 한트케
전반적으로 삶의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인간은 사색적 능력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오직 사색적인 머무름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갇히고 만다.
사색적 머무름은 지속하는 사물을 전제한다. 빠르게 연속되는 사건이나 이미지 들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적을수록 더 많다? 느린 것에 대한 긴 용기
노동은 사물과의 거리를 제거한다. 반면 사색적 시선은 사물을 지켜준다.
#권태
권태는 결국 시간이 공허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은 더 이상 충만하지 못하다. 행위 주체의 자유만으로는 아무런 시간의 중력도 만들어지지 않는다…충만한 시간이란 곧 지속의 시간이다.
깊은 권태는 과도한 활동성, 어떤 형태의 사색도 알지 못하는 활동적 삶의 이면이다.
#사색적 삶
철학하는 것은 곧 보는 것(테오레인)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한가로움(스콜레) 덕분에 가능해진다.
노동은 꼭 해결되어야 할 삶의 욕구에 묶여 있다. 노동은 자기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노동은 그에게서 자유를 박탈한다. 한가로움은 모든 근심, 모든 궁지, 모든 강제에서 해방된 상태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하루 6시간씩만 일하면서 된다. 일없는 시간에 “유토피아인들”은 한가로움과 사색에 몰두한다.(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의 공식? 4-4-4!)
기계로서의 산업화는 인간의 시간을 기계의 시간에 동화시키려 한다. 산업화의 명령은 기계의 박자에 맞게 인간을 개조하려는 시간경제학적 명령이다.
소비사회, 소비와 지속성은 상반적이다. 소비재는 지속을 알지 못한다.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은 머물러 있는 법을 잊어버린다.
소비 태도로 본다면 ‘슬로푸드’도 ‘패스트푸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사물이 소모되기는 어느쪽이나 마찬가지다. 속도를 줄이는 것만으로 사물의 존재를 탈바꿈시키지 못한다. 진짜 문제는 지속되는 것, 긴 것, 느린 것이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사색적 삶은 지속성의 실천이다. 그것은 노동의 시간을 중단시킴으로써 다른 시간을 정립한다.
거친 일을 기꺼워하는 너희, 빠른 것,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좋아하는 자들아,-너희는 잘 참지 못한다. 너희의 부지런함은 도피이며 자기 자신을 잊으려는 의지이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을 위해 스스로를 던져버리는 일도 적어지리라. 하지만 너희에게는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내용이 속에 담겨 있지 않구나-게으를 수 있을 만한 내용조차 없구나!-니체
사색하는 머무름은 노동으로서의 시간을 중단시킨다. 사색적 삶은 시간 자체를 고양시킨다.
모든 사색적 요소가 추방되어버린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 왜나하면 이러한 삶만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가쁜 숨을 헐떡이는 사람에게는 정신도 없다.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의 민주화가 만인의 노예화로 전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니체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